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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인간’을 발견하다

도스토옙스키. 니콜라예프의 1969년 리놀륨 판화

도스토옙스키. 니콜라예프의 1969년 리놀륨 판화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을 밤 10시 반에 이륙한 아에로플로트 비행기는 새벽 5시 반에 옴스크 공항에 착륙했다. 아직 4월인데 시베리아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포근했다. 이번에는 두 제자 이명현 박사와 홍지인 박사가 의기투합하여 여정에 합류했다. 러시아에 오랫동안 거주한 홍 박사는 아예 가이드를 자처했다. 러시아 문학 사상 가장 심오한 내면 여행 흔적을 찾아본다는 생각에 우리는 무척 흥분했다.  
 
서시베리아의 중심도시 옴스크의 역사는 18세기로 올라간다. 표트르 대제는 군사 요지를 확보하기 위해 이 지역으로 원정대를 파견하고 1716년에는 옴 강과 이르티시 강의 합류지점에 요새를 구축했다. 요새 안에 세워진 감옥은 러시아 각지에서 징역형을 받고 잡혀온 죄수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요새는 1864년 마지막 사령관 드 그라베 대령이 사망한 뒤 폐쇄됐다. 그리고 1983년, 사령관 사택이 있던 자리에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이 세워졌다.  
 
기념관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1만 5000점 가까운 전시물도, 친절하고 유능한 스태프도, 우리를 환대해준 바이네르만 관장도 먼길을 온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해주었다. 9개의 홀로 나뉜 전시실은 세련되고 모던했다. 족쇄·죄수복· 물통 등 당시 감옥에서 사용되던 물건들의 모사품이 작가의 일상을 고통스럽게 환기시켰다. 사진과 그림, 초판본에 데드마스크와 흉상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레오니드 람의 일러스트 시리즈는 너무 강렬해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구소련의 유명한 화가 람은 누명을 쓰고 1973년 체포되어 4년간 수용소에서 복역한 뒤 1982년 국외로 망명했다. 기념관에 전시된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유형지 소설을 재구성한 석판 시리즈로, 소설 일러스트라기보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수난에 화가 자신의 수난을 ‘덮어쓰기’ 한 시각적 고백록 같았다.  
 
노역, 묵언, 족쇄… “덫에 걸린 한 마리 늑대”
1849년 12월 24일, 수도를 출발한 도스토옙스키 일행은 영하 40도에 육박하는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를 뚫고 우랄산맥을 넘어 토볼스크에 도착했다. 토볼스크는 원래 1825년 12월 당원 봉기 때 붙잡힌 정치범들의 유배지였다. 옥바라지 하러 따라온 부인들은 남편이 죽은 뒤에도 끝까지 남아 이송 도중 며칠 묵었다 가는 정치범들을 보살펴 주었다. 그 중 한 사람인 폰비지나 부인이 도스토옙스키에게 표지 안쪽에 10루블 지폐를 끼워넣은 신약 성경을 선물했다. 성경은 감옥에서 읽는 것이 허용된 유일한 책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유형 생활 내내 이 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읽었고 눈을 감는 순간까지 지니고 살았다.  
 
죄수들은 1850년 1월 23일 마침내 시베리아 옴스크의 유형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도스토옙스키는 1854년 2월 15일 형기를 마칠 때까지 만 4년 동안 살았다. 감옥은 거대한 막사에 가까웠다. 육각형의 드넓은 마당 양쪽 편에 세워진 직사각형의 단층 통나무집이 옥사였다. 여기에 150~200명 정도의 죄수를, 정치범과 일반 형사범 구분없이 한꺼번에 수용했다.  
 
형기를 마친 직후 도스토옙스키가 형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자. “바닥은 전체가 다 썩었어. 오물이 2.5cm나 덮여있어. 우리는 나무 평상 위에서 자는데 지푸라기 베개가 유일한 지급품이야. 겨울 외투를 이불 대신 덮고 자. 두 발은 항상 외투 밖으로 나와. 밤새도록 오돌오돌 떨어야 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이, 벼룩, 바퀴 벌레가 바글거려.”  
 
일과는 항상 똑같았다. 아침 점호와 노역과 저녁 점호. 감시 하에서 하루 종일 노역을 하고 저녁때 일단 막사 안으로 들어가면 밖에서 빗장을 질러 다음날 점호 때까지 나갈 수 없다. 악취, 시비, 키득거리는 소리, 드잡이, 욕설, 소동, 고함소리와 함께 길고 긴 밤이 지나간다. 
 
당시 그의 모습은 각종 기록과 공문서, 그리고 행정관부터 병원 의사, 초소의 위병에 이르기까지 그를 조금이라도 알았던 사람들이 남긴 회고록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러시아 제국 국사범 신원대장은 그의 외모를 “회색빛 도는 푸른 눈, 금발, 중키, 다부진 체격”으로 묘사한다. 그를 보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오랜 세월 육체적인 일과 훈련에 익숙해진 노동자나 군인처럼 보였다고 진술한다. 초소의 위병 대장이었던 마르티아노프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는 항상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다른 죄수들은 물론 위병들과도 말을 섞지 않았다. 그는 “덫에 걸린 한 마리 늑대” 같았다.  
 
어떤 재난이 닥쳐도 좌절하거나 흔들리지 않기  
그러면 그의 내면은 어떠했을까. 유형수에게는 일기나 편지 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 시기 도스토옙스키에 관해 알려주는 자료는 상당히 많다. 가장 직접적인 것은 형기를 채운 후 과거를 회상하며 형에게 써 보낸 여러 통의 편지다.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 발표한 자전적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도 중요한 자료다. 유형수인 일인칭 화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죄수들의 일상과 감옥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는데, 픽션의 형식을 취하지만 거의 모든 내용이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실제 이야기라 보아도 무리가 없다.  
 
도스토옙스키는 훗날 이 시기를 되돌아보며 “나의 영혼과 가슴과 마음속에서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났지만 도저히 필설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고 썼다. 모든 문헌을 종합해보건대,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인간에 대한 관념에서 일어났다. 굳이 비유를 써서 말하자면 그의 생각은 ‘변증법적인’ 궤적을 따르며 변해갔다. 순수한 믿음은 좌절을 거친 후 더욱 큰 믿음으로 굳혀졌다.  
 
청년기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에 대해 거의 낭만적인 믿음을 품고 있었다. “삶은 어디에서건 다 삶이야. 삶은 우리들 자신 속에 있는 것이지 결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야. 내 곁에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영원히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남는 것, 그 어떤 재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좌절하지 않는 것,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거기에 바로 인생의 과제가 있는 것 아닐까.”
 
시베리아로 이송되기 직전 허용된 형과의 짧은 면회 때도 그는 ‘사람’ 얘기를 했다. 밀류코프의 회고에 의하면 동생은 당당하고 침착했으며 내내 형의 안위와 형네 식구들 걱정만 했다. 꺼이꺼이 우는 형을 동생은 다독이며 위로해주었다. “울지 마, 형, 내가 뭐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거기도 사람 사는 데야, 어쩌면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  
 
지옥 같은 생활속에서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나다
이 모든 믿음은 옴스크에 도착하자마자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그는 가장 어려운 시험대에 놓여졌다. 그곳은 “살아 있으나 죽은 집”이었고 사람 사는 데가 아니라 돼지우리였다. “돼지우리 속에서 인간은 돼지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  
 
조각가 알렉산드르 카프랄로프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2000). 유형지에서 도스토옙스키가 겪은 고통을 종교적 수난으로 승화시켜 형상화했다.

조각가 알렉산드르 카프랄로프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2000). 유형지에서 도스토옙스키가 겪은 고통을 종교적 수난으로 승화시켜 형상화했다.

악(惡)이 러시아 전역에서 붙잡혀온 살인범, 도둑놈, 강간범, 아동학대범의 모습으로 그를 에워쌌다. 죄수들은 범죄에 무감각했고 동물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서슴없이 했다. 그들은 “이빨과 위장을 가진 고깃덩어리”였다. 곱게 자라온 중산층 귀족 지식인에게 그들과의 공동생활은 그냥 지옥이었다.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불가능했다. 세계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저 수많은 기호들에 대한 감각은 정지했고 사물과 인간에 대한 감정은 공포와 혐오로 결빙되었다. 그는 “또 다른 공기를 가지고 숨 쉬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심지어 ‘동지’였던 두로프와도 같은 막사에 있으면서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웃음도 잃었다. 그저 묵묵히 노역에 임했다. 침묵, 육체노동, 성경 독서-종교적 수행과 다를 바 없는 일상 속에서 그는 내면을 돌아보는 여행을 시작했다.  
 
입을 꾹 다문 창백한 사나이의 마음속에서는 거대한 탄생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후 20년 동안 쏟아져 나올 대작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판에 박힌 듯 똑같은 감옥의 일상, 절대적인 고독과 침묵, 정지된 시간 속에서 그의 내면은 용광로처럼 끓어 넘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고독했던 나는 나의 지난 전 생애를 되돌아보았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든 것을 다시 취해서 과거를 깊이 음미해보고 용서 없이 엄격하게 스스로를 평가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이러한 고독을 나에게 보내준 운명에 감사했다. 이 고독이 없었더라면 자신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지난 삶에 대한 엄격한 비판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얼마나 커다란 희망으로 나의 심장이 두근거렸던지! 이전에 했던 어떤 실수나 방종도 앞날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심하고 다짐했다.”  
 
내면 여행을 거치며 그는 서서히 소생했다. 감각의 마비가 풀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다른 눈을 가지게 되었다. 악의 심연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고 오물 속에서도 보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어떤 낙인도 족쇄도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수들 중에서도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인간은 어디서나 같아. 4년 동안 나는 동물들 사이에서 인간을 가려낼 수 있었어. 깊고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거기 있었어.”  
 
이것은 책에서 배운 이념도 아니고 이론도 아니다. 처절한 자아 성찰 후 마음속에 견고하게 뿌리내린 삶의 방식이다. 이때 이후 그는 과거의 이상주의와 완전히 작별했다.  
 
석영중 :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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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