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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한 피라미드 구조에 갇혔었다"…들불된 '미투'에 연극인 자성

서지현 검사가 ‘미투(#Me Too) '운동의 불씨를 지폈다면 이 불씨가 거대한 들불로 번진 곳은 연극계다. 이윤택, 오태석, 이명행, 조민기, 조재현, 오달수씨 등 내로라하는 유명 연출가와 배우에 대한 미투 폭로가 이어졌다. 미투 운동 확산의 '공로'가 연극계에 있는 셈이지만 그만큼 어느 분야보다 성폭력이 만연해 있었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연극계 전체가 위기의식에 휩싸인 상황. 미투 운동에 공감하는 연극인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모여 반성과 자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22일 150여명의 연극인이 모여 결성한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이하 연극인행동)'이 그것이다. 연극인 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대표자 7인을 만나 이야길 들어봤다. 이들은 연극계의 '공고한 피라미드' 구조를 문제로 꼽았다. 학창시절부터 졸업 후 극단 생활까지 '선생님'으로 불리는 절대 권력자에 순종하는 구조라는 지적이다. 
'성폭력반대 연극인 행동' (왼쪽 윗줄부터 시계방향으로) 작가 설유진(35)씨, 극단대표 방혜영(37)씨, 연출가 정안나(48)씨 ,기획자 오성화(45)씨, 기획자 이도원(35)씨, 배우 홍예원(35)씨, 배우 김보은(33)씨. 임현동 기자

'성폭력반대 연극인 행동' (왼쪽 윗줄부터 시계방향으로) 작가 설유진(35)씨, 극단대표 방혜영(37)씨, 연출가 정안나(48)씨 ,기획자 오성화(45)씨, 기획자 이도원(35)씨, 배우 홍예원(35)씨, 배우 김보은(33)씨. 임현동 기자

# 연극계가 성폭력 상황을 미투 운동 이전에도 알고 있거나 당한 적이 있나.  

 
설유진 작가(이하 설)= 최근 미투 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명행이나 이윤택 등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때는 직접 피해자에게 얘기를 들으면서도 너무 자극적이고 부풀려진 얘기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나쳤던 게 같은 연극인으로서 너무 비참하고 미안했다. 지금은 연극인 행동에서 피해자 신고 센터를 통해 매일 피해 사례를 접수하고 지원하고 있다.
 
방혜영 대표(이하 방)=2005년 모 극단에서 막내 배우로 일할 때 선배 배우랑 술을 먹다가 모텔로 끌려간 적이 있다. 마구 저항하니까 '너 이러면 이 극단 생활 힘들다'며 '너는 연극을 한다면서 남자 경험이 없으면 어떻게 좋은 글을 쓰겠냐'고 하더라. 가까스로 극단을 도망쳐 나왔지만 '잠자리를 안 가졌으면 됐지 왜 난리를 피우냐'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자기검열까지 당해야 하는 피해자가 너무 많다는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정안나 연출가(이하 정)=연극인들은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반성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윤택을 오래전, 그러니까 97년부터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계속 '같이 일하자'는 제의가 있었지만 수락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김수희 연출가의 글을 보고야 깨달았다. ‘그때 나는 왜 따라가지 않았을까’ 라고 스스로 되물었다. 나도 사실 연극계의 추악한 모습을 알고도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22일 출범한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라온 성명서. 최규진 기자

22일 출범한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라온 성명서. 최규진 기자

 
# 연극계 내 성폭력이 만연한 까닭은 무엇인가. 
 
홍예원 배우(이하 홍)= 연극계는 성폭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1인 중심 체제의 극단에서 소위 ‘선생님’으로 불리는 사람이 모든 권력을 쥐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연극 현장의 위계와 권력은 학교의 권위와 밀착되어 연극을 시작하는 학생들에게도 연결된다. 내가 만약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했다면 선생님이나 선생님 제자의 극단을 가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고한 피라미드 속에 갇혀 버리는 거다.
  

정=연극계의 위계 문화는 군대와 닮았다. 수년 전 연극을 처음 배울 때 집합을 당한 기억이 난다. 선배들이 후배들의 화장과 몸매에 대해 지적하고 뺨을 때렸다. '너는 화장 그딴 식으로 하고 다니지 마'라는 식으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웠다. 흔히 연극은 사람의 인생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자기 한 사람을 파괴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동안 이것이 잘못된 '인간 개조'의 방식으로 이어진 셈이다.
  
이도원 기획자(이하 이)= 연극 제작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다. 수많은 사람이 공동 창작하지만 지원금이나 예산을 어떻게 편성하고 분배하느냐는 연출자나 제작자에만 몰린다. 이 사람의 제자들은 연극계에 넓게 퍼져 있다. 그 사람한테 찍히면 소문 도는 것뿐 아니라 지원금 같은 생존권 문제에서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피해 사실을 제대로 털어놓지 못하게 된다.
 
# 최근 이어지는 미투 운동에 대한 우려가 있나.  

 
이=미투 운동이 지나친 폭로에만 그치는 게 우려된다. 피해자가 익명으로 얘기하면 '왜 진작에 이야기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되돌아온다. 결국 실명을 걸고 얼굴 드러내고 나와야 진정성을 인정받는다. 성폭력 피해자를 전시하는 식의 언론보도 역시 마찬가지다. 피해자들이 내가 실명이건 익명이건, 폭력의 수위에 상관없이 미투가 가능해야 한다.
 
오성화 기획자=가해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대사가 '애인 관계였다'는 말이다. 마치 매뉴얼대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무조건 법적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말만 한다. 결국 피해자가 원래 문란한 사람이라는 식의 프레임을 덧씌운다. '나는 좋은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해였다'고 말이다.
 
김보은 배우=미투 운동에 나선 피해자들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벌써 가해자들을 옹호하는 기사와 댓글들이 떠돌고 있다. 지금 피해자들은 최소한 가해자의 직접적 영향력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목소리를 낸 것이다. 아직도 그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피해 사실을 털어놓기조차 힘들다. 
  
'성폭력반대 연극인 행동' 회윈들 인터뷰가 2일 서울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열렸다. 임현동 기자

'성폭력반대 연극인 행동' 회윈들 인터뷰가 2일 서울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열렸다. 임현동 기자

 
# 연극계 내 성 평등이 이제부터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나. 
 
정= 연극계의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야 한다.  2016년 8월에도 비슷한 성희롱 문제를 고발한 사례가 있다. 마치 이불을 덮듯이 조용해지는 것을 보면서 혼자만 참으면 그냥 지나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지금은 미투운동에 나서는 20·30세대에게 너무 감사하다. 이 문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법을 많이 바꿔야 한다. 지금 법으로는 가해자가 처벌도 받지 않고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 지금 가해자들이 어떻게 처벌받는지 명확한 선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연극계의 성폭력 가해자들은 공공 부분에서 퇴출당해도 개인 자격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최소한 정부 지원금을 받는 기관에서는 성범죄 경력 있는 사람들의 재유입을 막는 제도적 방안 필요하다. 피해사실을 정확히 적시하고, 가해자를 제명하는 식이다. 또한 피해자에게 불이익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사후지원책도 있어야 한다.
 
설= 미투가 연극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동안 피해사실이 있어도 누군가에게 신고하지 못했던 것은 우리 사회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더는 하지 않겠다. 우리 사회가 무너진 신뢰를 회복할 좋은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의 미투는 현상이고, 앞으로가 진정한 운동이 돼야 한다.
 
최규진·권유진 기자 choi.k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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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