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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좀 인정해달라고

사모키슈-수드콥스카야가 그린 『분신』의 삽화(1895)

사모키슈-수드콥스카야가 그린 『분신』의 삽화(1895)

페테르부르크는 건설 당시부터 수많은 전설과 괴담의 진원지였다. 유령은 귀족들 사이에서 구전되던 이른바 ‘살롱 민담’과 온갖 일화와 잡담의 단골 메뉴였다. 문화학자 로트만은 페테르부르크를 가리켜 “신비하고 환상적인 이야기가가 합법적으로 인정되는 공간”이라 칭하면서 유령 이야기를 수준 높은 문학으로 고양시킨 주역으로 고골과 도스토옙스키를 꼽았다.
 
실제로 도스토옙스키는 두 번째 소설 『분신』에서 마지막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소설에서 유령·분신·환영 같은 초자연적 소재를 즐겨 사용했다. 아마도 그가 좋아했던 호프만이나 고골의 그로테스크한 작품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공병학교라는 특수한 공간도 분명 한몫 했을 것 같다. 
 
공병학교로 사용되던 건물의 원래 이름은 미하일롭스키 성이었다. 1839년 러시아를 방문한 드 퀴스탱 후작은 나중에 여행기에다 “이 성의 어두운 층계와 황폐한 현관은 유령의 집을 생각나게 한다”고 적었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파벨 I세는 항상 암살당할까봐 전전긍긍했다. 역대 황제들이 기거한 동궁에서는 “이상하게 안정이 안 된다”며 모이카 운하와 폰탄카 운하 사이에 새로 황궁을 지은 것도 그 때문이다. 성 주위에 깊게 해자를 파서 도개교를 통해서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서구 중세 기사문학에 빠진 황제의 취향과 암살 공포증을 반영하는 설계다. 
 
황제는 1797년 시작된 성의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당시 건축 중이던 성 이삭 대성당의 현장에서 대리석을 가져다 썼다고 한다. 이런 ‘불경한’ 행위 때문에 성의 프리즈에 새겨진 글자 수인 47이 황제의 수명이라는 소문이 항간에 떠돌았다. 황제는 이 성으로 처소를 옮기고 40일 만인 1801년 3월 11일에 쿠데타로 목숨을 잃었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이후 이곳에서는 매일 밤 정확하게 자정이 되면 손에 촛불을 든 황제의 유령이 나타난다는 괴담이 퍼졌다. 파벨의 암살 후 제위에 오른 알렉산드르 황제는 이 불길한 성을 버리고 재빨리 원래의 동궁으로 돌아갔다. 
 
1822년부터 성은 공병학교 건물로 사용됐고 여기서 도스토옙스키는 1838년 1월부터 1843년 8월까지 5년 반 동안 수학했다. 유령담은 공병학교 학생들뿐 아니라 수많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훗날 레스코프는 성에 관한 소문을 근거로 『공병학교의 유령: 어느 사관 후보생의 회상 중에서』라는 소설까지 썼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의 살롱 민담·괴담·서구 문학의 도플갱어에 당시 유행하던 하급관리 테마를 버무려 두 번 째 소설 『분신』을 집필했다. 주인공은 음산한 페테르부르크의 밤거리에서 툭 튀어나온 흔해빠진 관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대를 앞서가는 대단히 복잡한 인물이다.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문학에 대한 나의 가장 훌륭한 기여”라 자부했던 만큼 인간 본성에 대한 칼날같이 예리한 시선이 돋보인다.
 
샤를레만의 석판화 19세기 중엽의 미하일롭스키성

샤를레만의 석판화 19세기 중엽의 미하일롭스키성

오늘날의 미하일롭스키 성. 현재는 박물관이다.

오늘날의 미하일롭스키 성. 현재는 박물관이다.

내가 원하는 나를 보여주고 싶다 … 시대를 앞서간 주인공
『분신』의 핵심은 불안이다. 주인공 골랴드킨은 불안의 하중을 견디다 못해 분열되고 붕괴되는 개인의 비극을 보여준다. 비극의 밑바닥에는 비정한 사회와 인간의 내적인 부조화가 뒤얽혀있다. 인간의 불합리한 본성은 사회라는 거대 기구로부터의 자극에 예측을 불허하는 온갖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분열은 가장 극단적인 방식 중의 하나다. 
 
골랴드킨은 평범한 관리다. 부자는 아니지만 극빈자도 아니다.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못생기지도 않았다. 직장에서의 그의 위상 역시 대단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모욕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만일 무언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골랴드킨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상대적 박탈감’이다. 자신보다 더 높은 사람, 더 잘난 사람에 비해 초라하다는 것이 그를 주눅 들게 한다. 누군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정체를 알아차릴까봐 두렵고, 아는 사람과 만나면 공연히 숨어버리고 싶어진다. “내가 아니고 놀랄 정도로 나랑 닮은 다른 사람인 척할까?…그래 나는 내가 아니야.” 
 
때로는 상대가 묻지도 않는데 방어벽을 치기도 한다. “저도 제가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그걸 안타깝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바닥까지 내려간 자존감은 종종 망상을 동반한다. “저에게는 적이 있답니다. 저를 파멸시키려고 맹세까지 한 아주 사악한 적들이랍니다.”
 
자격지심과 인정 욕구 사이의 가느다란 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던 골랴드킨은 한 가지 결정적인 사건으로 인해 나락으로 추락한다. 직장 상관의 집에서 딸의 생일을 축하하는 무도회가 열리는데 그는 초대받지 못한 것이다! 자괴감과 수치심으로 뒤범벅이 된 그는 판단력을 잃고 무도회장으로 돌진한다. “다들 가는데 왜 나만 못 가?” 
 
막아서는 하인들의 눈을 피해 몰래 무도회장에 들어간 그는 한바탕 난동을 피우다 망신만 톡톡히 당한 채 길바닥으로 쫓겨난다. 텅 빈 거리에 홀로 버려진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숨어버리고 싶었고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눈비가 몰아치는 11월의 거리로 마치 누더기 뭉치처럼 내팽겨쳐진 바로 그날 밤, 그는 무너진다. 그는 자신의 분신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골랴드킨과 똑같이 생긴 분신은 그와 똑같은 옷을 입고 사무실에 출근까지 한다. 놀랍게도 직장 동료들은 골랴드킨이 둘이나 있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새로 온 관리를 ‘골랴드킨 2호’라 부를 뿐이다. 
 
소심하고 우울하고 무능한 골랴드킨과는 정반대로 골랴드킨 2호는 기민하고 활발하고 명랑하고 유능하다. 그가 늘 꿈꾸었던 ‘내가 아닌 나’의 모습이다. 그러나 “내가 아닌 나”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언제나 나 자신이다. 사무실 사람들은 모두 골랴드킨 2호를 좋아한다. 골랴드킨 2호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진짜 골랴드킨의 위상은 곤두박질친다. 사악한 분신은 그를 조롱하고 경멸하고 억압하고 위협한다. 공포에 사로잡힌 골랴드킨은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깊이 망상의 늪 속으로 가라앉고 마침내 정신병원으로 이송된다. 
 
골랴드킨의 비극 저변에는 관료사회의 고질적 병폐가 깔려 있다. 관등만이 모든 것의 척도인 사회는 인간을 하나의 성능으로 축소시킨다. 성능의 복제판들이 끝없이 생겨나 인간을 밀쳐내고 ‘인간 2호’, ‘인간 3호’로 세상이 채워진다. 
 
“골랴드킨 씨가 발자국을 뗄 때마다 그와 똑같이 닮은 골랴드킨 씨들이 땅 속에서 솟구치듯 튀어나왔다. 쌍둥이들은 생겨나는 즉시 거위의 행렬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쇠사슬 모양으로 달려왔다. 행렬은 점점 더 길어져서 골랴드킨 씨 뒤를 절뚝거리며 쫓아왔다. 이 똑같은 인간들로부터 벗어나 도망갈 곳은 없었다. 가여운 골랴드킨 씨는 공포로 인해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똑같은 사람들이 끝도 없이 생겨났고 마침내 도시는 똑같은 사람들로 꽉 차버렸다.” 
 
물론 관등사회만이 가짜 정체성을 부추기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눈을 의식한 정체성 위장은 때로는 존재감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자의식이라는 이름으로 심리 소설의 여러 페이지를 채워왔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것이 도가 지나치면 장애가 된다. 분신은 주인공의 내면에 있는 온갖 심리적 장애들의 총집합이자 인간 불합리성에 대한 생생한 증거다. 지위에 대한 갈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자기 비하도 커진다. 골랴드킨 2호는 욕망과 자격지심 사이의 깊은 골에서 탄생한 환상이다. 내면의 열등의식이 허세와 자존심을 부채질할 때 불안은 과대망상으로 폭발한다. 골랴드킨의 분열은 제정 러시아의 관등사회를 훌쩍 넘어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섬뜩하다.
 
“불분명하고 모호” 두 번째 작품에 쏟아진 혹평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지만 때로는 현실이 소설을 흉내 내기도 한다. 『분신』의 출간 이후 도스토옙스키는 골랴드킨처럼 극도의 불안을 맛보아야했다.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의 대대적인 성공 덕분에 과도하게 부풀려진 자기 이미지가 원흉이었다. 갑자기 천진난만할 정도로 교만해진 그를 문인들은 거의 집단 따돌림 수준으로 냉대했다. 투르게네프는 친구와 함께 풍자시를 써서 “러시아 문학의 낯짝에 솟은 여드름”이라고 그를 조롱했다. 게다가 데뷔작 못지않은 후속작을 써야한다는 중압감이 그를 짓눌렀다. 도스토옙스키는 “『분신』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열 배는 더 훌륭한 작품이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독자와 평론가 대부분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다”고 혹평했다. 
 
도스토옙스키를 그토록 칭찬했던 평론가 벨린스키도 『분신』에 대해서는 사뭇 비판적이었다. “불분명하고 모호한 작품”이라고 폄하하며 “가장 큰 단점은 판타스틱”이라고 지적했다. “‘판타스틱’이 있어야 할 자리는 정신병원이지 문학이 아니다. 그건 의사의 소관이지 시인의 소관이 아니다.” 
 
하지만 벨린스키는 도스토옙스키만큼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보지는 못한 것 같다. 골랴드킨에게는 적도 없고 음모도 없다. 그것은 피해망상이다. 그러나 적을 느끼고 음모를 느낄 정도의 불안은 실재하는 현실이다. 분신은 ‘판타스틱’이지만 분신을 볼 정도로 불안한 의식은 현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가장 보편적인 현실, 모두의 내면에 존재하는 현실을 집어냈다. 골랴드킨은 그의 말대로 그가 “가장 먼저 발견하고 가장 먼저 예고한 인간 유형”이었다. 
 
 
석영중 :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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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