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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읽기] ‘내가 왕년에 … ’라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김수영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출판인

김수영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출판인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된다. 종로서적에서 큰마음을 먹고 예쁜 노트를 하나 구입했다. 노트의 구석구석에 나무와 과일과 사랑의 하트와 해와 달과 별이 가득했다. 단색으로 된 단순한 그림들이었지만 어린 내 가슴은 왜 그리도 세차게 뛰었는지. 나는 새 노트를 펼쳐 한 페이지에 한 문장씩 여러 위인들의 명언을 적어갔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류의 상투적인 말도 있었고, ‘실패는 인생의 피상성을 사정없이 부수어버리는 망치이다’와 같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출처를 알 수 없는 괴이한 문장들도 있었다. 그 외에 어떤 말들이 있었는지 많이 생각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노트의 맨 앞에 큰 글씨로 적혀 있던 문장, 내가 제일 좋아했던 문장은 잊을 수 없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이었다.
 
왜 그 말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졸지에 머리를 박박 밀고 검은 교복을 입은 청춘이 그런 문장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또한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언젠가 학교는 불타오를 것이고 지구는 멸망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저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학교로 나가 하루를 견뎌야 했다.
 
정작 스피노자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크게 상관없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의 가수 이름을 잘못 알았다고 해서 노래가 싫어지는 건 아니니까. 다만 지금의 나에게 이 문장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 말을 지어낸 이는 유쾌한 농부였으리라. 그는 아마도 사과나무 심는 일을 좋아했을 것이다. 내일 비가 오면 어떻고, 바람이 불면 또 어떠랴. 사과나무를 심으며 장차 여기에 달릴 사과를 상상하고 그 풍성한 소출을 사랑하는 가족들과 같이 나눌 일을 계획했을 것이다. 그 문장이 중학교 2학년의 나에게는 엄중한 의무를 노래하는 행진곡이었다면, 지금의 나에겐 자기 내면의 행복과 상상의 기쁨을 노래하는 유쾌한 찬가이다.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요사이 부쩍 많이 생각하게 된다. 분명한 건 앞으로 남은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이를 통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기 어려워진다. 많은 계획들은 당연히 이미 내 앞을 지나갔다. 이를테면 결혼 계획이 그러했고 아이를 가지는 계획이 또한 그러했다. 내 경우만 해당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부동산 투자 계획과 창업 계획이 그러했다. 여기에 더해 꺼내 들었다가 슬그머니 바닥에 내려놓는 일들의 목록도 쌓여만 간다. 낡은 기타를 잡고 몇 번 쳐보다 마음이 동해서 다시 배울 수 있는 학원을 알아보았으나 이내 접고 말았다. 조금 더 잘 쳐서 이제 뭘 어쩌자는 건지. 물론 요새 말할 수 없이 바쁘기도 하고.
 
결국 이 모든 일이 앞을 길게 내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선이 자꾸 지난 일로 향하고, 결국 술자리에서 “내가 왕년에” 화법을 자주 구사하고 싶은 유혹을 참기 어려워진다. 장래 계획을 세우기 어려워지면 기준을 마련하기 힘들어져서 마음 속 여러 일들 사이의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 데에 애를 먹는다. 그러니 눈에 띄는 일들을 닥치는 대로 처리하면서 단순히 생존 증명 혹은 생존 의지 증명을 시도하게 된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이를 “분주한 게으름”이라 표현한 바 있다. 그의 독설에 따르면, 이런 이들은 아침에 일찍 나가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오는 개미 같은 삶을 살고 있는데, 도대체 뭘 하며 살고 있는지 물어도 대답도 못 하면서, 심지어 길에서 가끔 마주 오는 다른 사람을 들이받아 자신도 넘어지고 남도 넘어뜨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면서 하루 종일 남들을 만나러 돌아다니지만 정작 자기 자신과는 한 번도 제대로 만나지 않는다는 데에 이런 삶이 가지는 비극의 핵심이 있다고 그는 주장한 바 있다.
 
올해 또다시 여러 일을 계획하고 있다. 그건 무엇인가 변화를 시도하는 일이고 일의 결과를 즐겁게 상상하는 일이다. 또한 변화를 추구하는 내 자유를 경험하며 내 가장 소중한 욕구와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주 장기적인 계획도 자꾸 마련해볼 생각이다. 별것 아닐 수 있지만, 인생에 이런 것 말고 또 다른 무슨 별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오늘도 내 사과나무를 심으러 나간다. 세웠던 계획을 지우고 다른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지만, 시선을 앞으로 두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설이 이제 막 지났다. 한 해의 일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데에 양력이면 어떻고 음력이면 또 어떤가. 올 한 해 모두의 정원에서 사과나무가 탐스러운 결실을 맺길 빈다.
 
◆약력
연세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 철학 박사. 전 문학과지성사 대표. 전 한국출판인회의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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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