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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활기 넘치는 색채의 나라

인도의 홀리 축제 사진 중앙포토

인도의 홀리 축제 사진 중앙포토

인도에 홀리 축제의 계절이 왔다. 2018년 홀리 축제일은 3월 2일.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색색의 가루와 물감을 서로에게 문지르고 뿌린다. 넘치도록 생생한 빛깔, 빛깔들! 인도인은 이렇게 새봄을 맞이한다.
 
현란함 가득한 인도 타이포그래피
“제게 발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한 인도 남자의 발표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 허리를 바로 세우고 앉았다. 우다야 쿠마르는 이 국제 콘퍼런스에서 유일한 인도인 연사였다. 
 
2012년 국제타이포그래피협회 ATypI의 콘퍼런스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도시 홍콩에서 개최됐다. 그해 콘퍼런스의 슬로건은 ‘먹(墨), 흑과 백의 사이’였다. 우다야는 바로 이 명제를 반박하기 위해 그 자리에 섰다. 인도의 로컬 타이포그래피에서는 흑백보다 색채가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그 슬로건은 콘퍼런스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서양인과 동아시아인들이 의심해본 적이 없던 명제였다. 검게 채워진 것은 획이요, 희게 비워진 것은 종이라, 글자란 검은 형상과 흰 배경의 균형을 근본으로 한다. 이 합의를 우리가 한 번도 반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심지어 나는 로마자가 동아시아의 문자들에 일방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 경각심을 보이는 입장이었다. 그런 입장이면서도, 내게 이질적인 지구상 어느 다른 문자의 소중한 본성을 부지불식간에 부당하게 소외시켜왔을지 모를 일이었다.  
 
색과 향이 풍부한 오감의 나라
색채찬란한 티카 염료. 인도의 일상 역시 색채로 가득하다.

색채찬란한 티카 염료. 인도의 일상 역시 색채로 가득하다.

인도는 과연 활기 넘치는 색채의 나라다. 눈부신 색상의 의복을 입은 사람들로 붐빈다. 빨간색과 황금색을 선호하는 중국의 색감도 우리 눈에는 화려하지만, 인도의 색상은 한층 다채롭고 풍성하다. 
 
인도에서는 색뿐 아니라 맛과 향도 강렬하다. 거리의 악취에서 향신료의 톡 쏘는 냄새, 진귀하고 그윽한 향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하다. 한마디로, 오감이 다 풍부하다. 어떤 구조의 분자들이 이런 오만가지 색과 향으로 화해 오감을 교차시키는 것일까.
 
인도는 고대부터 직물과 염료의 재료로 꽃을 많이 재배해왔다. 꽃으로 제조한 인도의 황홀한 향료와 오일은 1세기경 로마 제국을 매혹시킨 바 있다. 재스민·사프란·파출리·샌달우드·베티베르…. 인도의 천연원료들은 귀한 교역 상품이었다. 더운 기후 속에서 온도와 공기를 상쾌하게 조절하는 천연냉각제로 사용되기도 했다.
 
북회귀선 남쪽의 한 인도 시골 마을을 방문했을 때, 그곳은 겨울인데도 꽃들이 화려하게 만개해 있었다. 색채와 공기가 농염했다. 도시에서도 염색한 직물들을 널어놓았다. 과일과 채소를 쌓아올린 상인들의 손길 속에 찬란한 색들이 피어올랐다. 
 
우다야 쿠마르는 인도인들이 디자인의 원칙이나 이론에 속박되기보다는, 색채처럼 그들의 주의를 우선적으로 끄는 것들을 거침없이 탐색해간다고 했다. 인도에서도 고대에 필사를 위한 검은 잉크가 만들어져, 야자나무잎 필사본에 검은색 글자를 썼다. 
 
그러나 포스터나 간판, 벽화 등 거리와 야외에서 크게 시선을 사로잡는 글자들은 인도의 색채 찬란한 환경에 자연스럽게 조응했다. 이런 풍경을 일상으로 접하는 인도인들에게, 글자란 근본적으로 ‘흑과 백 사이’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우다야의 반박은 타당했다.  
 
타문화에의 존중과 다양성의 가치  
북인도의 데바나가리 문자 풍경

북인도의 데바나가리 문자 풍경

북인도의 데바나가리 문자 풍경

북인도의 데바나가리 문자 풍경

남인도의 타밀 문자 포스터photoⓒUdaya Kumar

남인도의 타밀 문자 포스터photoⓒUdaya Kumar

한국인도 노선 비행기는 한산했다. 국제선인데 좌석이 절반 넘게 빈 듯 보였다. 주변 분들은 나의 인도행을 걱정하며 인도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과 경험을 알려주고 싶어하셨다. 인권의식이 낮고, 위험하고 비위생적이며,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독특한 사고와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업무상 협업을 한 분들이 넌덜머리를 내셨다.
 
나는 그 마음이 이해되어 경청하는 한편, 우리 사회가 이질성에 대한 면역력이 낮다고도 생각했다. 타인이 나에게 해를 미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질적이더라도 타인의 기호를 존중해야 한다. 자신의 기호와 어긋나는 것에 관용을 갖기란 어렵더라도 말이다. 
 
인도는 한 마디로 단정짓기 어려운 나라다. 일단 북인도와 남인도가 크게 다르고, 지역마다 인종과 역사와 풍속이 다르다. 공용어만 해도 스물두 가지나 되고, 문자는 열세 종류에 이른다. 또 종교는 얼마나 많고 힌두교의 신들은 얼마나 북적대는가. 
 
인도 작가 살만 루슈디는 저서 『한밤의 아이들』에서 “인도는 인도인들의 수만큼 많은 모습을 지녔”고, “신들의 수가 사람 수와 맞먹는다”고 했다. 루슈디의 말대로 이렇게 온갖 종교의 ‘신들이 한데 얽혀 우글거리는’ 나라라면, 어떤 기이한 일인들 일어나지 못할까 싶다. 
 
나는 인도에서 그 모든 이질적인 것을 기피하지 않고 끌어안고자 했다. 당당함과 우스꽝스러움, 찬란함과 고약함, 섬세한 웅장함과 고달픈 허름함, 온갖 혼란이 소용돌이쳤다. 인도는 탁월한 문명을 이룩했지만, 고유성이 워낙 강해 서구문명과 조화를 이루는 데에 더 애를 먹고 있는 듯 보였다. 
 
이런 혼돈 속에서 우다야 쿠마르처럼 합리적인 질서를 찾고자 하는 인도인들이 있었다. 우다야는 인도의 지역 언어와 문자들이 모바일 등 디지털 매체를 신속히 따라잡지 못해, 로마자에 의해 도태되어 갈 것을 우려했다. 
 
우다야 쿠마르가 디자인한 인도 루피화의 통화 기호

우다야 쿠마르가 디자인한 인도 루피화의 통화 기호

그는 2010년 루피화 통화 기호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인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데바나가리 문자의 (Ra)와 로마자 대문자 R을 결합시킨 디자인이었다.
 
데바나가리의 고유한 특성인 윗줄 쉬로레카를 드러내면서도, 세계의 다른 기존 통화 기호들과 조화를 이루어 편의를 갖추도록 했다. 특정 종교, 지역, 세대에 치우치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고, 국제화의 명목으로 토착 문화와 일상이 희생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우다야의 가치관이 고스란히 반영된 디자인이다. 
 
대학의 타이포그래피 기초 과정에서, 나는 여전히 학생들이 색채에 앞서 기하학적 비례와 형상에 집중하게끔 교육한다. 하지만 이렇게 한정된 경험을 전부라고 여겨, 타인이 나름의 타당성을 갖춰 쌓아온 이질적인 세계에 대해 섣불리 훈시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도 당부한다. 
 
자칫 완고해지려 드는 마음을 경계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우다야 쿠마르와 그의 강연을 생각한다. 그리고 인도의 색채 찬란한 글자들을 떠올린다. 세계에는 글자에서 무엇보다도 색채를 적극 끌어안는 문화 역시 존재한다. 
 
 
유지원 :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저술가·교육자·그래픽 디자이너. 전 세계 글자들, 그리고 글자의 형상 뒤로 아른거리는 사람과 자연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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