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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쿠바 한인기념비 앞에서 아리랑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한인회관을 운영하는 이민 3세 안토니오 김(왼쪽)과 4세인 딸 미미아.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한인회관을 운영하는 이민 3세 안토니오 김(왼쪽)과 4세인 딸 미미아.

지난 2월 초 30명의 국제한민족재단(상임의장 이창주) 쿠바탐사대가 찾았던 쿠바 중서부 마탄사스의 엘볼로 마을에는 미주 한인들이 세운 작은 ‘한인 이주 기념비’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곳은 1920년대 쿠바 한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이곳은 지금도 가난한 벽촌이다.
 
한인의 쿠바 이주는 1921년 3월 맥시코 이주 한인 중 288명이 일자리를 찾아 쿠바로 이주 한 것이 시초다. 당시 쿠바에선 미국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을 개척하면서 노동력 수요가 급증해 1902~1920년 10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이주했다. 하지만 사탕수수 산업이 불황을 맞으면서 이들은 마탄사스의 에네켄 농장으로 이주해 엘볼로 마을에서 모여 살았다.
 
이렇게 힘들게 살면서도 한인들은 독립자금을 모금해 김구 선생에게 송금하는 등 조국을 잊지 않았다. 이민 1세대 임천택(1903~1985) 선생은 이역만리 에네켄 농장에서 땡볕 속 중노동을 하면서도 독립자금 송금은 물론 한인 2세를 위한 한글 교육까지 펼쳤다.
 
그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2004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아들 세르히오 임은 59년 쿠바혁명에 참가하고 농업 차관을 지냈다.
 
쿠바 종서부 마탄사스의 엘볼로 마을에 있는 한인 이주 기념비.

쿠바 종서부 마탄사스의 엘볼로 마을에 있는 한인 이주 기념비.

더는 한인 이민이 오지 않는 상황에서 1946년 이후 쿠바 국적 취득이 가능해지자 대부분의 한인은 쿠바 사회의 일부로서 현지에 동화돼갔다. 1959년 쿠바 공산혁명 이후 미국 한인들이나 본국과 연락이 끊어졌음에도 한인들과 후손들은 한국 풍속과 김치, 불고기, 잡채 등 한식문화는 유지했다.
 
이제 한인들은 모두 이 벽촌 마을을 떠나 아바나 등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남은 사람은 없었다. 이곳을 찾은 한국인 30명은 기념비 앞에서 강강술래를 하고 목멘 ‘아리랑’을 부르며 이역만리에서 고국을 그리워했을 쿠바 이주 한인들의 넋을 기렸다.
 
아바나엔 한인회관이 있지만, 다민족국가 쿠바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최근 쿠바 애국 시인의 이름을 딴 ‘호세 마르티 문화회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인회장에서 문화회관 관장으로 직함을 바꾼 안토니오 김(74)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고 현지인과 동화했어도 한국이라는 뿌리와 문화는 잊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쿠바인 사이에서 한국 드라마와 K-팝이 인기를 끌면서 한글 교육이 활기를 찾고 있으며 재정 문제 등으로 일시 중단했던 한식 강좌도 조만간 재가동할 채비 중”이라고 소개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국을 잊지 않는 동포들의 가슴 찡한 모습이었다.
 
마탄사스(글·사진)=채인택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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