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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차별을 묻다 … 현실 같은 픽션, 픽션 같은 현실

‘쓰리 빌보드’의 샘 록웰(왼쪽)과 프란시스 맥도먼드. [사진 각 영화사]

‘쓰리 빌보드’의 샘 록웰(왼쪽)과 프란시스 맥도먼드. [사진 각 영화사]

비극은 이미 벌어졌다. 딸 아이가 잔혹한 범죄로 숨진 지 여러 달 지났건만, 범인이 잡히긴커녕 수사는 조금의 진척도 없다. 분통이 터진 엄마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먼드 분)는 길가에 방치돼 있던 대형광고판에 경찰을 비판하는 문구를 싣는다.
 
이렇게 시작하는 ‘쓰리 빌보드’(감독 마틴 맥도나, 15일 개봉)는 이달초 미국에서 열린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작품상·각본상 등 7개 부문 후보에 올라 여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받은 영화다. 아카데미상과 함께 시상식 시즌이 막을 내리며 국내 극장가에 수상작 개봉이 한창이다. 아카데미만 아니라 칸영화제 등에서 굵직한 상을 받으며 작품성이 입소문 난 영화들의 제철이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은 샘 록웰과 여우주연상을 받은 프란시스 맥도먼드. [로이터=연합뉴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은 샘 록웰과 여우주연상을 받은 프란시스 맥도먼드. [로이터=연합뉴스]

그 중 ‘쓰리 빌보드’는 장르영화에 익숙한 관객의 상상력과 전혀 다른 전개가 단연 흥미롭다. 설정만 보면 무능한 경찰 대신 엄마가 딸의 살해범을 추적하거나 응징하는 통렬한 복수극일 것 같지만 영화의 무게중심은 다른 곳을 향한다. 세상에 사정이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듯, 광고판을 통해 실명으로 무능함을 비판받은 경찰서장(우디 해럴슨 분)이나 폭력적이고 인종차별적인 경찰(샘 록웰 분)도 그렇다. 극적인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지면서 누구 하나 선인과 악인, 옳고 그름으로 단칼에 나눌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밀드레드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딸 아이가 죽기 전 엄마로서 입에 담기 힘든 몹쓸 말을 했던 자책감, 딸의 복수를 바라며 현재 벌이는 일들이 불러온 뜻밖의 결과가 관객과 밀드레드에게 고민과 질문을 안겨준다.
 
이 영화는 실화가 아니라 마틴 맥도나 감독이 직접 쓴 시나리오가 바탕이다. 영국에서 극작가로 출발한 감독이 미국 중서부의 한적한 마을을 무대로 관객 앞에 펼치는 강렬한 드라마는 마치 윤리적 딜레마로 가득한 방탈출게임 같다.
 
아카데미 각색 상을 받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주연배우 티모시 샬라메. [사진 각 영화사]

아카데미 각색 상을 받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주연배우 티모시 샬라메. [사진 각 영화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22일 개봉) 역시 아카데미 작품상·남우주연상·주제가상 등 4개 부문 후보에 올라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영화다. 배경은 1980년대초 이탈리아 남부의 전원 마을. 여유로운 분위기가 흐르는 이곳에 부모와 함께 여름을 보내러 온 17세 소년 엘리오(티모시 샬라메 분)는 지적인 데다 피아노 연주 장면에서 드러나듯 예술적 감수성까지 가득하다. 이런 엘리오의 시선은 아버지의 조수로 여름을 함께 보내게 된 20대 미국 청년 올리버(아미 해머 분)를 향한다. 성에 눈뜨는 소년의 모습,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배려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성적 정체성을 넘어 첫사랑의 설레고 아름다운 면면을 한 편의 판타지처럼 전한다.
 
하지만 80년대초라는 시간적 배경은 올리버가 극 중에서 하는 말처럼,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면 부모가 정신병원에 가두고도 남을 법한 시대이기도 하다. 엘리오의 부모는 이와 정반대로 아들의 성향을 충분히 짐작하고 아들의 첫사랑이 소중한 기억이 되길 바라는 보기 드문 경우다. 그렇다고 엘리오가 겪을 슬픔을, 첫사랑의 불완전함을 온전히 메워줄 수는 없다.
 
원작은 미국 작가 안드레 애치먼이 2007년 펴낸 동명 소설(국내 출간 제목 『그해, 여름 손님』)이다. 이를 시나리오로 각색한 사람은 올해 90세의 제임스 아이보리. 영화 ‘전망 좋은 방’ 등의 감독으로 이름난 그는 이번 영화로 첫 아카데미상을, 그것도 각색상을 받았다. 연출을 맡은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아이 엠 러브’를 비롯, 사랑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단연 뛰어난 장인임을 이번에도 확연히 보여준다. 영화에 곁들여진 수프얀 스티븐스의 음악 역시 일품이다.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120BPM’. [사진 각 영화사]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120BPM’. [사진 각 영화사]

80년대란 배경은 지난해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120BPM’(감독 로빈 캄필로, 15일 개봉)에도 중요하다. 후천성면역결핍증, 일명 에이즈 환자가 무섭게 늘어나는데 치료제는 변변찮았던 시기다. 정부와 제약회사에 경각심을 일깨운 건 환자들 자신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액트업’이란 단체로 뭉친 이들은 죽어가는 몸으로 거리에 나서 에이즈 방지 구호를 외친다.
 
영화의 중심은 89년 액트업의 프랑스 파리 지부의 활동, 그 중에도 멤버들과 제약회사로 직접 쳐들어가는 션(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분)이다. 동성애자, 약물 중독자, 오염된 주사바늘로 감염된 임산부와 그 아이들을 비롯해 절박한 처지에 놓인 이들이 치열한 회의를 벌이는 첫장면부터 강렬하다. 치료약의 부작용을 논하다 혼절하는가 하면, 시위 도중 끌려가면서도 약을 챙겨야 한다.
 
동시에 춤추고 사랑하길 포기하지 않는다. 액트업파리의 슬로건은 ‘춤이 곧 삶’이었다. 정부 관료에 가짜 피를 던지고, 분홍색 응원용 술과 은박종이를 흩날리며 한낮에 행진을 벌이고, 새하얀 십자가를 진 채 밤거리에 드러눕는 강렬한 시위의 끝에는 어김없이 80~90년대 유럽에서 유행한 하우스뮤직이 흐른다. 어둠 속에 부드럽게 부서지는 빛의 프리즘 속에 분당 120비트(120 Beat Per Minute, 영화 제목이 여기서 나왔다) 사운드에 몸을 맡긴 이들의 모습은, 세상을 잠시 잊고 그제야 온전히 호흡하는 듯 보인다.
 
로빈 캄필로 감독은 비감염자로서 90년대 액트업파리에서 활동했던 경험을 살려 전 멤버와 함께 시나리오를 써내려갔다. 마지막 순간까지 “증오와 차별을 부추기는 데 에이즈를 이용하지 말라!”고 외치는 션의 구호는 고스란히 영화의 주제나 다름없다. 연인 나톤(아르노 발로아 분)은 수척해져가는 션의 곁을 끝내 떠나지 않는다. 
 
이후남·나원정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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