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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 관리인에 창고지기 공자를 성인으로 만든 건 이것

기자
김준태 사진 김준태
[더,오래] 김준태의 후반전(3)
고전과 역사에서 길을 찾는 탐험가. 이제껏 배운 교훈 중 하나는 사람마다 꽃 피우는 때가 다르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각기 다른 시간에 찾아온다. 그러니 늦었다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여기, 나이에 지지 않고 큰 꿈을 꾸었으며, 세월에 굽히지 않고 열정을 다한 사람들이 있으니. 인생 후반기에 더욱 빛났고 아름다웠던 역사 속 인물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위대한 성인(聖人) 공자(孔子)의 초상화. [그림 김준태]

위대한 성인(聖人) 공자(孔子)의 초상화. [그림 김준태]

 
“나는 젊었을 때 미천해 보잘것없었다. 그래서 이 일 저 일 익히게 된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형편이 어려우면 자신의 적성이나 업무 여건 같은 것은 따지지 않는 법이다.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게 된다. 영원한 스승, 위대한 성인(聖人)이라 추앙받는 공자(孔子)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공자는 요즘 말로 흙수저 출신이다. 매우 가난했고, 어릴 적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여의었다. 이끌어주는 스승이나 도와주는 후원자도 없었다. 오로지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했으며,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다.
 
 
흙수저 출신으로 목장 관리자도 지내
이 시기에 공자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외할아버지로부터 배운 예법(禮法)으로 상갓집이나 제사(祭祀) 일을 거들며 생계를 꾸렸다는 주장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만 서두에 소개한 공자의 회고로 볼 때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후의 말단 관리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자는 작은 고을의 목장 관리자, 창고의 경리 담당 등 잡다한 업무를 맡아 보았다.
 
이처럼 고단한 환경이었지만 공자는 항상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목장에 있을 때는 누구보다도 소와 양을 잘 길러냈고, 경리를 맡았을 때는 작은 빈틈 하나 놓치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정성을 쏟으면, 그것이 감응해 자신을 성장시키고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세는 학문으로도 이어졌다. 공자는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거리가 멀다 하지 않고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궁금한 점을 묻고 또 물었다. “남들이 한 번으로 가능할 때 나는 백 번을 하고, 남들이 열 번으로 가능할 때 나는 천 번을 하는” 성실함으로 자신을 단련시켰다. 설령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그 길 위를 걷다 힘이 부족해 쓰러질지언정 못하겠다고 한계를 긋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중국의 공자(孔子) 기념우표. [사진 중국포털(www.baidu.com)]

중국의 공자(孔子) 기념우표. [사진 중국포털(www.baidu.com)]

 
이러한 노력 속에 공자의 평판은 점점 높아진다. 그의 밑에서 배우고 싶다며 찾아오는 제자가 갈수록 늘어갔다. 뜻을 펼칠 기회도 얻는다. 공자를 눈여겨본 노나라의 군주 정공(定公)이 그를 중도라는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한 것이다. 여기서 공자는 부임 1년 만에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사공(司空, 건설·자원개발 책임자), 대사구(大司寇, 법무부 장관)로 연이어 승진했다.
 
하지만 공자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이웃 제나라의 모략으로 노나라의 권력자들이 유흥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자, 실망한 공자는 관직을 사임하고 방랑길에 오른다. 위나라에서 진나라로, 조나라를 거쳐 송나라로, 이 밖에도 정나라, 포나라, 채나라, 초나라 등 수많은 나라를 방문했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줄 군주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공자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각 나라의 군주는 공자를 예우하면서도 그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인의(仁義)와 예(禮)를 강조하는 공자의 정치이념은 패권과 이익,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군주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공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한 권세가들이 그를 제거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68세에 낙향, 저술 매진

<공자성적도孔子聖跡圖> 중 '안영저봉晏嬰沮封' [사진 중국포털(www.sohu.com)]

 
결국 공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55세에서 68세까지 무려 14년에 걸친 방랑이 남긴 것이라고는 지칠 대로 지친 노구뿐이었다. 그사이 죽거나 곁을 떠난 제자도 많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고 공자가 포기했을까?
 
말년의 공자는 제자 교육과 함께 저술에 매진한다. 『서경』과 『시경』을 편집했고, 책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역경』을 탐구했다. 필생의 저작인 『춘추(春秋)』도 저술한다. 대의와 명분을 바로 세워 올바른 정치를 구현해가는 ‘춘추의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은 비록 그것의 실현을 보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그런 세상이 오길 기다리며 길잡이가 될 책을 지은 것이다. 공자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공자의 인생은 노력을 멈추지 않은 삶이었다. 계속되는 시련 속에서도 자신을 단련시켰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 덕분에 살아서는 고단한 듯 보였으나, 역사에 길이길이 전해지는 이름을 남긴 것이다.
 
김준태 동양철학자·역사칼럼니스트 akademie@naver.com
 
 

비트코인의 탄생과 정체를 파헤치는 세계 최초의 소설. 금~일 주말동안 매일 1회분 중앙일보 더,오래에서 연재합니다. 웹소설 비트코인 사이트 (http://news.joins.com/issueSeries/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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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