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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을 뛰어나가는 신의 옷자락, 문 대통령이 잡았다

출발선에 선 한반도 평화 버스
‘역사 속을 걸어가는 신의 옷자락’을 단단히 잡은 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을 매개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 3각 대화가 진행된다. [중앙포토]

‘역사 속을 걸어가는 신의 옷자락’을 단단히 잡은 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을 매개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 3각 대화가 진행된다. [중앙포토]

오토 비스마르크는 정치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역사적인 순간을 단숨에 잡아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런 말로 표현했다.
 
“신이 역사 속을 지나가는 순간, 뛰어나가 그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정치가의 책무다.”
 
문재인 대통령은 평창에서 그런 역사적인 순간과 조우했다. 그리고 그는 신의 망토 자락을 단단히 움켜잡고 함께 걸었다. 그가 신과 함께 당도한 곳이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합의다.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전광석화처럼 벌어진 일이다. 북한 비핵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정착의 절호 기회다.
 
2017년은 우리에게 얼마나 가슴 졸이는 한 해였던가. 내일 전쟁이 터진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촉즉발 위기의 나날이었다. 북한이 7월 미국에 닿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 시험발사에 성공하여 미국 본토가 북한의 핵 공격 위험에 노출되었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9월 유엔 총회 연설에서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북한은 11월 사거리 1만 3000㎞의 ICBM 화성-14형 발사로 응답했다. 북한-워싱턴의 거리는 1만 1300㎞ 정도다.
 
김정은과 트럼프가 살벌한 말 폭탄을 주고받으면서 미국의 대북 전략 옵션은 선제공격으로 기울었다. 워싱턴과 서울의 호전론자들, 배후에서 그들을 조종하는 군산복합체 세력은 예방공격까지 거론했다. 그들은 한국과 일본에 큰 피해를 주지 않고 북한 핵·미사일 시설을 외과수술 방식으로 하루 이틀에 파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틸러슨 교체,  김정은에 보내는 트럼프의 경고
 
정의용 수석대북특사(국가안보실장)가 지난 5일 북한 평양 조선노동당 본관 진달래관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정의용 수석대북특사(국가안보실장)가 지난 5일 북한 평양 조선노동당 본관 진달래관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이런 사태가 평창에서 반전되었다. 김정은이 북한 선수단과 함께 김영남과 김여정을 파견한 것이 대전환을 추동했다. 오빠 김정은의 귀를 잡고 있는 김여정이 김정은의 문 대통령 방북 초청 친서를 들고 왔다. 평창의 기적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외형적으로는 미국 대표단장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김영남·김여정 사이에는 일절 접촉이 없었다. 그러나 역사 속을 걸어가는 신의 옷자락을 단단히 붙잡은 문재인 대통령을 매개로 사실상 남·북·미 3각 대화가 진행되었다. 2김과 펜스는 각각 한반도의 긴급한 현안에 대한 상대방의 의중을 알고 귀국했다.
 
김정은의 남북 정상회담 제안, 방북 특사단에 대한 극진한 대우, 특사단에 위탁된 트럼프 방북 초청은 그 어느 것 하나 파격적이지 않은 게 없다. 김정은은 핵·미사일에 대한 사실상의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미국이 원하는 방식의 비핵화도 약속했다. 한·미 연합훈련에도 반대하지 않았다. 재래식(conventional) 북한관, 김정은에 대한 고정관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조치들이었다.
 
의외성에서는 트럼프도 지지 않았다. 그는 한국 특사단을 워싱턴 도착 즉시 만나고, 김정은의 초청을 즉석에서 수락했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속전속결로 한반도의 숨 막히는 교착상태를 시원하게 뚫어줄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자기 과시욕이 강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괴짜들이 통념(conventional wisdom)에 유쾌한 반란을 일으켰다.
 
트럼프가 김정은과의 회담을 앞두고 대북 대화파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을 북한 붕괴론자 마이크 폼페이오중앙정보국(CIA) 국장으로 교체한 것은 뜻밖으로 보인다. 그러나 트럼프와 틸러슨의 인간적 불신관계로 국무장관 교체는 시간문제였다. 폼페이오 기용은 협상 전 김정은에 대한 트럼프의 경고사격이다. 국무부의 대북 인적자원이 고갈상태인 만큼 폼페이오는 CIA 북한 분석가들을 많이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대답을 들어야 할 질문이 많다. 김정은은 정말 “정의의 보검”이라는 핵무기를 포기할 것인가. 핵 포기의 조건은 무엇인가. 북한과 협상 경험을 가진 참모가 없는 트럼프가 과연 김정은과의 회담 전략을 제대로 짤 수 있는가.
 
8일(현지시간)에는 미국 워싱턴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방북 성과에 관해 설명했다. [연합뉴스]

8일(현지시간)에는 미국 워싱턴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방북 성과에 관해 설명했다. [연합뉴스]

큰 대답은 나와 있다. 한국과 미국의 골포스트는 북한 비핵화다. 북한의 그것은 체제 안전의 확실한 보장이다. 미국은 줄곧 북한이 명백한 비핵화 의지를 보여야 대화할 수 있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비핵화 의지가 어느 수준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미국이 요구하는 것이 대화 전 비핵화의 초기 조치라면 협상은 초장부터 난관에 부닥친다.
 
회담 의제는 비핵화의 전체 과정, 로드맵이어야 한다. 로드맵은 핵 동결에서 출발하여 평화협정 체결까지 커버하는 포괄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 과정의 중간단계에서 북한은 NPT(핵확산금지조약)에 복귀하고 IAEA(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의 북한 핵시설 접근을 허용하게 될 것이다.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단계 또는 그 직전에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어 워싱턴과 평양에 미국과 북한의 대사관이나 연락사무소가 설치된다.
 
이런 로드맵의 디테일을 논의하는 것이 실무진들의 사전협의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이나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평양 방문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북한 인식이 너무 주관적이고 강경한 게 걱정이다. 그들은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지하여 김정은을 압박하면 미국이 만족할 비핵화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북한 정도의 나라와의 협상에서 주고받기의 딜을 한다는데 그들은 익숙하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를,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폼페이오를 설득하는데 올인해야 할 이유다.
 
갑작스럽게 성사된 정상회담은 갑작스럽게 정상궤도를 벗어날 수도 있다.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면 한반도 사태는 2017년보다 더 위험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두 개의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도 북한에 대한 제재를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고 한·미 연합훈련으로 대표되는 대북 억지력도 현상대로 가져가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북한의 약속 위반에도 대비해야 한다. 1994년 제네바 합의와 2005년 9·19 공동성명도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고 백지화되었다. 북한은 2012년 핵·미사일 시험 중단과 24만t의 식량을 교환하기로 한 북·미간 2·29 합의도 장거리 로켓 은하-3호와 3차 핵실험으로 날려버렸다.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트럼프의 말은 1994년과 2005년, 2012년 같은 일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김정은이 경청할 말이다.
 
남북정상회담 열 최적의 장소는 판문점



김·트럼프 회담은 한국에는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마오쩌둥의 베이징회담 못지않게 역사적이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 합의에 일본이 당황하여 아베 신조 총리가 급히 워싱턴으로 가서 트럼프를 만나겠다고 서두르는 것도 한반도의 평화가 동북아시아 지정학에 초래할 광범위한 파장을 걱정해서다. 통일은 먼 훗날에 실현될 이상이다. 그러나 남북한이 평화 공존과 상호 협력의 틀을 만들어 내기만 해도 중국과 일본은 하나로 힘을 합친 남북한을 상대하게 된다. 거기다 문재인 대통령이 구상하는 북방경제협력 공동체가 실현된다면 일본은 대륙 행 버스에 올라타야 한다. 중국의 “시(Xi)황제”는 중국의 꿈 실현을 위해 이 공동체를 그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연계시켜야 한다. 신동방정책에 시동을 건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북·중·러 국경지대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이 공동체에 한 발을 걸쳐야 한다.
 
핵·미사일 개발을 완성단계에 끌어 올린 김정은은 국민의 의식주 개선에 힘을 쏟아야 한다. 가장 빠른 길이 남북한 경제협력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과의 회담에서 수행할 큰 과제는 둘이다. 하나는 김정은에게 트럼프와의 회담에서 비핵화의 진정성을 보이고 비핵화에서 평화협정까지의 로드맵에 합의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핵동결로 출발하여 비핵화와 평화협정에 이르는 것 이상 한반도 평화를 위해 좋은 방안은 없다. 같은 설득을 트럼프에게도 해야 한다. 둘은 남북 화해와 협력의 틀 안에서 북방경제협력 공동체의 실현이 남북한의 유일한 미래 생존전략임을 김정은의 사고의 회로에 깊이 각인시키는 것이다. 이런 큰 비전에 비하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와 5·24 조치의 해제는 지엽적인 문제다.
 
자유한국당과 보수 진영은 대안 없는 반대를 접고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대승적으로 성원하거나 적어도 그 발목 잡는 일만은 멈출 것을 기대한다.
 
평화의 버스가 출발선에 섰다. 그것이 대세다. 평화가 시대정신이다. 한반도 전쟁으로 확전되지 않을 대북 선제공격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반도 전쟁은 임박한 붕괴 앞에 절망에 빠진 북한의 핵무기 사용을 부른다는 것이 대부분의 전쟁 시나리오의 결론이다. 핵 공격의 대상은 한·미·일의 어느 도시가 될 것이다. 북한의 핵 공격에 대한 미국의 보복 핵 공격으로 북한은 초토화가 된다. 한반도 전체가 방사능 낙진에 덮여 10년, 20년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저주의 땅이 될 가능성을 누가 자신 있게 배제할 수 있는가.
 
판문점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정상회담의 정례화를 제안할 것을 건의한다. 1년에 한 번의 정상회담 사이에 총리·장관·국장급 회의를 열어 깊이 있는 협력 방안을 논의한다. 남북 정상회담에 판문점은 이상적인 장소다. 번거로운 경호문제, 의전 문제가최소화된다. 그러나 북·미 정상회담은 평양에서 열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평양의 트럼프” 그 이상 평화에 어필하는 이미지를 상상할 수 없다.
 
 
 
김영희 전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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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