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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총사』 작가 뒤마 아버지, 유럽 최초 흑인 4성 장군 … 나폴레옹보다 더 존경받아

[김환영의 지식 톡톡톡] 『블랙 카운트』로 퓰리처상 받은 톰 리스 인터뷰
올리비에 피샤 할아버지가가 그린 알렉상드르 뒤마. 유럽과 미국 통틀어 4성 장군 자리에 오른 첫 흑인이다. 뒤마 박물관 소장. [사진 영림카디널]

올리비에 피샤 할아버지가가 그린 알렉상드르 뒤마. 유럽과 미국 통틀어 4성 장군 자리에 오른 첫 흑인이다. 뒤마 박물관 소장. [사진 영림카디널]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유명한데 이름이 같으면, 둘을 구별할 때 ‘아버지·아들’을 이름 앞에 붙인다. 예컨대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로 미국의 제41대(조지 HW 부시), 제43대(조지 W 부시) 대통령을 구분한다. ‘아버지 뒤마(Dumas père)’, ‘아들 뒤마(Dumas fils)’도 같은 경우다. ‘아버지 뒤마’인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1802~1870)는 『몽테크리스토 백작』 『철가면』 『삼총사』로 유명하다. ‘아들 뒤마’인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1824~1895)는 『춘희』 『사생아』 『방탕한 아버지』 『금전 문제』와 같이 ‘부인과 어린이의 바른 권리를 주장하고 남성과 금력(金力)의 횡포를 경계하는 작품’으로 필력을 자랑했다. 주세페 베르디(1813~1901)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1853)’는 뒤마의 『춘희』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하지만 우리는 ‘할아버지 뒤마’인 알렉상드르 뒤마(1762~1806)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아들·손자와 달리 문인이 아니라 군인이었던 할아버지 알렉상드르 뒤마는 놀라운 인물이다. 할아버지 뒤마를 부활시킨 인물은 『블랙 카운트(Black Count)·검은 백작』를 쓴 미국 전기 작가 톰 리스(Tom Reiss·53)다. 그는 자료를 찾기 위해 카리브해·유럽·중동을 샅샅이 뒤졌다.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전기·자서전 분야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 책은 한국어(『검은 몽테크리스토』) 등 20개 언어로 번역됐다.

 

하버드대를 1987년에 졸업한 톰 리스는 바텐더·록밴드 ·배우 생활을 거친 후 1989년 휴스턴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글쓰기를 배웠다. [사진 로버트 페퍼]

하버드대를 1987년에 졸업한 톰 리스는 바텐더·록밴드 ·배우 생활을 거친 후 1989년 휴스턴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글쓰기를 배웠다. [사진 로버트 페퍼]

할아버지 뒤마는 아이티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이티는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식민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몰락한 프랑스 후작, 어머니는 흑인 노예였다. 할아버지 뒤마의 아버지는 프랑스로 돌아갈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들 알렉상드르를 노예로 팔았다가 얼마 후 다시 사들인다. 14세에 프랑스에 온 할아버지 뒤마는 최고의 교육을 받는다. 프랑스군에 이등병으로 입대했다. 장교가 될 수 없는 경력을 가졌지만 프랑스 혁명(1789~1799) 덕분에 할아버지 뒤마는 1793년 4성 장군이 돼 5만3000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그는 유럽이나 미국을 통틀어 4성 장군 자리에 오른 최초의 흑인이다. 미국은 1975년에야 최초의 흑인 4성 장군을 배출했다. 미 공군의 대니얼 제임스 2세(1920~1978)다.
 
할아버지 뒤마는 ‘반혁명분자’로 몰리기도 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그를 시기했다. 왜소한 나폴레옹과는 달리 그는 기골장대(氣骨壯大)했다. 키가 182㎝를 넘었다. 할아버지 뒤마의 인생이 오늘의 세계에 전달하는 메시지가 궁금해 톰 리스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들이 할아버지 알렉상드르 뒤마에게 배울 것은 무엇인가.
“그는 인생에서 만난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다. 그가 살았던 세상의 정치체제는 지금 못지않게 혼란스러웠다. 모든 게 불확실한 고위험(high-risk)시대였다.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서 그는 노예의 아들이자 귀족의 아들로 인생을 헤쳐 가야 했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전향적·열정적·긍정적 자세로 사는 법을 터득해 난국을 돌파했다. 그는 형편없는 장비를 탓하지 않고 알프스를 넘었다. 전투에서 패하면 정치인들이 그를 문책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운명이었다. 실수는 곧 처형을 의미했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이 포기하고 주저앉을 상황에서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고 두려움을 물리쳤다. 그는 정치 상황에 굴하지 않고 영웅이 됐다. 인생을 최대한(maximum)으로 살았다. 결코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았다. 항상 빠져나올 방법이 있다고 믿었다.”
 
 그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었을까.
“믿기 힘든 그의 힘의 원천은 그가 아이티와 프랑스라는 두 문화 중에서 그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었다는 데서 나왔다. 그는 모든 사람과 잘 지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적들조차 그를 존경했다. 그는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었으며 희망과 위엄을 잃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배운 교훈은 용기와 적응 능력의 힘이다.”
 
한국에서도 아버지 뒤마와 아들 뒤마는 유명하다. 하지만 할아버지 뒤마의 전기를 읽을 필요에 대해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한국인들이 역사와 신화·전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나는 놀라운 한국 영화를 통해 알게 됐다. 내 책은 사실에 기반한 역사와 신화·전설을 『블랙 카운트』라는 한 권의 책으로 완벽하게 결합했다. 한국인들은 역사 시대를 촘촘하게 재구성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내 책을 좋아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세계는 지금 긴장감이 극에 달해 있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나는 한국이 그러한 긴장감의 측면에서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알렉상드르 뒤마 장군은 모든 이들에게 영감을 준다.”
 
할아버지 뒤마의 야심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가. 그는 프랑스 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그럴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대 문제는 그가 나폴레옹과 경쟁 관계에 놓였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나폴레옹은 그를 싫어했다. 나폴레옹과 그가 이집트를 침공했을 때 이집트 사람들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전열의 맨 앞에서 병사들을 이끄는 알렉상드르 뒤마가 프랑스군 지휘자라고 착각했다. 나폴레옹은 탁월한 전략가·전술가이자 사상가였지만, 사람들은 나폴레옹보다는 뒤마를 더 사랑하고 따르고 존경했다. 뒤마는 영감을 주는 리더였다. 알렉상드르를 시기한 나폴레옹은 그를 항상 견제했다. 어쩌면 알렉상드르는 황제가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인물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부분적으로는 알렉상드르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나폴레옹은 1802년에 1794년 폐지됐던 노예제뿐만 아니라 인종주의를 프랑스 제국에 다시 도입했다.”
 
당신은 할아버지 뒤마가 아버지 뒤마의 작품인 『몽테크리스토 백작』 『철가면』 『삼총사』에 모티브를 제공했다고 논증한다. 아버지 뒤마는 네 살 때 할아버지 뒤마가 사망하자 “아버지를 죽인 신(神)을 죽이러 하늘로 가겠다”고 했다는데 할아버지 뒤마는 손자인 뒤마 피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가.
“그렇다. 그는 파리에 할아버지의 조각상을 건립했다. 그는 할아버지의 업적을 프랑스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뒤마를 오늘의 역사 속으로 부활시킨 것은 내 책이라고 자부한다.”
 
 이 책이 퓰리처상을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혀 예상하지 못 했기 때문에 수상 소식에 깜짝 놀랐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전문가들의 이해조차 완전히 바꾼 역사학책이라는 점과 일반 독자층이 두껍다는 점이 동시에 작용했다고 본다. 나는 이 책을 쓰기 위해 7년 동안 연구했다. 하버드대 등 전 세계 대학에서 교재로도 채택됐다. ‘영감을 주는(inspirational)’ 자기계발서처럼 읽히기도 한다. ‘내가 읽은 역사책 중에서 내가 좋아하게 된 책은 이 책 한 권이다’라는 분에 넘치는 말도 들었다.”
 
전기 작가가 된 계기가 있는지.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우리집의 선대(先代)는 히틀러 나치의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이다. 가족사가 전기 작가의 길로 인도했다. 집안사람들 다수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사망했다. 미국 이민에 성공한 집안 어른들의 파란만장한 탈주기를 기록하다가 역사 속 개인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결국 전기 작가가 됐다. 서울이나 뉴욕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는 역사를 깊게 접할 기회가 별로 없다. 전기 읽기가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사회의 아웃사이더(outsider)이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은 유럽과 중동 전역에서 미국으로 왔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떠나 새 삶을 시작했다. 유대인들을 포함해 모든 아웃사이더에게는 힘이 있다. 아웃사이더는 사회를 외부와 내부라는 두 개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이티 출신 알렉상드르도 코르시카 출신 나폴레옹도 아웃사이더라는 게 공통점이다. 외부 압력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 시작해야 하는 아웃사이더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이다. 나 또한 내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망각한 적이 없다. 정체성을 잊지 않는 데서 힘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거대한 창의성이 한국에서 분출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또한 정체성 갈등을 창의적으로 사회에서 승화하려는 한국인이 노력이 원인 것 같다. 창의성을 발휘하려는 사람은 결코 편안할 수 없다. 벼랑 끝까지 몰려야 한다.”
 
『블랙 카운트(Black Count)』는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언제 나오는가.
“아마도 2019년이다. 지금 영화를 찍고 있다.”
 
한국 독자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
“내가 지금 있는 곳은 뉴욕 인근에 있는 코리아타운이다. 나는 곧 한국 친구들과 코리안 바비큐를 먹으러 갈 것이다. 내가 한국 음식과 한국 문화를 좋아한다고 독자들에게 알려 달라.”
 
 
김환영 지식전문기자
kim.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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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