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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더 이상 군복 입은 특사는 없다"

노동당에 무게 싣는 실험 통해 김정일의 선군정치 한계 극복…
군부의 외화벌이 사업권, 인허가 권한 노동당과 내각에 이관해
 
2015년 2월 평양의 노동당사 본관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가운데). [사진 연합뉴스]

2015년 2월 평양의 노동당사 본관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가운데). [사진 연합뉴스]

지 난 3월 5일 오후 평양 서쪽 외곽 지역에 자리한 고방산초대소. 대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급 휴양시설인 이곳으로부터 검은색 메르세데스-벤츠 리무진 행렬이빠져나왔다. 강변도로를 쏜살같이 달려 평양 중심가인 창광거리에 들어선 차량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3층 대리석건물 앞에 멎었다.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북한군 특수요원들이 삼엄한 경비를 펼친 건물 꼭대기에는 붉은색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일행이 도착한 장소는 북한 체제를 70년 동안지배해온 조선노동당의 사령부라 불리는 당 중앙위원회 청사였다. 
 
차량에서 내린 이들은 잠시 숨을 돌린 뒤 오후 6시부터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과 만났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특사로평양을 방문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 등 5명의 한국 정부 고위 인사들이다. 특사 일행은 북한의 비핵화 문제와 남북정상회담 개최, 한미 합동군사훈련등 남북 및 한반도 관련 정세와 현안을 둘러싼 문 대통령의메시지를 전달했다. 이와 함께 ‘4월 말 판문점에서의 남북정상회담 개최’와 ‘정상 간 핫라인 개설’ 등에 의견 접근을 봤다. 한 시간 남짓한 접견과 면담 일정이 마무리되자 특사 일행은 같은 건물의 연회장으로 안내됐다. 고급 와인과 코스 요리, 그리고 김정은의 부인 이설주, 여동생 김여정 당 제1부부장까지 함께하는 화기애애한 만찬이 이어졌다.
 
북한 측이 서울에서 간 특사단 일행을 노동당 중앙위원회청사에서 맞은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두 차례의정상회담을 비롯한 당국 간 대화나 교류에서 접견과 만찬장소는 남측 숙소인 백화원초대소 또는 회의 시설이 갖춰진인민문화궁전이나 만수대의사당이 활용됐다. 내부는 한 번도 남측에 공개된 적이 없었다. 북한은 이곳을 ‘조선노동당의 혁명과업 수행을 위한 사령부’라고 주장하며 신성시하다시피 했고 오랜 기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런데 김정은이특사단을 맞아 면담과 만찬을 진행하는 파격 행보를 보인것이다.
 
'혁명과업 수행을 위한 사령부'
지난해 8월 ‘선군절’을 맞아 김일성-김정일 동상에 헌화하는 북한군 장병들. [사진 중앙포토]

지난해 8월 ‘선군절’을 맞아 김일성-김정일 동상에 헌화하는 북한군 장병들. [사진 중앙포토]

이를 두고 노동당을 전면에 내세워 북한 체제를 이끌어가는 김정은의 통치 스타일 때문에 가능한 일이란 해석이 우리정부 안팎에서 나왔다. 집권 7년 차에 접어든 김정은 위원장은 노동당의 위상과 역할을 부각시키려는 모습을 보여왔다.‘비정상화된 당(黨) 정상화’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은은 한 발더 나아가 노동당을 체제 결속과 선전·선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애썼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기 <노동신문> 등 3대 신문의 공동사설로 신년사를 대체하던 데서 벗어나 직접육성 연설을 했고, 그 장소로 당 중앙위 청사를 선택했다. 김정은의 TV 연설 중간중간 미리 녹음해놓은 박수 소리를 끼워 넣었고, 이때마다 당 청사의 전경을 담은 영상이 등장했다. 김정은이 영도하는 노동당을 중심으로 단결하자는 메시지의 전달 효과를 높이는 데 당 청사가 핵심적인 요소로 등장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당 대회나 전원회의 등 형식이나 절차를 생략한 채 자신의 비준이나 교시로 통치를 이끌어가던 아버지김정일과 차이가 난다. ‘내가 곧 왕이요, 통치 권력이다’는 식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법적 절차나 규정을 지키려는 모습을김정은이 보여주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김정일의 경우 노동당 총비서로 17년 동안 최고 권력을 누렸지만 정작 당 대회는 한 번도 개최하지 못했다. 당 대회는 북한 체제의 정치·외교·경제와 사회·문화·사상 등 통치 전반을 평가하고 새 계획과 비전을 제시하는 행사라고할 수 있다. 당 규약은 5년마다 당 대회를 열도록 규정하고있지만 1980년 10월 6차 대회 이후 김정일 위원장은 당 대회개최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1994년 사망 때까지 북한을 통치한 김일성 국가주석과 이후 권력을 넘겨받은 김정일은 “경제 문제가 나아지면 당 대회를 열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한것으로 북한 문헌들은 설명한다. 파탄에 이른 경제와 민생문제가 당 대회의 정상적 개최에 걸림돌이 됐다는 얘기다.
 
그런데 김정은은 집권 5년 차에 접어든 2016년 5월 평양4·25문화회관에서 나흘 일정의 당 대회를 열었다. 김정일 사망 이후 아버지의 직함인 ‘총비서’와 ‘국방위원장’ 같은 직함을 쓰지 못하고 당 제1비서라는 어정쩡한 직함을 갖고 있던김정은은 ‘당 위원장’이란 새 직함을 얻었다. 이 때문에 ‘셀프대관식’을 위한 당 대회 개최였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이를 통해 조선노동당의 살아 있는 수령임을 뒤늦게 과시할수 있었다.
 
사생결단식 파벌투쟁과 경제 이권
 
행사에서 김정은은 3시간 동안의 육성 연설을 통해 1980년6차 당 대회 이후를 평가하고 향후 핵 문제와 경제과업 등통치 구상을 제시하는 사업총화 보고를 했다. 장문의 연설을 통해 그가 쏟아낸 주장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김정은으로서는 당 대회 개최를 통해 조선노동당을 통치의 기본 틀로 삼겠다는 걸 선언한 셈이 됐다. 당 대회에서는 또 핵심 당원으로 짜인 당 대표 3667명 등 모두 5000여 명이 자리한 가운데 328개의 직위를 부여하는 결정을 했다. 김정은 체제의노선과 조직 등을 꾸려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행사였다고볼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직후부터 군부의 힘을 빼는 조치에착수했다. 특히 군부가 장악하고 있던 외화벌이 사업권이나인허가 권한을 노동당과 내각의 전문 부서나 관련 업체에 넘겨주는 데 주력했다. 집권 첫해인 2012년 7월 벌어진 총참모장 이영호 숙청 사건은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이영호는 군부의 외화벌이 사업 등 이권을 회수하려던 노동당과 충돌했다. 김정은이 군부보다는 당과 내각 쪽으로 돈줄을 내주려하자 여기에 반기를 든 것이다.
 
김정은은 그해 4월 최용해를 총정치국장에 앉혀 군부에대한 노동당의 통제를 강화한 뒤 석 달 만에 이영호를 거세하는 데 성공했다. 포병전문가인 야전 출신 이영호는 김정일이 후계자인 아들을 위해 낙점한 군부 과외교사였다. 김정은과 나란히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을 맡았고, 정치국 상무위원까지 거머쥔 이영호는 승승장구했다. 김정일 장례식 때상주인 김정은과 함께 운구차 행렬을 맨 앞에서 이끌면서 세를 과시했다. 하지만 김정은의 집권 초 구상 중 하나이던 군부 돈줄 죄기에 맞섰다가 봉변을 당했다. 이영호의 전격 해임을 놓고 신군부 세력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담은 조치라는 해석도 나왔다.
 
노동당과 군부 파워엘리트 간의 알력은 김정은 체제 들어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으로 번졌다. 수시로 해임과 강등을 거듭하는 건 물론이고 본보기식 숙청과 처형을 통해 공포정치를 펼쳐온 김정은의 통치 스타일 때문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사생결단식 파벌투쟁은 물론 경제적 이권을 둘러싼크고 작은 충돌이 그치질 않고 있다는 게 대북정보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2015년 4월 벌어진 인민무력부장 현영철 처형 사건은 대표적이다. 당시 그의 급작스러운 몰락을 둘러싸고 김정은이 주재한 회의에서 졸았기 때문이란 첩보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더 깊은 내막이 있었다는 게 대북 소식통들의전언이다.
 
노동당 핵심 최용해의 군부 사냥
김정은은 집권 5년 차에 접어든 지난 2016년 5월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당대회를 열었다. 김정일 집권 시기를 포함해 23년여 만에 열린 당대회였다. [사진 중앙포토]

김정은은 집권 5년 차에 접어든 지난 2016년 5월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당대회를 열었다. 김정일 집권 시기를 포함해 23년여 만에 열린 당대회였다. [사진 중앙포토]

소식통은 “특히 노동당에서 잔뼈가 굵은 정치 군부 세력과야전군인들 간의 갈등이 상당한 작용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야전군 출신인 현영철이 당 총정치국을 기반으로 한 정치군인 세력의 전횡에 불만을 품어왔다는 것이다.2014년 11월과 4월 잇따라 모스크바를 다녀온 뒤 현영철은핵심 측근들에게 “원수님(김정은을 지칭)이 정치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야전의 군사가들을 홀대한다”며 불만을 토로한 게 보안기관에 포착됐다고 한다. 현영철이 거론한 ‘정치군인’은 당시 황병서가 수장을 맡고 있던 노동당 총정치국을 지칭한다.
 
노동당 우위 체제라는 특성 때문에 ‘당 국가’로 간주되는북한에서 총정치국은 군부에 대한 노동당의 통제권을 행사하는 막강한 기관이다. 김정일 위원장 집권 시기 ‘군부를 모든 것에 우선시한다’는 선군정치를 펼쳤지만 ‘군에 대한 당적 통제’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극한 2010년 9월 당 대표자회 때 개정된 노동당 규약 49조는“총정치국은 당 중앙위 부서와 같은권능을 가지고 사업한다”고 밝히고 있다. 김정은 후계체제를 염두에 두고 수정된 규약이 총정치국의 권한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대목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현영철의 불만 표출은이런 총정치국에 반기를 드는 꼴이 됐고, 결국 김정은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양새로 비쳐졌다.
 
당과 군부 사이의 불협화음은 현재 진행형이다. 국가정보원은 지난해 말 국회 정보위에서 “군 총정치국장이었던 황병서는 노동당의 검열을 받고 해임된 후 사상교육을 받고있다”고 보고했다. 최용해가 주도한 검열 과정에서 비리가드러나 처벌받았고, 총정치국 제1부국장이던 김원홍 전 국가안전보위상도 함께 숙청됐다는 것이다. 고급 당 학교에서사상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황병서는 지난 2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김정일 생일 관련 행사에서 단상 아래 객석에당 부부장급들과 나란히 양복 차림으로 자리한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조직지도부로 추정되는 노동당 핵심 요직을 거머쥔 최용해가 군부의 핵심인 총정치국을 겨냥해 칼을 겨눴다는 얘기다.
 
김정일의 선군정치는 소련과 동구권 붕괴에 이은 김일성사망, 그리고 대규모 식량난 등 체제 위기 속에서 내놓은 생존전략 노선이다. 군사를 앞세운다는 지침 속에는 군사력 증강과 국방공업 중심의 경제운용이 뼈대로 자리 잡고 있다.북한은 당초 김일성 사망 이듬해 1월 1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 포병 중대의 다박솔 초소를 방문한 것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선군정치의 기원으로 삼았다. 수령을 잃은 슬픔을 딛고 새해 첫 현지지도의 발길을 옮긴 곳이 군부대 초소였다는 취지에서다.
 
하지만 흡족하지 않았는지 선군정치의 기원을 더 거슬러올라가는 선전·선동에 나섰다. 김정일이 18세 때인 1960년8월 25일 북한군 탱크 부대인 제105탱크사단을 방문했다고주장하며 이날을 선군혁명 영도 시작일로 내세웠다. 105탱크사단은 북한의 6·25 남침 당시 서울을 가장 먼저 점령한부대로, 당시 사단장의 이름을 따 ‘유경수 근위 105땅크사단’으로 북한에서 불린다. 또 매년 8월 25일을 선군절로 기념하고 있다.
 
선군정치 장성 수만 1400명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북한 군부는 장전항을 남한 관광객에게 개방했다. [사진 중앙포토]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북한 군부는 장전항을 남한 관광객에게 개방했다. [사진 중앙포토]

김정일의 선군정치는 군부대나 훈련 현장 등을 빈번하게 찾는 것으로 표현됐다. 군부의 영향력은 사회·경제 전반으로파급되기도 했다. 1997년 4월께부터는 협동농장과 철도는물론 각 공장·기업소가 군부대에 의해 위탁 경영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생산시설 인근의 중대급 이상 부대가공장·기업소를 하나씩 맡아 운영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중좌나 상좌급 군관들은 협동농장관리위원회에 상주하면서 수확이나 분배 등에 관여했다. 또 각 작업반에는 대위급군관이 배치돼 출퇴근 확인과 영농작업을 점검했다.
 
김정일이 군부를 각별하게 챙겼다는 점은 2000년 10월 대미특사 파견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시 북·미 관계 개선이란 중대한 정세 변화를 맞아 김정일은워싱턴에 자신의 특사를 보내기로 하고공군사령관 출신인 조명록 총정치국장을 낙점했다. 그런데 빌 클린턴 대통령을만날 때 조명록은 ‘왕별’이 새겨진 북한군 차수(次帥: 대장보다 한 단계 높은 계급)의 예복 차림이었다. 조명록은 백악관으로 가기 직전 국무부에서 북한 군복으로 갈아입었고, 백악관을 나와 미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살았던 마운트 버논 관광에 나설 때는 다시 양복 차림을 했다. 이를 두고 평양 최상층부의 중요한 메시지가 담긴 군복 패션이었을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북·미 관계에서평화체제 보장과 핵·미사일 등 군사 문제가 최우선이라는점을 강조하는 것과 함께 김정일의 통치 노선이 선군정치임을 드러내려는 의도란 얘기다.
 
김정일은 군 핵심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환심정책으로군부의 지지 확보에도 나섰다. 고급주택과 특각(별장), 벤츠승용차, 롤렉스 시계 등을 선물로 제공하면서 환심을 사려했다. 극심한 식량난으로 대량 아사자가 발생한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인 1997년에는 신형 벤츠 200대를 포함해400대의 외제 승용차를 무더기로 수입했다. 이듬해에도 신형 벤츠 S500 모델 200대의 구입을 추진하는 동향이 포착되기도 했다. 김정일은 과오를 범하거나 위기에 몰린 군 측근인사들을 포용하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더욱 충성을 유도하는 통치술도 썼다. 1996년 조카(현성일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 연구위원)의 남한 귀순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실세인 현철해를 신임한 건 대표적인 사례다.
 
선군정치의 최대 수혜 세력인 군부의 장성급 인사는 모두1400여 명인 것으로 관계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우리 군의현역 장성이 이의 3분의 1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인 400여 명이란 점을 감안할 때 상당히 많은 수임을 알 수 있다. 김정일은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에 임명된 이후 김일성 생일 등주요 계기에 군 장성에 대한 무더기 승진 인사를 수시로 단행해오고 있다.
 
남북 화해로 된서리 맞은 북한 군부
1998년 6월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함께 북한으로 가는 500마리의 소를 실은 트럭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지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1998년 6월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함께 북한으로 가는 500마리의 소를 실은 트럭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지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이런 관행은 김정은도 이어받았다. 지난 2월 김정일 생일에맞춰 모두 22명에게 새로 별을 다는 명령을 내렸다.
 
대남·대미 사안에 있어 강경파로 분류되는 북한 군부는남북 관계의 기상도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대결 국면에서는 군사도발과 비정규전·테러 등으로 한반도를 위기로 몰고 갔다. 반면에 교류·협력과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는 몸을움츠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하는 분위기 때문에 우리당국자들은 당혹감을 느낄 때도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북한 군부의 충격은 아무래도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을앞두고 전개된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서 클 수밖에 없었다.그 시작은 1998년 6월 정주영 당시 현대 명예회장의 판문점을 통한 소떼 방북이다. 북한에 제공한 황소 500마리를 실은트럭이 판문점을 넘어가는 정 회장의 구상을 전해 들은 북한군부 핵심층은 “판문점이 어디라고 감히 그곳을 열라는 말이냐. 우리가 피 흘려 가며 지킨 전선이다. 남조선의 재벌 늙은이가 소떼나 몰고 넘어오는 것이나 지켜보려고 우리가 반세기 동안 그곳을 지켜온 줄 아느냐”는 반감을 표출했다고한다.
 
당시 현대의 북측 파트너는 당 통전부 산하 아태(亞太)평화위였다. 당시만 해도 ‘모든 길은 아태로 통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힘이 있었다. 하지만 선군정치의 파워 속에 판문점 돌파가 어렵게 되자 김용순(노동당 통일전선담당 비서)아태 위원장이 직접 해법 마련에 나섰다. 김용순은 김정일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정주영의 소떼 방북은 단순한소몰이 행차가 아니다. 금강산 관광 등 현대의 돈줄을 끌어들이는 대형 사업을 위한 길을 닦는 것이다. 판문점 통과를막는 군부의 입장도 이해하지만 명분보다 실리가 중요한 시기”라는 논리로 김정일을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판문점 통과가 성사됐다.
 
북한 군부는 같은 해 11월 현대의 금강산 관광 첫 출항 때또 한 번의 좌절을 맛보게 된다. 군사 요새로 여겨온 금강산을 남측 관광객에게 개방하는 것은 물론 천혜의 군사항으로불려온 장전항에는 남측 유람선이 정박하는 것을 허용해야했다. 해군의 훈련 상황이나 선박 운용 실태가 고스란히 관광객들의 시선에 노출된 것이다. 북한 해군은 금강산 관광선의 안전한 호송을 위해 남북한의 해상 군사분계선부터 장전항에 이르는 구간을 호위하는 일까지 맡아야 했다.
 
첫 남북 정상회담은 북한 군부 내부에서 볼멘소리가 더나오게 만들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과그해 8월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 간 교류협력 사업에 이용된서울~평양 직항로 문제에 대해서도 군부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남측 항공기가 주요 군사시설이나 작전지대 상공을 지나간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김정일 위원장은 “어차피 미국의 위성이 지나가며 휴전선 일대를 다 찍을 텐데 군사적인 문제 때문에 직항기를 돌아다니게 해야 한다니 참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군부의 반발이 있었음을 남측 인사들에게 언급하기도 했다.
 
김정일은 정상회담 합의 이행과 남북 교류·협력을 앞세워 북한 군부를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대북특사를 맞아 남북 철도·도로 연결 공사 상황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김정일은 이명수(현 총참모장) 당시 군 작전국장을 갑자기 불러들여 조속한 공사를 지시했다. 이명수는“군을 동원하면 몇 달 내로 철도·도로 연결 공사를 마칠 수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북한 군부는 실제 공사 착수에는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현재 북한 군부 내에서 김정은 체제에 불만을 표출하거나권력에 항거할 수준의 동향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김정은의 군부에 대한 권력 장악은 확고한 상황이라는 게 우리 정보 당국의 판단이다. 무엇보다 간부들, 특히 군부에 대한 철저한 감시·응징 체제와 사회통제 시스템이 이를 원천적으로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2013년 12월 고모부 장성택을 ‘반국가’ 혐의로 무참하게 처형한 충격파가 당·정·군 간부들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핵과 미사일 도발에 따른대북제재와 군사압박으로 위기감을 느낀 북한 엘리트 세력들이 김정은과 운명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노동당 정상화로 경제난 타개
북한을 방문 중인 정의용 수석 대북특사 등 특사단이 3월 5일 평양 노동당 중앙위 청사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환담하고 있다. [사진제공 청와대]

북한을 방문 중인 정의용 수석 대북특사 등 특사단이 3월 5일 평양 노동당 중앙위 청사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환담하고 있다. [사진제공 청와대]

노동당의 정상화를 통한 통치에 무게중심을 싣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의 실험은 중요한 기로에 섰다. 무엇보다 경제난해결과 민생 챙기기에서 뾰족한 수가 없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2012년 4월 첫 공개연설에서“다시는 우리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6년이 가깝도록 탈출구는 보이지 않고 있다. 야심 차게 준비한 7차 당 대회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은 “휘황찬 설계도를 펼쳐 보였다”며 자화자찬했지만 공허했다.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이란 걸 내놓았지만 알맹이가 없는 데다 개혁·개방 같은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 없는 백화점식 나열이었다는 평가다. 김일성 집권 시기 열린 6차 당 대회 때 석탄 1억2000만t, 곡물 1500만t을 비롯해 경제 10대 부문의 생산 목표치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던 것과는 차이가 난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1월 신년사를 통해 승부수를 던졌다.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선수단과 응원단 파견은 물론 고위대표단을 파견하는 대남 유화공세를 펼쳤다. 지난해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의 수위를극한으로 올리던 것에 비하면 상전벽해다.“남조선의 등뼈를 부러트리라”거나 “서울을 핵 불바다로 만들라”던 격앙된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다. 서울과 워싱턴을 향해동시에 올리브 가지를 던진 김정은의 급변침에 북한 파워엘리트 그룹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 등 관영매체는 대미 비난의 수위를 어느 선에서 정해야 할지 눈치를보고 있는 형국이다. ‘조선인민의 철천지원수 미제를 소멸하자’는 구호를 내세우던 군부도 침묵하고 있다. 핵과 미사일개발에 열을 올리던 국방과학 부문과 전략군 파트도 마찬가지다.
 
올림픽을 발판으로 김정은은 두 개의 체스판을 꺼내 놓고게임을 준비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남북 정상회담과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북·미 정상회담이다. 서로 다른 판이아니라 동전의 앞뒤 면 같다는 걸 김정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체제의 명운을 건 도박일 수도 있다. 이런 절체절명의순간에 그는 노동당 간판을 전면에 내걸었다. 여동생 김여정을 노동당 제1부부장에 임명해 대남 특사로 파견하고, 올림픽 폐막식에 고위 대표단장으로 김영철 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을 보냈다. 군부의 대남총책 격인 정찰총국장을 지낸 김영철 대장을 노동당 모자를 씌워 파견했다. 더 이상 ‘군복 입은 특사’ 조명록은 없다는 시그널이다. 노동당에 무게를 싣는 실험을 통해 선대 수령인 김정일의 선군정치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김정은. 그의 선당(先黨) 노선이 올봄 한반도와 주변 정세를 출렁이게 할 격랑 속에서 어떤 파노라마를만들어낼지 주목된다.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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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