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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시 한수] 우리는 무엇을 건너는 중일까

기자
전새벽 사진 전새벽
전새벽의 시집 읽기(4)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미투운동(Me Too)'이 우리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중앙포토]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미투운동(Me Too)'이 우리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중앙포토]

 
‘난리도 아니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다. 진작에 짜내야 했던 고름인데 뒤늦게 짜내려니 너무 아프다. 아프지만 외면하지 않는다. 똑똑히 바라본다. 오늘 이런 기사 헤드라인을 봤다. ‘러브샷 환영회 사라지고 교수는 방문을 열어놨다’
 
변화다. 늦은 변화다. 왜 이렇게 늦었을까. 개탄스럽다. 쯧쯧쯧 정도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강렬하게 개탄스럽다. 나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개인이어서다. 지난 시간 사랑했던 상대들이 괴물에 의해 다칠 때, 나도 계속해서 같이 다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면하지 않는다. 경기를 일으킬 만큼 아픈 고통을 모두가 나누며, 늦었지만 밝은 빛 속으로 조금씩 이동 중이라고 믿는다. 이동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어두웠었나’라고 생각한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지음.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지음.

 
전철 4호선
선바위역과 남태령역 사이에
전력 공급이 끊어지는 구간이 있다.
숫자를 세어 시간을 재보았다.
십이 초나 십삼 초.
그사이 객실 천장의 조명은 꺼지고
낮은 조도의 등들이 드문드문
비상전력으로 밝혀진다.
책을 계속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워
나는 고개를 든다.
맞은편에 웅크려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파리해 보인다.
기대지 말라는 표지가 붙은 문에 기대선 청년은 위태로워 보인다.
어둡다.
우리가 이렇게 어두웠었나.
덜컹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맹렬하던 전철의 속력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가속도만으로 레일 위를 미끄러지고 있다.
확연히 느려졌다고 느낀 순간,
일제히 조명이 들어온다, 다시 맹렬하게 덜컹거린다. 갑자기 누구도 파리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나는 건너온 것일까?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뒤표지에 적힌 산문(제목 없음)
 
암흑 속에서 덜컹거리고 있지만, ‘일제히 조명이 들어오는' 순간이 올 것이다. 누구도 파리해 보이지 않은, 누구도 파리목숨이지 않은 시간이 올 것이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어떤 것을 건너고 있다.
 
 
한강 시인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붉은 닻’으로 등단
-2016년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 수상, 2017년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로 말라파르테 문학상 수상
 
전새벽 회사원·작가 jeonjunhan@naver.com
 
 

비트코인의 탄생과 정체를 파헤치는 세계 최초의 소설. 금~일 주말동안 매일 1회분 중앙일보 더,오래에서 연재합니다. 웹소설 비트코인 사이트 (http://news.joins.com/issueSeries/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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