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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 남녀는 베개 1개만 …” 남자의 말에 눈빛 묘해진 천즈슈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68>
단란했던 시절의 창수훙과 천즈슈. 가운데가 딸 샤나. 1939년, 윈난(雲南)성 쿤밍(昆明).

단란했던 시절의 창수훙과 천즈슈. 가운데가 딸 샤나. 1939년, 윈난(雲南)성 쿤밍(昆明).

돈황(敦煌)에 온 창수훙(常書鴻·상서홍)은 처음 막고굴(莫高窟) 접한 감회를 회고록에 남겼다. “굴 앞은 양 떼들의 방목지였다. 천하의 보물이 가득한 동굴은 가관이었다. 해만 지면 떠돌이 상인들의 노숙지로 변했다. 벽화도 성한 곳이 없었다. 어느 동굴이나 그랬다. 감격을 가누기 힘들었다. 앞으로 할 일 생각하니 어깨가 무거웠다.”
 
부인 천즈슈(陳芝秀·진지수)의 실망은 말할 것도 없었다. 창수훙과 따로 귀국해 돈황에 오기까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일본군의 공습으로 피범벅이 된 적도 있었다. 돈황에 도착한 후, 한동안은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에서 조각을 공부한 사람답게 석굴 속의 조각에 도취했다. 창수훙과 함께 수년간 파리·런던·암스테르담·피렌체의 교회와 박물관 다니며 본 부지기수의 조소(彫塑)들은 모두 단색이고, 조형(造型)도 그게 그거였다.
 
천즈슈의 눈앞에 펼쳐진, 당(唐) 왕조 전성기의 채색 조소들은 서구의 것들과 차원이 달랐다. 천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변색을 피할 수 없었지만, 본 모습은 여전했다. 신체 비율이나, 생동감 넘치는 용모, 유려하게 흘러내리는 선과 문양은 보면 볼수록 황홀했다.
 
천즈슈는 높은 사다리에 앉아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내려오면 온몸이 진흙투성이였다. 생활 조건도 열악했다. 주식과 땔감은 물론, 식용유와 소금 구하기도 어려웠다. 양고기 먹기도 힘들었다. 사 오는 도중에 부패해 버렸다.
 
허구한 날 부부싸움이 벌어졌다. 딸 샤나(沙娜·사나)가 중간 역할을 잘했다. 대디자이너로 성장한 샤나가 8순을 앞두고 부모의 성격을 말한 적이 있다. “엄마는 강남의 유서 깊은 부잣집 딸이었다. 유럽 생활을 잊지 못했다. 외출할 때 치파오(旗袍)와 굽 높은 신발, 얼굴 손질은 필수였다. 루즈도 고급만 썼다. 음식도 아무거나 입에 대지 않았다. 아버지는 정반대였다. 아무 옷이나 입고, 한데에서도 잘 잤다. 피곤이 최고의 잠자리라는 말을 자주했다. 배고플 때 먹는 밥이 제일 맛있다는 말 했다가 엄마에게 핀잔받은 적이 많았다. 엄마는 성격이 불같았다. 화나면 아버지 안경도 집어던졌다. 아버지는 지독한 근시였다. 허둥대는 모습이 어린 내가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우리 집에는 먹을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가끔 작은 봉지에서 사탕 꺼내 준 기억은 난다. 워낙 오래된 물건이라 딱딱하지가 않았다. 씹으면 금방 부스러졌다. 빨리 삼킬 수밖에 없었다. 더 달라고 하면 야단을 쳤다. 씹지 말고 물고 있어라. 빨리 먹으면 배탈 나고 치아도 상한다. 어처구니없는 이유지만,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엄마와는 거의 매일 싸웠지만 내가 보채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치곤 했다.”
 
돈황의 겨울은 무미건조하고 추웠다. 천즈슈의 마음도 얼어붙었다. 창수훙은 집안일에 관심이 없었다. 눈만 뜨면 동굴로 달려가고 오밤중에 돌아왔다. 딸이 중학교에 들어가건 말건 신경도 안 썼다. 며칠 후에 계란빵 한 개 선물하며 미안해했다.
 
새로운 동굴을 발견, 새끼줄로 입구의 토사(??沙) 덩어리를 제거하는 돈황예술 연구소 연구원들. 1953년, 돈황.

새로운 동굴을 발견, 새끼줄로 입구의 토사(??沙) 덩어리를 제거하는 돈황예술 연구소 연구원들. 1953년, 돈황.

봄이 되자 새로운 총무주임이 부임했다. 젊고 잘 생긴 항저우(杭州) 출신이었다. 창수훙은 “우리 집사람도 항저우 사람”이라며 집으로 초대했다. 총무주임은 사냥이 취미였다. 직접 잡았다는 양 한 마리 끌고 소장 집을 방문했다.
 
천즈슈는 고향 사람 만났다며 좋아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진한 농담이 오갔다. 총무주임이 “객지에서 고향 남녀가 만나면 편하다. 베게도 1개만 있으면 된다”고 하자 천즈슈의 눈빛이 묘해졌다. 눈치 없는 창수훙은 둘이서 무슨 말 하건 말건 제 할 일만 했다.
 
연구소 내에 요상한 소문이 퍼졌다. 제일 늦게 안 창수훙은 격노했다. 엉뚱한 소리 하고 다니는 놈이라며 총무주임을 내쫓았다. 총무주임은 씩 웃으며 돈황을 떠났다. 며칠이 지났다. 천즈슈가 중병을 호소했다. 란저우(蘭州)에 가서 치료받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창수훙은 몸보신하고 가라며 양 한 마리를 잡았다.
 
제자 둥시원(董希文·동희문, 신중국을 대표하는 화가.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화인민공화국 선포식을 유화로 남겼다.)이 편지 한 통 들고 창수훙을 찾아왔다. 천즈슈가 총무주임에게 보낸 편지였다. 누가 봐도 둘 사이를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창수훙은 사막을 질주했다. 천즈슈를 만나기만 하면 달랠 자신이 있었다. 란저우 가려면 안시(安西·안서)를 거쳐야 했다. 안시의 여관을 깡그리 뒤졌다. 아무나 붙잡고 “예쁘게 생긴 여자 봤느냐”고 물었다. 소득이 없었다.
 
낯선 사람이 창수훙에게 말했다. “천즈슈가 어떤 남자와 함께 위먼(玉門) 쪽으로 가는 걸 봤다.” 위먼은 란저우와 반대 방향이었다. 창수훙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위먼 쪽으로 말을 몰았다. 위먼을 코앞에 두고 낙마했다. 석유 탐사 중이던 지질학자들이 발견하는 바람에 사경에서 헤어났다. 농장에서 3일간 휴식을 마친 창수훙에게 농장주인이 란저우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내밀었다. 천즈슈 명의로 된 두부 한 모 만한 성명이 실려 있었다. “나 천즈슈는 창수훙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한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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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