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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분서갱유가 통일제국 건설 밑바탕 된 아이러니

[비주얼 경제사] 역사 속엔 양면성이 있다
중국의 궁궐에서 왕에게 한 신하가 문서를 바치고 있다. 대문 바깥에서는 시끌벅적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수많은 서책이 불에 타고 있다. 다른 쪽에서는 무인들이 문인들을 구덩이에 밀어 넣고 있다. 이 그림은 어떤 역사적 사건을 묘사한 것일까?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묘사된 부분은 무엇일까?
 
 
그림1 분서갱유를 묘사한 18세기 작자미상의 그림.

그림1 분서갱유를 묘사한 18세기 작자미상의 그림.

그림1은 기원전 3세기에 일어난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묘사한 18세기 작품이다. 작자 불명의 이 그림은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나라를 건설한 진시황의 통치 시절을 보여준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많은 서책들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파묻어 죽인 사건을 묘사한다. 용상에 앉아있는 인물이 바로 진시황이다. 그리고 그에게 문서를 바치는 이는 외국 출신임에도 황제의 총애를 받아 승상에 올랐던 이사(李斯)라는 인물이다.
 
 기원전 230년에 통일왕조를 연 진나라는 기존의 봉건제를 대신해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인 군현제를 실시하고 법가를 통치의 이념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런데 기원전 213년 유생들이 봉건제의 부활을 주장하고 나서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사는 유생들을 비판하고 정치비판적인 성격의 사사로운 서적을 모두 소각해야 한다고 황제에게 주청했다. 의학, 농업, 점복 등 실용적 서적은 불길을 피할 수 있었지만 유가 사상과 관련된 수많은 서적들은 잿더미가 됐다. 이듬해에는 불로장생의 비약을 구하겠다던 방사들이 재물을 사취하고 시황제를 비난한 후 종적을 감추는 사건이 터졌다. 이를 계기로 진시황은 자신을 비방한 자들을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결국 460명의 유생들이 체포돼 생매장되는 비극을 맞았다.
 
 
자객 형가 등 수많은 암살 위협 겪어
그림2 진시황 암살미수 사건을 묘사한 전한시대 석판 탁본, 3세기.

그림2 진시황 암살미수 사건을 묘사한 전한시대 석판 탁본, 3세기.

분서갱유를 그린 대표적 작품인 그림1에는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 요소들이 여럿 등장한다. 첫째, 등장인물들이 착용한 복장은 진나라가 아니라 명·청대의 모습에 가깝다. 특히 진시황은 정무를 볼 때 통상 검은색의 곤복 차림을 했을 거라고 복식사 연구자들은 판단한다. 19세기에 제작된 진시황의 초상(그림3)에 등장하는 차림과 유사했을 것이다.
 
 그림이 실제와 다른 둘째 요소는 불타고 있는 서책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림에 묘사된 종이책은 진나라 때에 존재하지 않았다. 채륜(蔡倫)이 펄프를 이용해 종이를 만든 때가 후한시대인 2세기 초였고, 최근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에 초보적인 종이가 제작됐다고 한다. 진시황시절의 문서는 이와 달리 모두 죽간(竹簡)의 형태였다.
 
 복장과 서책이 진나라 시대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오류라면, 화가가 의도적으로 채택한 오류도 있다. 시간차를 무시하고 하나의 그림에 관련 내용을 한꺼번에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이사가 주청을 올리고 나서 이에 기초해 분서가 이루어지고 다시 이듬해에 갱유가 발생했다. 화가는 이 일련의 사건들을 하나의 그림 속에 표현했다. 오늘날 카메라가 한 시점의 피사체 모습을 정지된 모습으로 담는 것과 달리 과거의 역사적 그림은 사건의 흐름을 한 화폭에 모두 담는 방식을 취했다. 이렇듯 그림1은 여러 가지 비의도적 및 의도적 오류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림3 진시황의 초상화, 1850년경.

그림3 진시황의 초상화, 1850년경.

 분서갱유는 진시황의 잔인한 품성과 가혹한 폭정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흔히 거론된다. 이 주장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진시황이 드러낸 냉혹성은 타고난 개인적 기질일 수도 있지만 그가 젊어서부터 지속적인 살해의 위협 속에서 살았다는 사정과도 관련이 깊어 보인다. 진시황이 겪은 수많은 암살시도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례가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의 ‘자객열전’ 편에 등장한다. 진나라에게 멸망한 위나라 출신의 형가(荊軻)라는 자객 이야기다. 그림2은 형가가 번어기의 목을 바친다는 명분하에 훗날 진시황이 될 젊은 왕 영정(嬴政)을 알현하는 결정적 순간을 묘사한다. 전한시대에 제작된 이 석판은 간결하지만 무척 생동감 있게 암살미수 사건의 현장을 재현하고 있다.
 
 한편 분서갱유는 진시황이 유가사상과 같은 이질적 가치관을 전혀 수용하지 않고 편협한 관점을 고집했다는 근거로 인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진시황의 여러 행적을 보면 이와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거대한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지역적 풍습과 관행들을 뛰어넘어 광범위하게 통용될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또한 전국의 사람과 물자가 원활하게 이동하고 이들을 단일한 시스템으로 통제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영정은 누구보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복전쟁 초기부터 초인적인 추진력을 발휘해 수많은 제도적 개혁에 힘을 쏟았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많았던 한자를 통일했고, 둥근 외형에 네모난 구멍이 뚫린 반냥전이라는 단일주화를 제작해 전국적으로 유통시켰다. 수레바퀴의 폭을 포함해 도량형을 표준화했으며, 법가사상에 기초해 생활을 규제하는 법률 제정에 힘썼다. 또한 간선도로인 치도(馳道)를 닦아 제국 전역을 연결했고, 대운하를 개축해 물류과 세정의 혁신을 이루고자 했다.
 
 때마침 한(韓)나라에서 수리기술자들을 보내 진나라의 대규모 운하 개축사업을 돕게 됐다. 그런데 이것이 진나라의 국력을 소모시키려는 은밀한 계략이라는 의혹이 주위에서 높아지자 영정은 마음이 흔들린다. 외국 출신 신하들의 충성심에 대한 의심이 스멀스멀 번져갔고 영정은 마침내 이들을 모두 추방한다는 축객령(逐客令)을 내리게 된다. 한나라 출신의 젊은 신하였던 이사로서는 아찔한 위기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담대한 전략을 취했다. 축객령을 거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작성해 왕에게 올렸다.
 
 이 문서에서 이사는 역사적으로 성공한 왕들이 공통적으로 외국 출신의 인재를 적극 영입해 활용했다고 예시했다. 또한 왕실의 옥과 보물, 후궁의 미녀들이 원래 진나라에서 나온 것이냐고 반문했다. 마지막으로 이사는 ‘태산이 거대한 것은 어떤 흙도 뿌리치지 않았기 때문이며, 바다가 깊은 것은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비유를 남겼다. 유능한 인재를 쫓아내는 행위는 외국의 힘을 키워줘 훗날 진나라를 위협하는 부메랑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주장에 영정은 결국 마음을 돌리게 된다. 출신지를 막론하고 인재를 선발해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이 최상의 정책이라는 인식이 진시황의 마음에 뿌리내리는 순간이었다. 이런 사례를 놓고 보면 진시황은 편협성보다는 오히려 개방성이 돋보인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진시황은 엄청난 일벌레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일 120근에 달하는 죽간에 쓰인 공문을 처리했다. 또한 자신이 계획한 대로 제국이 잘 운영되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다섯 차례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순행했다. 그는 마지막 순행 도중에 병을 얻어 5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리고 4년 후에는 그가 그토록 공들여 건설한 진 왕조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진 왕조가 단명했다고 해서 진시황의 발자취가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다. 뒤이은 역사 에서 중국은 일부 분열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대로 중앙집권적인 제국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죽은 유생 대부분이 모리배라는 해석도
이는 유럽이 서로마제국 붕괴 이후 다수의 분권적 세력으로 쪼개져 봉건체제를 이룬 사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동서양의 역사가 상이한 진화과정을 경험하게 데에는 진시황 개인의 영향이 컸다. 첫 통일제국을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혈연적이고 개별적인 지역주의를 넘어서 광대한 영토에서 통용될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는 점이 그가 남긴 가장 눈부신 업적이다. 진시황이 과로 속에서 끊임없는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엄청난 추진력으로 이루고자 했던 것이 바로 제국체제라는 새 질서였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역사의 경로를 바꾼 인물로 평가될 만하다.
 
 마지막으로, 분서갱유는 정말로 진시황의 무자비한 폭정의 증거일까? 자신의 뜻과 다른 사상을 담은 서책들을 불태우고 여러 유학자들을 죽인 행위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탄압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분서갱유가 폭군의 편협성과 배타성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보는 전통적 해석이다. 그렇지만 반론도 제기된다. 진 왕조의 뒤를 이은 한(漢) 왕조의 입장에서 기술한 역사는 진나라의 통치가 실정 투성이였다고 폄훼하는 경향이 강했다. 여기서 한 왕조의 편향된 평가가 분서갱유 사건에 덧씌워졌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실제로는 분서의 대상이 된 서책이 제한적이었고 갱유의 대상이 된 유생들이 대부분 백성들을 현혹하던 모리배였을 뿐이라는 해석이 제기되는 것이다.
 
 결국 분서갱유는 진시황 치세의 작은 일화일 뿐이고 본질적인 부분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동아시아에서 대제국을 건설하고 사회경제적 통합의 씨앗을 뿌림으로써 광역적 세계화를 선도한 진시황의 행적을 놓고 본다면, 분서갱유를 그의 공과를 판단하는 최우선 기준으로 삼는 건 아무래도 무리라고 생각된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bks21@skku.edu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세계화의 풍경들』『비주얼 경제사』『세계경제사 들어서기』등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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