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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 왜 기대나, 고교까지 기금 굴려 돈 버는 미국

[투자은행의 세계] 기금 운용의 교과서 ‘예일 모델’ 
모바일 메신저 스냅챗의 모회사 스냅이 지난해 3월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되면서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인 28세의 에반 스피겔은 억만장자에 올랐다. [사진 iStock]

모바일 메신저 스냅챗의 모회사 스냅이 지난해 3월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되면서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인 28세의 에반 스피겔은 억만장자에 올랐다. [사진 iStock]

“우리의 오랜 투자는 마침내 오늘 결실을 맺었습니다.”
 
지난해 3월 미국 소셜미디어 기업 스냅이 상장되던 날, 스냅의 최초 투자자로 참여했던 한 기관의 대표가 구성원들에게 보낸 서한의 서두다. 이 투자자는 2012년에 스탠포드대 기숙사에서 초라하게 시작한 스냅에 과감하게 투자했고, 5년 후 대박을 터트렸다. 1만5000달러의 투자금을 무려 2500만 달러로 불린 성공이었다. 그런데 이 투자가 시장의 시선을 끈 것은 천문학적 수익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투자자의 정체가 더 큰 뉴스거리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기관투자가가 아닌 미국 캘리포니아의 사립고등학교 세인트 프란시스가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서한은 그 학교 교장이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보낸 것이었다.
 
사실 고등학교가 스타트업에 기금(endowment)을 투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아무리 기금 운용이 활발한 미국이라고 해도 흔치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미국의 고등학교가 이 정도라면 대학은 얼마나 적극적으로 돈을 굴릴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기엔 충분한 사례다. 애써 적립한 기금 10조원을 손실에 대한 우려로 값싼 예금으로 놀리면서 등록금과 정부 지원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립대학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예일대 기금 73%를 대체 투자에 배분
기금은 학교, 병원, 종교 단체 같은 비영리 기관이 기부금 등을 초기 투자금으로 삼아 운용하는 펀드라고 보면 된다. 투자 원금은 손대지 않고 운용 결과로 벌어들인 수익으로 기관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원칙이다. 특히 미국 대학이 운용하는 기금은 규모 면에서 웬만한 기관투자가를 압도한다. 2017년 6월 기준으로 기금 규모 상위 10개 대학이 2020억 달러(약 216조원)를 운용하고 있고, 그 외에도 10억 달러 이상 기금을 보유한 대학이 80개가 더 있으니 글로벌 자산 시장의 큰손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10억 달러 이상의 대형 기금을 운용하는 대학들은 대학 운영 예산의 3분의 1 이상을 기금 운용으로 조달한다. 전체 예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기금이 수익을 올리지 못하면 그만큼 원금을 털어서 학교 운영에 보태야 하는 구조다. 기금 의존도가 높은 미국 대학은 퇴직자와 닮은꼴이다. 둘 다 생활하기 위해 자금을 굴려 고정 이자던 자본 이득이던 돈을 벌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원금 손실을 피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 대학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고정 이자가 보장되는 채권·예금으로 기금의 대부분을 운용했다. 그 후 1980년대 들어 자본 이득으로 눈을 돌리면서 주식 투자 비중을 늘려 주식 60%, 채권 30%, 예금 10%라는 당시 평균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게 된다. 하지만 투자 대상은 미국 국내 종목, 그것도 쉽게 사고팔 수 있는 유동성 좋은 종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데이비드 스웬슨 예일대 기금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지난 30년 동안 연평균 12.5%의 수익률을 올리며 기금을 270억 달러로 늘렸다. [블룸버그]

데이비드 스웬슨 예일대 기금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지난 30년 동안 연평균 12.5%의 수익률을 올리며 기금을 270억 달러로 늘렸다. [블룸버그]

이렇게 보수적으로 운용되던 대학 기금은 1980년대 중반부터 큰 변화를 맞게 된다. 대학 기금은 물론 어느 기관 투자가도 여태껏 시도해 보지 않았던 파격적 운용 전략인 이른바 ‘예일 모델(Yale Model)’의 탄생이 계기가 됐다. 예일 모델은 월가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와 살로먼 브라더스를 거친 데이비드 스웬슨이 1985년에 예일대 기금 최고투자책임자(CIO)로 임명된 후 고안해낸 기금 운용 모델이다. 이제는 기금 운용의 교과서로 통하는 스웬슨 CIO의 예일 모델은 30여 년 전 50억 달러던 기금 규모를 270억 달러로 성장시켰고, 같은 기간 동안 연평균 12.5%라는 높은 수익을 안겨줬다.
 
예일 모델의 핵심은 포트폴리오 이론에 충실한 장기 투자다. 목표 수익률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최저 리스크의 조합에 맞춰 각 자산군에 분산 투자하는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운용한다. 투자하는 자산군은 매우 다양하다. 전통 자산군인 주식·채권 투자는 물론이고 부동산, 헤지펀드, 사모펀드, 벤처캐피털, 천연자원 투자 같은 대체 투자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예일 모델의 가장 큰 특징은 대체 투자가 전체 포트폴리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2018년 자산 배분 계획 기준 73%). 시장 참가자가 적어 유동성이 떨어지는 탓에 저평가된 대체 투자 자산에 집중 투자해 장기 보유한다. 스웬슨 CIO가 “대형 기금의 투자 기간은 100년 단위”라고 말한 것처럼, 일반 금융기관과 달리 초장기 투자가 가능한 대학 기금의 특성을 100% 활용한 것이 예일 모델의 대체 투자이다.
 
스타트업 투자는 대체 투자의 좋은 예다. 예일대 기금은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 링크트인 등에 초기 투자자로 이름을 올려 스타트업 성공 신화의 과실을 함께 나눴다. 그 밖에도 초장기 투자의 본보기인 삼림(forest) 투자를 꼽을 수 있다. 지난 20년 동안 뉴햄프셔주 삼림 1만 에이커를 사들여 목재 사업 등으로 매년 수익을 내고 있다.
 
예일 모델은 자산 운용의 아웃소싱을 추구한다. 자산 배분과 리스크 관리 업무 등을 제외한 자산별 운용은 외부 전문가에게 맡긴다. 냉정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거래 비용을 더 지불하더라도 효율성과 전문성을 강조하는 구조다. 특히 대체 투자에 방점을 찍은 예일 모델은 숨겨진 투자 대상을 발굴하기 위해서 투자은행, 사모펀드 등의 글로벌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정보력과 분석력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금융회사들도 명문 대학 기금과 장기적 비즈니스 관계를 맺는 데 열심이다. 단순히 거래에서 벌어들이는 경제적 이익을 넘어서 대학 기금의 명가 예일대가 선택한 회사라는 명성을 마케팅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정된 장기 투자금도 유치하는 셈이니 VIP 대접을 하는 게 당연하다.
 
 
직접 운용한 하버드, 금융위기로 휘청
대학 기금 운용에 있어 예일대의 전통적 맞수는 하버드대다. 기금 규모 면에서 370억 달러로 전세계 기금 중 최대 규모다. 하버드대는 프린스턴대, 컬럼비아대 등 다른 아이비리그 대학들과 함께 일찍이 예일 모델을 벤치마킹했고, 운용 실적에서 예일대와 선두 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두 대학의 명암이 갈렸다. 대체 투자 위주의 포트폴리오 운용이라는 큰 틀은 같았지만 기금 운용 방식의 차이가 작용한 결과였다.
 
가장 큰 차이는 조직 구조다. 하버드대는 예일대의 아웃소싱 전략과는 다르게 자회사인 하버드매니지먼트컴퍼니(HMC)를 세우고 직접 기금 운용에 뛰어들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금 운용 주체인 HMC가 외부 전문가와 내부 조직을 함께 활용하는 ‘하이브리드 모델’이다. 조직 운영도 매우 공격적이었다. 1990년부터 2005년까지 하버드대 기금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잭 메이어 당시 최고경영자(CEO)는 HMC를 투자은행이나 헤지펀드처럼 운영했다. 복잡한 파생상품 거래를 마다하지 않았고, 회사 내에 차익거래 등 단기 트레이딩 수익을 추구하는 헤지펀드를 만들 정도였다. 잘나가는 트레이더를 비싼 값에 스카우트한 것은 물론이고, 성과급 잔치도 벌였다. 이처럼 트레이딩 하우스를 표방했던 HMC는 금융위기 이후 겪은 후유증도 월가 투자은행 급이었다. 2005년 이후 임시직을 포함해 6명의 CEO가 교체된 HMC는 자체 운용을 줄이고 직원을 해고하는 등 구조조정이 아직까지 진행 중이다. 반면, 스웬슨 CIO는 여전히 건재하게 예일 모델을 구현하고 있다.
 
사실 예일대나 하버드대 같은 대형 기금이 아니면 전문 조직을 두고 자체적으로 기금을 운용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자산 운용에 있어 중요한 규모의 경제, 그리고 효율성 측면에서 불리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학들도 분명 여기 속한다. 게다가 기금 운용을 대하는 자세는 극도로 보수적이다. 과연 우리나라 대학들은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기금의 ‘풀링(pooling)’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기금들의 투자금을 기금 운용 전문가가 통합 관리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아웃소싱CIO(OCIO)가 그런 역할을 한다. 기관 투자가가 지향하는 투자 철학 및 목표에 따라 맞춤 운용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산운용업이다.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 대학들은 아직 선택지가 많지 않다. 2015년에 시작된 ‘민간 연기금풀’ 정도가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다. 민간 연기금풀은 정부 주도로 도입된 중소 연기금 위탁 운용 제도로 지난해 포항공대가 대학 중 최초로 1조1000억원을 맡기기도 했다. 대학 기금 운용의 도약을 위해서도 가능한 많은 대학들의 민간 연기금풀 참여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세제 혜택 등 정부의 인센티브를 고려해 볼 수 있다. 민간 연기금풀을 통해 대학들은 포트폴리오 투자에 익숙해질 기회를 갖게 되고, 또 참여자가 많다는 사실은 적극적인 기금 운용의 정당성을 대학들에 제공해줄 것이다. 
 
 
최정혁
전 골드만삭스은행 서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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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