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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북·미정상회담 앞두고…닉슨-마오쩌둥 회담 성공 비결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AP=연합뉴스]

 
오는 5월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면 한국전쟁 이후 약 70년 간 ‘적대관계’였던 두 국가 정상의 첫 만남이 된다.  
그런데 ‘세계 최고 권력자’로 꼽히는 미 대통령이 ‘적대국 정상’과 마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리처드 닉슨·존 케네디을 비롯한 트럼프의 옛 전임자들은 공산주의 국가인 옛소련·중국 등의 정상들과 적지 않은 회동을 가졌다. 일부는 성공했고, 일부는 성과 없이 그저 ‘불편한 회동’으로 끝났다. 
 
1961년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 만남 모습. [뉴욕타임스 캡처]

1961년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 만남 모습. [뉴욕타임스 캡처]

 
이중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회동을 앞두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반면교사’로 참고할 만한 사례가 있다. 바로 1961년 미·소 정상회담이다. 노회한 정치인인 니키타 S.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당시 68세)과 ‘임기 2년차’였던 존 F. 케네디(44) 미국 대통령의 만남이었다.
회동 전만 해도 ‘젊고 패기있는 대통령’으로 촉망받은 케네디는 별 소득을 내지 못해 대중에 실망감을 안겼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엔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쿠바 미사일 위기(62년)까지 터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회동 전부터 비틀거렸다.
케네디는 취임한 61년 소련의 공산주의 동맹국인 쿠바에 비밀 침공 계획을 추진했다. 이 계획은 전임자인 아이젠하워 정권이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정권을 전복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세웠다. ‘당선 3개월차’였던 케네디는 작전을 그대로 물려받아 강행했다.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케네디는 전면전까지 선포한 쿠바에 많은 돈을 지불하고서야 사로잡힌 포로를 석방시킬 수 있었다. 쿠바의 동맹국인 소련도 발끈하고 나섰다.
 
미·소 간 대결이 팽팽하던 이듬해 케네디는 흐루쇼프와 비공식 회담을 강행했다. 하지만 회담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무엇보다 두 정상은 신뢰 구축에 실패했다. 전략적 목표를 분명히 세우지 못한 탓이 컸다. 훗날 케네디가 “회담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케네디는 미 타임지 기자를 만나 불만을 쏟아냈다고 한다. 
케네디는 “이런 인간(흐루쇼프)은 처음”이라며 “나는 ‘두 국가가 서로 핵 공격을 벌이면 불과 10분 만에 7000만명이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흐루쇼프는 ‘그래서 뭐(So what)?’라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또 흐루쇼프가 “전쟁이나 평화는 전적으로 미국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자, 케네디는 “서기장 양반(Mr.Chairman)! 곧 전쟁이 벌어지고 추운 겨울이 닥칠 것”이라며 맞불을 놨다고 한다. 
 
 케네디-흐루쇼프 회담 실패는 이듬해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이어졌다.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을 파악한 케네디 행정부가 쿠바 해안에 전면 봉쇄를 선포하고 나섰다. 소련이 기지 폐쇄와 무기 철수를 약속하면서 다행히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전세계는 약 2주간 핵전쟁 위기에 떨어야 했다.
 이와 관련 NYT는 “역사가들은 ‘분명한 전략적인 목표가 없던 당시 회담이 모호한 결과만 낳았다’고 지적했다”며 “회담과 관련된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이들(케네디와 흐루쇼프)은 회담에서 자국의 선거 얘길 쏟아내거나, 자본주의가 나은지 공산주의가 나은지 여부를 두고 말다툼을 벌였다”고 전했다.
 
1985년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과 고르바체프 소련 서기장과의 만남. [뉴욕타임스]

1985년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과 고르바체프 소련 서기장과의 만남. [뉴욕타임스]

 
레이건 대통령 시절 개최된 미·소 정상회담 역시 결과는 좋지 않았다. 스위스 제네바(85년)와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86년)에서 레이건(제네바 회동시 74세)이 두 차례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54)을 만났지만 별 소득없이 끝난 것. 
특히 군축 협정이 핵심인 ‘아이슬란드 회동’과 관련해 NYT는 “‘미국의 전략방위구상을 규제해야 한다’는 고르바초프의 요구를 레이건이 거절한 뒤로 두 정상의 사이가 비틀어졌다”고 했다. 이후 미·소간 핵 경쟁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미중 관계 정상화로 이어진 닉슨과 마오쩌둥의 만남. [AP=연합뉴스]

미중 관계 정상화로 이어진 닉슨과 마오쩌둥의 만남. [AP=연합뉴스]

 
역대 정상간 회동 중에는 트럼프가 ‘벤치마킹’할 만한 사례도 있다. 바로 72년 미·중수교로 이어진 리처드 닉슨(당시 59세) 대통령과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 당시 79세)의 정상회담이다. 이를 계기로 미·중의 냉전이 종료됐다.
두 사람의 만남은 실무진의 끈질긴 ‘물밑 협상’ 덕분에 가능했다. 
회담 전년도(71년)에 미 탁구팀이 중국을 방문해 중국 탁구팀과 경기를 가진 것을 계기로  두 나라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헨리 키신저 대통령 국가안보 보좌관과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를 주축으로 양국의 물밑 접촉이 개시됐다.
저우언라이는 "국제외교사에서 스포츠가 그렇게 효율적으로 사용된 적은 전례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핑퐁 외교'의 이면엔 외교가 있었다. 

 
 닉슨과 저우언라이의 악수도 상징적이었다. 
 앞서 54년 저우언라이는 제네바 국제회의장에서 반공주의자인 존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 마주쳤다. 저우언라이는 손을 건넸지만 덜레스는 이를 무시했다고 한다.
‘18년 뒤’ 마주한 닉슨이 손을 건네자 그의 손을 꽉 잡은 저우언라이는 “당신과의 악수가 세계 최대의 대양(태평양)을 건넜다. 오랜 불통을 극복했다”고 말했다.

 
 닉슨-마오쩌둥 회담의 성공 이면엔 양 정상이 믿는 참모(키신저와 저우언라이)들의 치밀한 신뢰구축 과정이 있었다.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까지 남은 약 두달이 중요한 이유다.  
  
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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