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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 텀블러, 갓 손가방… 전통의 변신은 무죄

“어릴 적부터 종종 일부러 쓴 걸 먹었어요. 왜 속담에 그런 말 있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고. 그 말처럼 남들하고 똑같은 게 싫어서 연습한 거죠.”  
 
사무용 쟁반(2016), 양모·가죽·은·호두나무

사무용 쟁반(2016), 양모·가죽·은·호두나무

파티션(2017), 한지실크·마·천연염색사

파티션(2017), 한지실크·마·천연염색사

브랜드 디자인 컨설팅 회사 페노메노(Fenomeno)의 조기상(39) 대표가 남다른 건 입맛만은 아니었다. 국내에서 운송기기 디자인을 전공한 그가 유학으로 택한 건 요트 디자인, 그러니까 국내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거의 가지 않는 길이었다.  
 
조기상 대표

조기상 대표

선택은 옳았다. 세계 최고라는 이탈리아 디자인학교 IED를 졸업한 뒤 실전에서 그는 승승장구했다. 세계 요트 디자인 대회인 MYDA(Millennium Yacht Design Award)에서 2008~2010년 내리 상을 탔다. 유럽 부호들이 주문한 1000억짜리 요트를 척척 만들어냈다. 하지만 거기까지. 그는 2011년 요트 대신 한국으로 돌아와 느닷없이 전통 공예를 택했다. 국내 지방 장인·명인들과 협업해 그들의 작업물에 현대적 감성을 입혔다. 디자이너들이 한두 번씩 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아예 ‘아우로이’라는 생활용품 브랜드까지 만들어 본업으로 삼았다. 한지·비단·돌·유기·매듭·가죽 등을 이용해 지금까지 생산한 품목만 600여 개, 손잡은 장인·명인만 60~70명에 달한다. 전통이 우리의 최고 가치라고 믿는 ‘남다름’이 아니었다면 시작하지도 않을 일이었다.  
아우로이의 유기세트(2013)

아우로이의 유기세트(2013)

냅킨 링(2017), 백동· 황동

냅킨 링(2017), 백동· 황동

목단 콘솔(2017), 백동· 탄화목

목단 콘솔(2017), 백동· 탄화목

 
수백억, 수천억 하는 요트 디자이너로 잘 나가던 그가 전통 공예로 선회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세계 경기가 불황이 되면서 요트 산업도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더 결정적 순간이 있었다. 2010년 그의 우상이자 18년간 BMW 수석 디자이너를 지낸 크리스 뱅글의 질문을 받았을 때다. “한국의 디자인 특징은 도대체 뭐지?”  
 
당장 대답할 수 없었던 부끄러움이 오래 남았다.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도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던 터였다. 더 크게는, 과연 한국의 강점이 뭘까 라는 것이었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바로 ‘지역’과 ‘공예’였다.  
 
“유럽 축구를 보다 보면 지역마다 팀이 있고, 각 깃발 속 문장들이 봉건 시대부터 이어져 온 그들만의 이야기를 상징하잖아요. 그 자체가 이방인을 끌어들이는 하나의 관광 자본이 되는 거죠. 물건도 그래요. 유럽 사람들은 집안에 놓은 의자 하나, 찻잔 하나에도 마스터 피스라며 가치를 부여하고 손님들과 대화하는 내내 화제의 중심으로 만들죠.”  
 
그는 우리에게도 이런 자랑거리가 충분히 많을 거라 여겼다. 다만 자랑할 줄도, 내세울 줄도 모르는 게 문제일 뿐.  
 
“이 물건이 어떤 의미로 나온 건지, 얼마나 몸에 좋은 천연 소재인지 알려야 하는데, 만드는 사람이 늘 입을 다물었으니 누가 알아봐 주겠어요. 그걸 제가 바꿔보고 싶었어요.”  
 
사방탁자(2017), 백동· 탄화목

사방탁자(2017), 백동· 탄화목

낙동트레이(2017), 누비· 천연숯염색· 백동· 탄화목

낙동트레이(2017), 누비· 천연숯염색· 백동· 탄화목

느릅반(2015)

느릅반(2015)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다. 귀국 뒤 회사를 차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브랜딩 작업을 하던 중, 경북 봉화의 사과를 맡아달라는 의뢰가 왔다. 디자인을 바꾸고 스토리를 입히니 대중은 남다른 사과를, 농부는 전에 없던 이익을 얻었다는 게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이후 지방자치단체와 국립무형유산원 등에 디자인 자문을 하면서 각 지역의 장인들을 만나게 됐고 ‘이걸 조금만 현대화하면 시장에서도 통하겠구나’라는 감을 잡았다. 국가가 인정하는 장인들(주요 무형문화재인, 지방무형문화재인 등 공인된 장인)을 위주로 협업을 진행했다.  
 
그들과의 작업은 단순히 예쁜 걸 보여주는 과정이 아니었다.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반년이 걸리기도 했다. 낯선 소재를 이해하고, 기원과 역사를 알아가고, 장인들의 작업을 깨치는 과정이 필요했다. ‘안 예쁘다, 비싸다, 선물하기에 크다, 무겁다’ 등등 전통 공예가 시장에 팔리지 않는 이유를 파고들어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유기장 김수영과 협업해서 만든 유기 반상기는 이런 과정을 거쳐 가장 성공한 케이스였다. “지금 우리가 농경시대처럼 밥을 많이 먹지 않잖아요. 캔 음료 절반 정도(190ml)로 부피를 줄였죠. 또 무거워서 못 쓰겠다는 사람들이 많은 점을 고려해 최대한 얇게 깎았고요.”  
 
아우로이 유기

아우로이 유기

조 대표의 손을 거친 유기는 3첩 반상기 세트는 물론 유기의 보온·보냉 효과를 활용한 텀블러, 포크·나이프 등 현대적 식기로 변모했다. 그리고 프랑스 파리 국립장식미술관과 영국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등에 전시됐고, 2015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의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반응이 좋았던 건 유기만이 아니었다. 석장의 파편을 활용해 만든 우편물꽂이, 갓의 모자 부분을 아래로 돌려 만든 손가방, 한쪽 끝에 양반·선비·스님·초랭이의 얼굴을 새긴 하회탈 윷 등은 전통 디자인을 위트있게 바꾼 그의 대표 작업물로 꼽힌다.
 
한때 오직 한 명만을 위해 고가의 요트를 만들었던 그는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쓰기 바라며 공예품에 전력 질주한다. 극과 극을 오간다 할 만한데, 그는 오히려 둘이 닮았다고 말한다. “요트를 하나 만들려면 알아야 할 게 정말 많죠. 구조는 물론이고 요트에 맞는 소재, 공간 설계, 설비기구 등을 꿰고 있어야 하죠. 공예도 마찬가지예요. 그릇만 해도 옹기는 숨을 쉬니까 발효용으로 맞는다던가, 유기는 인체에 유해한 균을 죽이는 효과가 있다던가 하는 건 하나하나 배워야 아는 거니까요. 완성까지 엄청난 노하우 필요한 건 둘 다 말할 것도 없죠. 그런데 정말 똑같은 건 따로 있어요. 요트도 공예도 아주 오래 전 자연을 소재로, 사람 손으로 만들어졌잖아요.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는 얘기죠.”  
사무용품(2017), 돌

사무용품(2017), 돌

지승 화병(2016), 한지· 천연염색

지승 화병(2016), 한지· 천연염색

옻칠접시세트(2017) @Design House

옻칠접시세트(2017) @Design House

 
아우로이 제품들은 지금껏 주로 정부 기관이나 지자체 납품, 또는 전시품으로 이용됐다. 하지만 그는 올해부터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판매를 늘릴 계획이다. 한발 늦었다 싶을만큼 국내 리빙 시장이 성숙했다는 판단에서다. 밥은 안 먹어도 커피는 제대로 골라 마시는 이들이 많아진 것처럼, 한번 가치를 실감하면 퍼지는 건 시간 문제라는 이야기다. “요즘 200원짜리 중국산 나무컵을 사은품으로 준다고 하면 몇 명이나 가져갈까요. 내가 사는 공간에 하나를 두더라도 무엇을 둬야 할지 안목이 생긴 거죠.”  
 
하지만 집에 대한 관심이 더 늘어난다고 장인들의 공예품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우리 주거 공간에서는 여전히 튀는 디자인이 아닐까.  
 
 
이런 의구심에 그는 롤렉스 시계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큰맘 먹고 누구나 가치를 인정하는 시계를 찼다고 쳐요. 무슨 생각이 들까요? 셔츠가 좀 볼품없으니 바꿔야겠네, 그러면 타이를 다시 골라야겠네, 아마 그럴 거예요. 이유는 간단해요. 좋은 걸 위해 나머지는 바꿔보겠다는 의지인 거죠. 우리 공예도 그런 가치가 충분히 있어요.”
 
글 이도은 기자 dandgdol@joongang.co.kr  사진 중앙포토 '아우로이' jande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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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