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도스토옙스키 선생, 뭐 필요한 건 없수?”

“문학사 전체를 통해 이보다 더 훌륭한 작품은 없다고 봐요. 서사도 물론 좋지만, 나는 이게 교육적인 책이라 생각해요. 도스토옙스키씨에게 사랑한다고 전해줘요.”  
 
톨스토이가 『죽음의 집의 기록』을 다시 읽고 1880년 지인에게 쓴 편지다. 톨스토이처럼 까칠한 사람이 평생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라이벌 작가에게 “사랑한다”고 전해 달라니,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얼마나 감동적이었으면 그랬을까. 아니, 무엇이 그토록 감동적이었을까.  
 
옴스크 태생의 화가 게오르기 키치긴이 그린『죽음의 집의 기록』일러스트(2009)

옴스크 태생의 화가 게오르기 키치긴이 그린『죽음의 집의 기록』일러스트(2009)

원래 속속들이 실용적이었던 톨스토이는 이즈음에 이르러서는 아예 창작은 접어두고 자타 공인 ‘민중의 교사’로 나서서 도덕적인 삶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이 소설을 상찬한 것은 문학적인 완성도가 아니라 그 내용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쓸모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소설의 집필을 가능케 해준 정황은 그 자체가 어떤 면에서 대단히 ‘교육적’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유형 생활 동안 육체적인 고통과 불편에 대해서는 그다지 불평하지 않았다. 열악한 급식, 혹한과 혹서, 동상, 빈대와 벼룩 등등 모든 것에 적응했다. 그리고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인간은 불사신이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 생각한다.”  
 
강제 노역도 그에게는 신체 단련의 기회였다. “나는 육체를 단련하기로 했다. 건강하고 혈기왕성하고 쾌활한 사람이 되어 감옥 문을 나서고 싶다. 늙어서 나가지 않을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해 그는 “멘탈이 강한” 사람이었다.  
 
수용소 사령관부터 위병 초소까지, 그의 도우미가 되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정신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무사히 살아남아 5년이나 뒤에 『죽음의 집의 기록』을 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시베리아 시기에 그와 관련된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청하지도 않는데 그를 돕고 싶어 안달을 했다. 사령관 데 그라베는 “‘이 모범적인 죄수’의 형기를 줄여달라”는 편지를 중앙 부서에 보냈다. 보리슬랍스키 장군, 그의 부관 이바노프 대위 등 군 관계자들은 교묘하게 서류를 조작해 도스토옙스키의 노역을 바퀴 수선이나 페인트 칠하기 같은 가벼운 일로 바꿔주었다. 초소의 위병들은 작가인 그가 읽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는 상황이 안타까워서 몰래 『데이비드 코퍼필드』와 『픽윅 페이퍼즈』 같은 소설을 가져다주었다. 용의주도한 도스토옙스키는 소중한 선물을 병원에 맡겨두고 읽었다. 혹시라도 들켜서 압수당하거나 꼬투리를 잡힐까봐 절대로 막사로 가져 가지 않았다.  
 
뭐니뭐니해도 ‘도스토옙스키 살리기’의 일등공신은 병원장 닥터 트로이츠키다. 그는 기회만 닿으면 어떤 구실을 대어서라도 도스토옙스키를 병원에 입원시켰다. 덕분에 죄수는 지옥굴 같은 막사에서 벗어나 청결한 입원실에 머무르며 조용히 사색을 하거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병원 식당이나 닥터 전용 주방에서 조리된 영양가 높은 식사는 물론 차와 커피, 심지어 와인까지 대접받았다.  
 
게다가 병원에서 그는 글을 쓸 수 있었다. 유형수는 읽거나 쓰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병원장 특명으로 도스토옙스키에게는 메모장과 펜이 제공되었고, 막사에서 보고들은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끄적거릴 수 있었다. 병원 의료진은 그 메모를 몰래 보관해두었다가 나중에 그가 형기를 마치자 돌려주었다. 오늘날 ‘시베리아 노트’라 알려진 메모장에 수록된 농부들의 방언·민담·민요 및 죄수들의 소위 ‘무용담’과 은어와 속어는 『죽음의 집의 기록』의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자유를 지향하는 삶, 그것은 치열하게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  
도스토옙스키는 노역을 하다가도 이르티시 강 저편을 바라보며 자유를 꿈꾸곤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노역을 하다가도 이르티시 강 저편을 바라보며 자유를 꿈꾸곤 했다.

시베리아 노트는 도스토옙스키가 옴스크 병원에서 기록한 메모다. 원본은 러시아 국립도서관에 보존돼 있다.

시베리아 노트는 도스토옙스키가 옴스크 병원에서 기록한 메모다. 원본은 러시아 국립도서관에 보존돼 있다.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을 정립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그는 집중해서 강도 높게 인간을 관찰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가차없는 분석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관찰은 ‘3인칭의 인간’이 아닌 ‘나’를 포함하는 ‘1인칭 우리 인간’에 관한 철학으로 굳혀졌다. 그만큼 더 설득력이 있고 개연성이 있다.  
 
그가 유형지에서 발견하고 탐구했고 이후 소설에서 끝없이 발전시키게 될 인간 본성의 출발점은 자유다. 자유는 정치적 사회적 개념인 동시에 심리적이고 종교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로 들어오면서 그것은 한 개인으로 하여금 현실 속에서 도덕적인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는 일종의 ‘인격 수양’ 비슷한 어떤 것이 된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소설을 “교육적”이라고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유를 본능과 가치로 나누어 보았다. 자유는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다. 강아지도 줄에 묶어 놓으면 낑낑거린다. 식욕이나 성욕처럼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충족시켜야 하는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기를 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먹으려 하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닌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예일 대학교의 잭슨 교수는 이를 가리켜 “생명과 생존에 대한 본능의 파토스”라 불렀다. 자유에의 욕구는 너무나 강렬해서 다른 모든 것을 제압한다. 그러나 오로지 그 자유만을 위해 인간적인 품위·양심·도덕·상식을 넘어설 때 인간은 괴물이 된다. 옴스크 감옥의 가장 추악한 죄수들이 바로 그런 괴물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는 본능과 정반대되는 최고의 가치를 향한 지향이다. 자유란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사는 동안 동물적인 본능과 욕망과 집착, 공포와 불안, 좌절과 절망과 증오와 분노를 딛고 일어서서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거쳐 사랑과 용서와 나눔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자유란 궁극에 가서는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인간이 스스로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도덕적 상태를 획득할 정도로 자아를 극복하고 자신의 의지를 극복하는 데 있다”고 단언했다.  
 
본능이자 가치로서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중성으로 이어진다. 도스토옙스키의 사전에서 악이란 본능으로서의 자유 추구가 극대화된 상태를, 선이란 가치로서의 자유 추구가 극대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의 내면에는 선의 가능성과 악의 가능성이 공존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극단적인 본능 충족과 극단적인 가치 추구 사이 어디엔가 존재한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인간은 모두 선과 악의 중간 지대에 위태롭게 서 있다. “어떻게 가장 고상한 이상과 극도의 추잡함을 한 영혼 속에 동시에 간직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인간인 이상 그 누구도 완벽하게 선할 수 없고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는 최고의 가치로서의 자유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지향을 둔 삶을 강조한다. 자유를 지향하는 삶은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삶, 치열하게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삶이다. 그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것은 ‘자유를 획득한 인간’(어차피 그것은 불가능하다)이 아니라 자유라는 궁극의 종착점을 향해 온갖 고난과 좌절을 무릅쓰고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중요한 것은 중단 없는 자유에의 지향, 자유라는 목적에 대한 갈망이다. 유형지에서 도스토옙스키를 지탱해준 것도 바로 이 갈망이다. 
 
“단 하나, 부활과 갱생과 새로운 생활에 대한 강렬한 갈망만이 나를 지탱할 수 있게 해준 힘이었다. 그리고 나는 결국 참아냈다. 나는 기다렸다. 나는 하루하루를 세어나갔다. 1000일이나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하루씩 세어나갔다. 하루를 묻어버리면서 다음날이 오면 이제는 1000일이 아니라 999일이 남았다고 기뻐했다.”  
 
강 건너를 바라보며 자유를 꿈꾸던 죄수, 아니 소설가
기념관을 나온 우리 세 사람은 천천히 걸어서 이르티시 강으로 갔다. 이르티시 강은 알타이산맥에서 발원하여 카자흐스탄을 거쳐 시베리아로 흘러들어가는 거대한 물줄기다. 도스토옙스키는 강변에 노역을 하러 나올 때면 물끄러미 강 건너 세상을 바라보며 자유를 꿈꾸곤 했다. “내가 이르티시 강에 대해 그토록 자주 말을 꺼내는 이유는 그 강변에서만이 신의 세계가, 순결하고 투명한 저 먼 곳이, 황량함으로 내게 신비한 인상을 불러일으켰던 인적 없는 자유의 초원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죄수들이 감옥의 창을 통해 자유세계를 동경하듯이 나는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광야를 바라보곤 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푸른 창공을 나는 이름 모를 새를 보면서 그의 비상을 좇아 시선을 옮기기도 하였다. 새는 수면 위를 살짝 차고 오르며 창공으로 사라져서는 아주 작은 점으로 아른거렸다.”  
 
우리는 도스토옙스키의 눈으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강가에는 수양버들이 늘어서 있었고 더 멀리에는 전나무와 소나무 숲이 검은 장막처럼 펼쳐있었다. 하늘을 뒤덮은 기괴한 구름은 시시각각 형태를 바꾸며 움직였다. 하늘과 구름과 강과 나무가 전부였다. 오래전 러시아 죄수의 가슴을 채웠던 자유에의 갈망이 꿈틀거리며 우리에게 몰려오는 것 같았다. 하염없이 강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던 우리의 머릿속을 『죽음의 집의 기록』의 한 대목이 스쳐 지나갔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어떤 목적 없이는, 그리고 그 목적을 향한 지향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우리 모두에게 목적은 자유, 그리고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