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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남북 정상회담과 거짓말 … 후유증은 국민 부담으로 남는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상회담 열풍이 거세다. 내달 말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일정이 잡혀있고, 5월 중·하순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만남이 예정돼 있다. 일본과 중국·러시아 등 주변국도 북한 문제를 둘러싼 양자 또는 다자간 정상회담을 추진하려는 분위기다. 북한과의 당국대화 복원으로 운전대를 거머쥐었다고 판단한 청와대는 쾌도난마식 해법을 의미하는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을 말하고 있다. 한반도 정세 격변의 첫 단추가 될 남북 정상회담에서 꼭 지켜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
 

“김대중(DJ)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께서 따로 떨어져 앉게 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저를 불러 ‘두 분이 이산가족이 됐다’고 조크를 한 겁니다.”
 
첫 남북 정상회담 만찬이 한창이던 2000년 6월14일 평양 목란각. 김정일이 회담 남측 수행원인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에게 귀엣말을 하는 장면이 TV 중계 카메라에 잡히자 우리 언론과 국민 사이엔 궁금증이 일었다. “간첩을 잡아야 할 정보기관장이 북한 수괴와 밀담을 나눴다”는 비난도 쏟아졌다. 서울 귀환 후 임 원장은 김정일이 농담을 던진 것에 불과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내막은 달랐다. 북한은 DJ 방북 준비 때부터 김일성 국가주석(1994년 7월 사망) 시신이 보관된 금수산기념궁전(현재는 금수산태양궁전으로 개칭)을 참배할 것을 요구했다. 청와대와 정부는 난감해했지만 북한 입장은 완강했다. 서로 말끔히 매듭짓지 못한 채 DJ 일행을 태운 비행기는 평양 순안비행장에 내렸다. 결국 김정일이 자신의 차량에 함께 탄 DJ에게 ‘금수산에 안 가셔도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해결됐다. 만찬장에서 김정일은 이런 소식을 임 원장에게 귀엣말로 알린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와 임 원장 측은 이런 사실을 감춘 채 국민에게 거짓 해명을 했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당시 김정일은 DJ에게 “통일이 된 이후에도 주한미군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고 밝힌 것으로 청와대는 설명했다. DJ가 주한미군 주둔 용인 언급을 듣고 김정일을 항해 “정말 깜짝 놀랐다. 민족문제에 그처럼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계신 줄 몰랐다”고 했다는 게 임동원 원장의 설명(회고록 『피스 메이커』93쪽)이다. 하지만 북한은 회담 직후 주춤하던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아직까지도 계속 펼치고 있다. 김정일의 “철수 주장은 우리 인민 감정을 달래려는 것”이란 말과 달리 북한 관영매체의 주한미군 관련 선전·선동은 갈수록 과격한 양상을 보여 왔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정상회담은 메가톤급 파괴력이 있다. 분단 70년 동안의 긴장과 대결을 종식하고, 화해와 협력으로 나가려는 국민 갈망이 엄청난 에너지로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절차적 정당성이 다소 무시되거나 찜찜한 대목이 있어도 의미있는 결과만 도출되기를 응원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어떤 정권이든 북한과의 정상회담 추진에 골몰한다. 하지만 그 매혹에 지나치게 빠져들다간 순리를 이탈하게 되고 결국 국민을 속이고 싶은 유혹에 함몰된다.
 
첫 남북 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적잖이 퇴색시킨 대북 비밀송금은 대표적 사례다. 북한 최고지도자를 회담 테이블에 앉게 하려고 김대중 정부는 천문학적인 돈을 건넸다. 미 의회와 우리 언론의 의혹제기가 잇따랐지만 “한·미 보수세력과 언론의 정상회담 재 뿌리기”라고 반박했다. 환전과 송금에 관여한 국가정보원은 “전혀 근거 없다. 국정원이 북측에 돈을 전달할 방법이 없다”고 발뺌했다. 북한도 여기에 발을 맞췄다. 하지만 대북송금 특검은 정상회담과의 관련성과 위법성을 규명했고, 관련자들에게 유죄가 확정됐다.
 
대북송금 특검은 큰 후유증을 남겼다. 첫 정상회담에 대가성 자금이 개입되면서 도덕성 논란은 그치지 않았다. 북한과의 교류·협력과 대북지원에 무게를 실어온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전향적 대북노선은 보수세력의 ‘퍼주기’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남남갈등은 증폭됐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 정부의 대북정책이 신뢰를 잃은 것도 큰 손실이다.
 
DJ 정부의 비밀송금에 특검이란 칼날을 들이댄 노무현 정부는 차별화된 대북접근을 염두에 뒀다. 2차 정상회담 개최를 둘러싼 대가 논란에서 비껴가려 했다. 하지만 차기 대선 2개월을 앞둔 시점에 회담을 연 게 화근이 됐다. 2007년 10월 김정일 위원장과의 회담에서 노 대통령은 북한 철도와 고속도로 개보수, 조선복합단지 제공 등을 약속했다. 통일부가 “14조 3000억원의 국민부담이 따른다”고 추산한 매머드급 대북 인프라 제공 프로젝트다. 정권 말 무리하게 사인한 합의서는 차기 정부에서 공수표가 되다시피 했다. 공동어로를 비롯해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수역을 평화협력지대로 만드는 구상은 ‘NLL 포기’ 논란까지 촉발시켰다. 결국 6년이 흐른 뒤 관련 의혹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이 폭발하면서 초유의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파동이 벌어졌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날 3차 정상회담은 앞서 두 번의 회담과는 결이 달라야 한다. 현금이나 대북 인프라 제공을 내건 정상회담을 국민들은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확실한 보장은 성패를 좌우할 의제로 꼽힌다. 섣불리 개성공단 재가동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를 꺼내다가는 거센 역풍을 맞을 공산이 크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을 억제하려는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망도 촘촘하다. 첫 회담은 만남 자체에 의미 부여가 가능했다. 두 번째 정상회담은 ‘과욕은 금물’이란 교훈을 남겼다.
 
이번 정상회담은 취임 1년을 앞둔 초반이라 대북 합의와 그 이행에 힘이 실릴 수 있는 큰 장점을 갖고 있다. 북한의 정상회담 호응이 정부와 유엔 등 국제사회의 압박공세 결과란 점도 협상 운신 폭을 넓혀준다. 단박에 거대담론부터 각론까지 다 해치우고 싶은 의욕이 넘쳐날 수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서울과 워싱턴을 겨냥한 도발공세에서 유화 제스처 쪽으로 급변침한 김정은의 의도 분석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평창 겨울올림픽은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여는 무대가 됐다. 이젠 그런 낭만적 남북관계를 냉철한 북한 다루기로 옮겨갈 전략이 필요해 보인다.
 
이번 정상회담의 첫 단추는 남북 간 특사교환을 통해 꿰어졌다. 앞서 2차례와 달리 언론을 통해 그 장면이 공개됐다. 하지만 구체적 논의 내용이나 물밑 조율작업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있다. 청와대와 정부 당국자들에게는 함구령이 내려진 상태다. 민감한 이슈가 테이블에 오를 예정인데다, 북·미 정상회담까지 어우러진 복합 방정식 양상이라 불가피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럴수록 대북접근에서 원칙을 지키고 투명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긴요하다. ‘최고의 정책은 정직’이란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다. 대북정책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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