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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등산사]한 명은 2000m 추락했고, 한 명은 살아남았다

'10월 23일~24일 하산→26일 카트만두로 카라반→11월3일 카트만두 도착→11월20일 이탈리아에서 만남→12월2일 카토비치의 집으로'
예지 쿠쿠츠카는 이 계획을 일기장에 꾹꾹 눌러 적었다. 1989년 10월, 로체(8516m) 남벽을 오르기 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줄의 계획도 지킬 수 없었다.  
예지 쿠쿠츠카. 라인홀트 매스너에 이어 두 번째로 8000m 14개 오른 그는 괴력의 사나이였다. 중앙포토

예지 쿠쿠츠카. 라인홀트 매스너에 이어 두 번째로 8000m 14개 오른 그는 괴력의 사나이였다. 중앙포토

보이텍 쿠르티카. 그는 정상 등반 대신 까다로운 등반을 추구했다. 중앙포토

보이텍 쿠르티카. 그는 정상 등반 대신 까다로운 등반을 추구했다. 중앙포토

예지 쿠쿠츠카(1948~1989)와 보이텍 쿠르티카(1947~)는 폴란드 등반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쿠쿠츠카는 이탈리아 티롤 출신의 라인홀트 매스너(1944~)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8000m급 봉우리 14개에 올랐다. 보이텍은 알파인스타일을 통한 거벽 등반에 방점을 찍었다. 알파인스타일은 최소한의 인원과 장비로 짧은 시간에 등반하는 방법을 말한다. 두 사람은 달랐다.    

 
유렉과 보이텍의 다른 스타일, 다른 관점
“가능성이 안 보인다. 포기하자.”  
보이텍의 의견에 쿠쿠츠카는 반대했다.  
“루트를 바꿔서라도 정상에 가자”  
마칼루 서벽에 새로운 루트를 내려던 둘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결국 유렉(Jurek·쿠쿠츠카의 예명)는 단독 등반을 감행했다. 북서능선을 통해 단독 등반에 나섰다. 그리고 마칼루(8463m)는 유렉의 세 번째 8000m 봉우리가 됐다. 1981년 10월 15일이었다. 보이텍은 캠프에서 기다렸다.  
“그래 어땠어?”  
“정상에 올라갔지.”  
 
폴란드에서는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과해야 암벽등반을 할 수 있었다. 얼치기 등반가는 아예 차단한다는 취지였다. 역도로 다져진 유렉은 엄격하기로 소문난 이 과정을 뚫었다. 보이텍은 의외였다. 이미 알프스와 타트라산맥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는데, 정규 등산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산악회에 가입돼 있지도 않았다. 폴란드 산악계는 서둘러 산악회에 가입시켰다.  
 
보이텍은 정상보다 특정 목표에 집중했다. 유렉은 위험을 감수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보이텍이 세심하고 정갈하고 치밀했다면, 유렉은 직감적이고 공격적이었다. 보이텍이 기술적이었다면 유렉은 불굴의 도전정신을 지녔다. 보이텍은 원정 캠프에서 책을 읽었고, 유렉은 캠프에서 족발(골롱카)을 즐겼다.  
1986년 11월 마나슬루. 따뜻하고 습한 날씨에 눈사태 가능성이 높았다. 보이텍은 등반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마침 유렉은 매스너가 마칼루에 올라 13번째 8000m 등반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8000m급 경쟁에서 11-13,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유렉은 등반을 강행하자고 했다. 6000m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보이텍은 단호했다.  
“여기서 관두자. 너무 위험하다.”  
유렉은 맞받아쳤다.  
“위험은 감수해야지. 이미 예견된 상황이잖아.”  
결국 보이텍은 빠졌다. 이 와중에 매스너는 로체에서 14좌 완등을 이뤘다. 유렉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얼음의 전사들…폴란드는 왜 산으로 갔나  
폴란드는 암울했다. 1939년 9월1일, 독일 170만 병력이 국경을 넘었다. 폴란드는 무너졌다. 독일과 불가침협정을 맺은 소련은 이면 합의에 따라 폴란드로 진군했다. 폴란드 국민 1350만 명 중 600만 명이 2차 대전 와중에 사라졌다. 전쟁 이후 들어선 정부는 소련의 꼭두각시였다. 경제는 곤두박질했고 정치는 국민을 옭아맸다.  
 
산악인들도 억눌렸다. 분출구가 필요했다. 훗날 ‘얼음의 전사(Ice Warriors)’로 불리게 되는 이들은 타트라 산맥의 암벽에 매달렸다. 알프스·피레네·돌로미테(이탈리아 북부)… 그리고 히말라야로 진출했다. 그들의 탈출구였다.    
폴란드 산악인들은 공장 굴뚝 페인트칠을 하며 번 돈으로 해외 원정에 나섰다. 중앙포토

폴란드 산악인들은 공장 굴뚝 페인트칠을 하며 번 돈으로 해외 원정에 나섰다. 중앙포토

폴란드 산악인들은 1920년대부터 히말라야 고봉을 노렸다. 전쟁의 혼란기를 벗어나자 이들은 도약했다. 폴란드 독립 투쟁을 통해 얻은 용기와 힘이 이들의 밑천이었다. 매스너는 “그들은 굶주렸고 매우 강했다”고 표현했다. 열등감의 발산이었다는 관점도 있다. 쉽게 허락되지 않은 원정인 만큼 그들은 집중했다. 그리고 집착했다. 종종 등반의 대가는 남겨지는 가족들이었다.    
 
폴란드 산악인들의 모습은 기괴했다. 광산 안전모를 썼고 철공소 용접용 안경을 고글로 착용했다. 어디서 주운 듯, 등산화는 자신의 발보다 커보였다. 돈이 없었다. 원정 등반을 앞두고 직접 오리털을 뽑아 침낭과 방한복을 만들었다.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하며 장비를 제작했다. 등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제철공장 굴뚝에 올라 때를 벗기고 페인트칠을 했다.  
 
고소에 약했던 유렉, 생각이 많았던 보이텍
유렉은 1979년부터 1987년까지, 7년 11개월 14일 만에 8000m급 14개 봉우리를 모두 올랐다. 매스너에 이은 2위였지만 뜯어보면 질적으로 다르다. 에베레스트를 제외하곤 모두 무산소 등정이었다. 그는 겨울 한 시즌에 두 개의 8000m 봉우리를 오른 유일한 사람이었다. 8000m급 14개 중 4개를 겨울에 올랐다. 11개 봉우리에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K2에는 아무도 재등하지 못한 ‘폴란드루트’를 만들어냈다. 유렉은 매스너와의 차별화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유렉도 고소에 약했다.  
예지 쿠쿠츠카가 1980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설 때의 모습. 중앙포토

예지 쿠쿠츠카가 1980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설 때의 모습. 중앙포토

1974년의 보이텍 쿠르티카. 당시 27살이었다. 중앙포토.

1974년의 보이텍 쿠르티카. 당시 27살이었다. 중앙포토.

유렉은 1974년 사실상의 첫 원정인 알래스카 데날리(6190m·북미최고봉) 4500미터에서 고소로 나뒹굴었다. 자신에게 실망했다. 그는 밀어붙였다. 정상에 올랐다. 1976년 힌두쿠시(중앙아시아·최고봉 7700m)에서도 고소로 고생하면서 정상에 올랐다. 유렉은 1979년의 로체((8516m) 등반에서 거듭났다. 그는 계속 움직이고 일하면서 고소에 적응해 나갔다. 쓰지도 않은 10㎏짜리 산소통을 메고 올라가다 무겁다며 버렸다. 그리고 정상을 찍었다, 그리고 달라진 자신을 발견했다. 편했다. 몸이 고소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유렉은 로체 밑에서 800m급 등정 경쟁자인 매스너와 첫 대면을 했다. 이미 8000급 경쟁에서 1-5로 뒤지고 있을 때였다.  

 
보이텍은 유렉과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이때 처음으로 암벽등반을 접했다. “손과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고 말했다. 보이텍은 철학적이었다. 등반의 만족감은 천천히 찾아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이텍은 영리했다. 무역에 손을 댔다. 당시 유행하던  양가죽 재킷을 아프가니스탄에서 들여와 다시 외국에 내다 팔았다. 현금이 들어왔다. 탄탄한 밑천이 마련됐다. 보이텍은 직관이 있었다. 1990년의 초오유(82101m) 등반 중 위험을 감지했다. 두 말 없이 도중에 하산했다. 등반을 이어가던 동료들은 눈사태에 휩쓸려 죽을 뻔했다.  
 
짧은 만남, 그리고 이별  
보이텍은 알렉스 매킨타이어(영국)라는 등반 파트너를 잃었다. 알렉스는 안나푸르나의 낙석에 맞아 죽었다. 실의에 빠진 보이텍은 유렉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셔브룸 1·2봉(8080m·8035m) 횡단등반이라는, 기상천외한 계획을 제안했다. 유렉은 마다하지 않았다. 원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역' 작업에 들어갔다. 값싼 소련·폴란드 물건을 사들인 뒤 외국에 나가 비싸게 팔았다. 외국에서 산 물건을 폴란드로 들어와 웃돈을 받고 팔았다. 말이 좋아 무역이지, 밀수였다.  
1981년 마칼루에서 보이텍 쿠르티카, 예지 쿠쿠츠카, 알렉스 매킨타이어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중앙포토

1981년 마칼루에서 보이텍 쿠르티카, 예지 쿠쿠츠카, 알렉스 매킨타이어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중앙포토

1974년 알래스카 메킨리 등정을 마치고 동상 치료를 받고 있는 예지 쿠쿠츠카. 펼쳐 든 성인잡지가 눈에 띈다. 중앙포토

1974년 알래스카 메킨리 등정을 마치고 동상 치료를 받고 있는 예지 쿠쿠츠카. 펼쳐 든 성인잡지가 눈에 띈다. 중앙포토

1974년 로체에서의 보이텍 쿠르티카. 중앙포토

1974년 로체에서의 보이텍 쿠르티카. 중앙포토

1983년 7월 가셔브롬 1·2봉 횡단에 성공한 뒤 이들은 이듬해 브로드피크(8051m)로 향했다. 이 산의 3개 봉우리를 연달아 오르기로 했다. 보이텍은 6400m 지점에서 추락했다. 로프가 끊어지며 하염없이 떨어졌다. 천신만고 끝에 추락을 멈춘 보이텍은 덤덤했다. 닷새 동안 10km의 능선을 돌파한 뒤 그들은 베이스캠프로 내려갔다. 유렉은 곧바로 대원들의 카드게임에 합류했다. 보이텍은 그런 유렉의 체력에 혀를 내둘렀다. 
 
이들은 같은 해 가셔브룸4봉(7925m) 서벽을 노렸다. 하지만 이 커플은 여기서 헤어지고 말았다. 작은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등반 관점이 달랐다. 유렉은 보이텍에게 매스너와의 8000m 고봉 경쟁을 분명히 선언했다. 유렉은 평소 “전부를 걸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상을 추구했다. 보이텍은 정상보다 산 그 자체의 까다로움을 선택했다. 평소 8000m급 경쟁에 대해 ‘정상 주워 담기’라며 경멸한 보이텍은 유렉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누가 옳고 그른 문제는 아니었다. 
 
더 큰 이별  
유렉은 1987년 9월 18일에 8000m 14번째 봉우리에 올랐다. 매스너보다 2년 뒤졌다. 1989년 그는 로체로 향했다. 1979년에 오른 로체는 이미 개척된 노멀(normal) 루트를 이용했다. 이번엔 표고 3000m의 남벽에 새 길을 내면서 가기로 했다.  
1986년 칸첸중가 동계등반 성공 뒤 카라반 중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크지슈토프 비엘리츠키(왼쪽)와 예지 쿠쿠츠카.비엘리츠키도 후일 14좌에 모두 올랐다. 중앙포토

1986년 칸첸중가 동계등반 성공 뒤 카라반 중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크지슈토프 비엘리츠키(왼쪽)와 예지 쿠쿠츠카.비엘리츠키도 후일 14좌에 모두 올랐다. 중앙포토

가셔브룸4봉에서 볼더링(작은 바위를 등반하는 행위) 중인 보이텍 쿠르티카. 중앙포토

가셔브룸4봉에서 볼더링(작은 바위를 등반하는 행위) 중인 보이텍 쿠르티카. 중앙포토

항상 많은 식량과 장비를 꾸려가는 유렉은 단출했다. 달랑 배낭 하나였다. 아내 셀리나는 유렉을 전송하는 인파에 파묻혔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직격 7mm의 80미터 로프 한 동만 가져갔다. 네팔 카트만두 현지에서 급조했다. 한국 등반대에게서 구입했다는 설이 있다.  

 
8300m 지점을 넘어섰다. 정상 밑이었다. 눈이 붙은 바위 경사면을 돌파하면 정상이었다. 좋은 홀드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좋은 손잡이는 항상 발의 무방비를 부른다. 그의 발이 갑자기 다급해졌다. 미끄러졌다. 중심을 잡기 위해 미친 듯이 발을 놀렸다. 유렉의 장갑이 손에서 빠져 나와 하늘로 솟구쳤다. 확보지점에 걸어놓은 로프에 압력이 가해져야 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었다. 로프는 끊어져 버렸다. 그는 그렇게 멀어져 갔다. 2000m를 떨어졌다. 10월 24일이었다. 이날 하산하기로 한 유렉의 계획은 헝클어졌다.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동료들이 그의 시신을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미망인이 된 셀리나에게 보험금을 주기 위해, 원정대는 유렉의 시신을 찾아 크레바스에 묻은 것으로 했다. 셀리나는 유렉을 따라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히말라야 베이스캠프에 갔다. 남편과 이별한 지 20년 만인 2009년이었다.  
매스너는 이렇게 말했다. “유렉은 2인자가 아니다. 그는 위대하다”  

보이텍 쿠르티카를 다룬 기사. 중앙포토

보이텍 쿠르티카를 다룬 기사. 중앙포토

보이텍 쿠르티카의 최근 모습. 중앙포토

보이텍 쿠르티카의 최근 모습. 중앙포토

보이텍은 K2 서벽에 집중했다. 1985년 가셔브롬 4봉 서벽, 1988년 트랑고 타워(6238m) 동벽 등 까다로운 등반을 이어나갔다. 1990년 초오유(8201m) 남서벽 초등, 시샤팡마(8008m) 남서벽 초등에 성공하지만, 그는 8000m급 고봉과 작별했다. 그는 살아남았다. 그와 등반하면서 목숨을 버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보이텍은 아들에게 "비겁한 겁쟁이"란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산에서 현명하게 돌아섰다. 보이텍은 ‘무역’ 경험을 토대로 수입 전문점을 꾸려 성공했다. 2016년, 그는 산악인 최고 영예인 황금피켈상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우리는 2등을 기억하지 못한다. 위대한 2등이 있음에도. 우리는 죽어서야 그 사람이 빛났음을 안다. 주변이 어두워야 별이 빛난다는 사실도 간혹 잊는다. 우리가 미처 모르는 산악인들은 별이 됐고, 누구는 그 별을 밝혀주는 더 빛나는 배경이 됐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 예지 쿠쿠츠카의 8000m급 등반
1979년 10월 4일  로체-무산소 등정
1980년 5월 19일  에베레스트-남벽에 루트 개척 등정. 유일한 산소 등정.  
1981년 10월 15일 마칼루-단독으로 북서릉 루트 개척 등정
1982년 7월 30일  브로드피크-서릉 루트 개척 등정
1984년 7월 17일  가셔브룸 2봉-북봉과 중앙봉을 횡단하는 루트 개척 등정
1983년 7월 1일   가셔브룸 1봉-동서릉 루트 개척 등정
1983년 7월 23일  가셔브룸 1봉-서남벽 루트 개척 등정
1985년 1월 21일  다울라기리-북동릉으로 동계 초등
1985년 2월 15일  초오유-남동벽에 루트 개척 후 동계 초등
1985년 7월 13일  낭가파르바트-남동벽(루팔벽)에 루트 개척 등정
1986년 1월 11일  칸첸중가-동계 초등
1986년 7월 8일   K2-남벽에 루트 개척 등정
1986년 11월 10일 마나슬루 -북동벽에 루트 개척 등정
1987년 2월 3일   안나푸르나-북벽으로 동계 초등
1987년 9월 18일  시샤팡마-서릉에 루트 개척 등정
1989년 10월 24일 로체-루트 개척 등반 중 추락 사망
 
■ 보이텍 쿠르티카의 8000m급 등반
1980년 다울라기리-동면 새 루트 개척.
1982년 브로드피크-알파인 스타일. 유렉과 등반.
1983년 가셔브룸 1·2봉-횡단등반. 알파인 스타일. 유렉과 등반.
1984년 브로드피크-횡당등반. 알파인 스타일. 유렉과 등반.
1990년 초오유-남서벽 새 루트. 알파인 스타일.
1990년 시샤팡마-남벽 새 루트. 알파인 스타일.
 
■ 보이텍 쿠르티카의 주요 등반
1972년 힌두쿠시 코헤 테즈(7015m) 북릉 새 루트 개척
1972년 힌두쿠시 아커 초흐(7025m) 북서면 새 루트 개척
1973년 패티 드루 서면 폴란드 첫 등반.
1973년 패티 드루 북면 유렉과 등반.
1974년 로체 폴란드 첫 동계등정 대원.
1975년 그랑조라스 북면 새 루트 개척. 유렉과 등반.
1977년 힌두쿠시 코헤 반다카(6868m) 북동면 새 루트 개척
1978년 창가방(6864)m 남면 새 루트 개척
1981년 마칼루 7900m까지만 진출. 유렉이 단독등반 등정.
1982년 초오유 동계 등정. 라인홀트 매스너와 등반.  
1985년 가셔브룸4봉 서벽 초등. 알파인 스타일.
1988년 트랑고타워(6239m) 동면 새 루트 개척.
1987년~2000년 K2 서벽 등반 시도. 1994년 6650m까지 진출.
1993, 1997년 낭가파르바트 마지노 능선 시도
1995년 남체의 700m 빙벽인 로사르 재등  
2001년 비아체라히 타워 5700m 남면 새 루트 개척. 
 
일상등산사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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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