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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南人流] 을지로에 찾아온 봄

유럽의 구도심은 낡고 허름할수록 사랑받는다. 반면 서울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했다. 재개발이 미뤄진 구도심은 활력을 잃고 버려진 지역이 되기 일쑤다. 제조업의 메카였던 을지로도 그랬다. 조명가게·인쇄소·철물점이 빼곡히 들어선 풍경은 날로 칙칙해져 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칙칙함이 예술가와 창업자들을 매료시켰다. 을지로를 찾은 젊은이들이 그들만의 봄을 만들어내고 있다.
글=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각 업체

오래된 을지로 골목에 젊은이들이 몰려온다
1·2층엔 공장, 3층엔 카페 … 2018 달라진 풍경

 
20년 된 인쇄기를 활용한 인테리어로 입소문을 타고 있는 카페 ‘4F’. 강정현 기자

20년 된 인쇄기를 활용한 인테리어로 입소문을 타고 있는 카페 ‘4F’. 강정현 기자

 
지하철 3호선 을지로3가역 10번 출구가 최근 1~2년 사이 핫한 약속장소로 떠올랐다. 출구를 나와 보이는 건 온통 오래된 간판들이다. 건축·철물·인쇄·도장·열쇠…. 젊은이들이 시간을 보낼 곳은 없어 보인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답은 ‘위’에 있다. 을지로에 들어선 건물마다 1층은 수십 년씩 된 상가들이 차지하고 있지만 3, 4층은 다르다. 비어 있거나 유령 사무실처럼 쓰이던 공간이 하나둘 젊은 감각으로 재탄생했다. 카페 ‘물결’ ‘호텔 수선화’, 바 ‘십분의 일’ ‘미팅룸’, 독립서점 ‘노말에이’, 레코드숍 ‘클리크레코드’ 등 소문난 힙플레이스들은 3층 이상의 높은 곳에 숨어 있다. 인터넷으로 위치를 알아보고 온 젊은이들은 상가 골목을 헤치고 목적지를 찾아 계단을 성큼성큼 오른다. 마치 아는 사람 눈에만 보이는 공중도시 같다.
 
해외 각국의 댄스 음악 LP를 판매하는 ‘클리크레코드’

해외 각국의 댄스 음악 LP를 판매하는 ‘클리크레코드’

을지로에선 간판을 쉽게 찾을 수 없다. 글씨가 작거나 무심하게 붙인 스티커가 간판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을지로에선 간판을 쉽게 찾을 수 없다. 글씨가 작거나 무심하게 붙인 스티커가 간판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익선동 카페 ‘식물’의 루이스 박 대표는 지난해 11월 을지로 골뱅이 골목에 카페 ‘잔’을 열었다. 익선동 신드롬을 일으킨 그가 을지로를 선택한 이유는 ‘빈티지의 가치’였다. 깨끗하고 편리한 신도시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겐 구도심이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낡은 건물, 빛바랜 간판을 보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상상하게 돼요. 오래된 도시는 그 판타지만으로도 값어치가 있죠.”
실용적인 이유도 크다. 을지로는 서울 중심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방산시장, 세운·청계·대림상가가 있고 동대문도 가까워 사방이 재료상이다. 2015년 카페 겸 바 ‘호텔 수선화’가 을지로3가에 자리 잡은 것도 이 때문이다. 주얼리 디자이너 원혜림(33)씨는 “옷·가방을 만드는 친구들과 공동 작업실 형태로 시작했는데, 각종 재료를 구할 수 있는 종로·동대문·신설동의 중간지점이 을지로였다”고 말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저렴한 임대료다. 중구청 이하숙 주무관은 “재개발이 지연돼 건물주가 건물에 투자를 안 하다 보니 임대료가 낮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2016년 오픈한 와인 바 ‘십분의 일’은 10명이 공동 운영한다. 모두 30대 초반의 사회 초년생이다. 이현우(31) 대표는 “을지로를 선택한 궁극적인 이유는 목돈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울 곳곳에서 푸드트럭을 하다 지난해 첫 가게를 차린 ‘미팅룸’의 박찬희(27) 대표도 “권리금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을지로뿐이었다”고 말했다.
 
 
카페 ‘물결’의 계약을 맡았던 한 부동산 대표는 “처음엔 오래된 건물 4층에 가게를 차린다기에 미쳤다고 했다”며 웃었다. 물결은 줄서서 들어가는 을지로 명소가 된 지 오래다. 부동산 대표는 “요즘엔 일주일에 4~5명씩 자리를 보러 온다”고 말했다.
을지로 ‘공중도시’에 정착한 젊은 사장님들은 공통적으로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다”고 말한다. 나 혼자만 사용하는 독립된 공간이 아니다. ‘나의 감각을 소개하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지난해 12월 문을 연 ‘감각의 제국’에는 광고회사 출신 두 대표의 독특한 감각이 집결돼 있다. 메기매운탕집 건물 4층으로 가는 계단에 놓인 사이버 가수 ‘아담’의 사진부터 범상치 않다. 가게 내부 분위기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파라솔, 독서실 책상, 유리로 덮인 세면대 등 뜬금없는 물건들을 색색의 조명이 요란하게 비춘다. 한쪽 벽엔 두 눈에 엑스(X)가 그려진 만화 캐릭터 둘리의 머리가 걸려 있다.
철순(30) 대표는 “모두 우리에게 신선한 바이브(느낌)를 주는 물건들”이라며 “헌팅 트로피처럼 걸어둔 둘리 머리는 ‘동심이 죽은 성인들의 공간’이라는 의미고, 아담은 우리가 DJ로 고용한 친구”라고 설명했다. 아담의 월급은 암호화폐로 주고 있단다. 감각의 제국은 ‘성인들의 문화회관’을 표방한다. “금·토요일엔 DJ를 불러 클럽처럼 운영하지만, 그 외엔 요가·줌바댄스 수업을 하거나 독립영화를 상영하고 전시도 열어요. 술은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판매할 뿐이죠.”
‘호텔 수선화’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디자이너 3명의 취향을 담은 작업실로 출발했다. 오래된 호텔의 리셉션을 연상시키는 카운터와 꽃무늬 천을 씌운 조명 등이 포인트다. 원 대표는 “월세 정도 벌어보자는 생각으로 카페를 시작했는데 지금은 영화 상영, 콘서트, 플리마켓 등 다양한 이벤트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잔’의 루이스 박 대표는 “도심재생이 장기적으로 성공하려면 ‘소비’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나름의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 을지로의 강점이다.
 
 
“임대료 상승? 연남·익선동과 다를 거예요”
이곳에도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우려는 존재한다. ‘을지로가 주목받기를 원치 않는다’며 인터뷰를 거절한 가게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젊은 대표들은 “연남동이나 익선동에 비해 롱런할 것”이라고 긍정적인 전망을 내놨다. 가게들이 상권으로 묶일 만큼 한 거리에 밀집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20년 된 인쇄기를 활용한 인테리어로 입소문을 타고 있는 ‘4F’는 동대문에 더 가까깝지만 ‘을지로 카페’로 불린다. ‘커피한약방’과 ‘신도시’가 있는 을지로2가에서 ‘잔’ ‘호텔 수선화’ ‘십분의 일’ 등이 몰린 을지로3가를 지나 ‘4F’가 있는 을지로4가, 충무로까지. 젊은이들의 발길이 닿는 구역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을지로를 선택한 젊은이들은 ‘신구의 조화’를 원한다는 점도 장점이다. 이들은 1층의 목 좋은 자리를 탐내지 않는다. 눈에 띄는 간판도 없이 건물 3,4층에 조용히 숨어든다. 덕분에 제조업 상권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하숙 주무관은 “현재 조성된 분위기를 흐리지 않고 자연스레 녹아들려는 노력이 보인다”고 말했다. ‘4F’의 유상진 대표는 “그냥 ‘예쁜 카페’가 아니라 인쇄 골목의 아이덴티티를 간직한 카페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감각의 제국’ 철순 대표는 “인쇄소·조명상 등 기존 상인 어르신들이 을지로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하다. 그분들이 나가지 않는 이상 을지로의 색깔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 봤다.
 
 
토박이 상인들도 마음을 열고 있다. 지난해에는 세운상가 조명상과 중구청 지원을 받는 예술가 팀이 협업해 LED 무드등을 제작한 사례도 있다. ‘을지로 라이트웨이’ 등 행사에 출품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예술팀 ‘R3028’에 이 프로젝트를 먼저 제안한 삼정 LED 이상수(48) 대표는 “우리도 소기업이다 보니 젊은이들과 협업을 통해 경쟁력을 키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청년 예술가들과 이익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세운상가 3층에 위치한 카페 ‘호랑이’ 이세준 대표는 “가게를 차린 후 상가 어르신들과 소통하면서 치유받고 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낡음’의 가치를 끌어안은 젊은이들이 봄바람처럼 조용히 을지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화려한 변화가 아닌 조용한 공존’이 을지로에선 불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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