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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3월의 할머니와 윤동주, 그들의 말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휴먼다큐멘터리의 작가로 일할 때 만났던 거의 모든 할머니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내 살아온 얘길 다 하려면 책 열두 권도 모자란다고. 모습은 다 달랐지만 하나같이 파란만장했던 할머니들의 사연은 내 삶의 적지 않은 자산이 되었다. 심지어 내가 직접 만난 것도 아니고 매체를 통해 잠시 보았을 뿐인데 마치 긴 얘기를 나눴던 것처럼 기억되는 그런 할머니도 계시다. 얼마 전 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그렇다. 노수복 할머니. 그 이름을 떠올린 순간 이미 많이 늦은 것 같은 예감에 폭풍 검색을 했는데, 너무 많이 늦었다. 할머니는 이미 7년 전 태국의 한 요양원에서 이미 세상을 뜨셨다고 한다.
 
1942년 스물한 살이던 그녀는 부산 근교의 우물터에서 빨래를 하다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다. 3년 뒤 해방되던 해 수용소를 탈출했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돼버렸다고 생각했다.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태국 남성과 결혼했지만 위안부 생활의 후유증으로 아이를 갖지 못해 행복한 가정을 이어가진 못했다. 그렇게 살아 환갑을 훌쩍 넘긴 1984년, 그녀의 존재는 한 매체를 통해 비로소 우리에게도 알려졌다.
 
위안부 생존자 노수복 할머니.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녀는 사십여 년 만에 고향에 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상태였다. 아리랑 노래는 기억했지만, 할 줄 아는 말은 부모 형제 이름과 고향과 ‘어머니’ 정도였다. 무섭고 치욕스런 기억을 피하려는 무의식이 과거의 많은 걸 잊게 만든 것 같았다. 그래도 할머니 손톱엔 봉숭아물이 들어있었는데, 그게 그때 나에겐 더 애잔하게 느껴졌다. 봉숭아물을 들이던 추억을 잊지 못하듯, 할머니 가슴 깊은 곳엔 여전히 많은 추억과 사랑과 어머니의 기억이 남아있을 텐데, 그걸 말로 표현하지 못하니 얼마나 안타까울까 싶었다. 할머니가 할 줄 아는 몇 마디 말들이 그래서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때 그 할머니의 말들을 생각하면, 요즘 우리의 말들은 여러모로 너무 지나친 것 같다. 자극적 설정과 파괴적 대사로 분노의 감정을 부추기고 있는 막장드라마가 웰 메이드 드라마보다 높은 시청률을 얻는가 하면, 정가에선 이슈를 만들기 위한 막말정치를 전략으로 선택하고 있다. 인터넷상의 혐오 표현은 익명성에 기대 더욱 파괴적이다. 그럴수록 더 강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일단 내뱉고 보자는 식의 자극적인 말들은 일차적으로 그 자신부터 망가뜨린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내가 쓰는 말과 글은 곧 내 사유의 수준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진짜 힘이 센 말은 진실을 밝히는 올바른 말, 상대에 공감하는 따뜻한 말이다. 그런 말들이 진짜 아름다운 말이다. 시인 윤동주가 별을 헤며 하나씩 떠올렸던 것들도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들이었나. 추억, 사랑, 쓸쓸함, 동경, 시,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 모국어로 글을 쓰는 일조차 쉽지 않았던 일제강점기의 그 어둠 속에서도 시인이 결코 잊지 않고 되새겼던 것은 그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말들이었다.
 
다시 3월 1일이 다가온다. 여전히 충분한 보상도 위로도 받지 못한 채 허망하게 떠나고 있는 그 할머니들을 생각한다. 그분들이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것, 최후까지 기억하고 간직하려 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손톱 끝에 남아있던 봉숭아 꽃물처럼 노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잊지 못했던 고향의 추억과 모국어 몇 마디를 다시 떠올려 본다.
 
만약 내가 이제까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사용해왔던 말들을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느 날 어떤 이유로 하나씩 다 잊어가게 된다면, 내 가슴 속에 제일 마지막까지 남는 건 무엇일까. 내가 마지막까지 잊지 않고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 그 기억이 최대한 아름다운 것이었으면 좋겠다. 올바르고 아름다워서 강한, 그런 말이었으면 좋겠다.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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