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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핵 얘기 못할 거면 평양 가지 마시라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9세 김여정이 문재인 대통령과 토요일 오찬에서 “이른 시일 내 평양에서 뵈었으면 좋겠다. 대통령께서 통일의 새 장을 여는 주역이 되시길 바란다”고 했는데 마치 어른이 아이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듯한 말투 같았다. 김정은과 김여정이 그리는 통일이라는 게 최대치로 하면 태극기와 대한민국을 버리라는 것이요, 최소치라 해도 ‘우리 민족끼리’ 정신으로 김씨 일가가 지배하는 북한의 가난과 반인권, 공산체제를 존중하라는 얘기다. 김정은의 친서와 김여정의 표정엔 핵무력 완성자의 도도함이 묻어 났다. 재래식 도발이나 일삼던 그들의 아버지와 다른 느낌이었다.
 
한국의 대통령이 김여정 방식의 통일 주역이 되길 바라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우리 유권자는 핵 가진 북한에 굴종하고 김정은 남매에 끌려다니는 대통령을 원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의 평양 초청에 대해 “앞으로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 나가자”고 답했다. 애매모호하다. 신중하기보다 자신감이 없거나 눈치를 본다는 인상을 줬다. “미국과의 대화에 북한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는 답변도 우리가 솔선해서 할 일은 없다는 식의 수동적 자세다. 과연 그게 최선의 답변이었나.
 
문 대통령이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김정은 위원장께서 핵무기를 포기하는 민족적 결단을 내려 주시면 좋겠다. 핵은 미국과 일본에 앞서 한국을 겨냥하고 있는 것 아니냐. 이른 시일에 평양에 가서 이 문제를 논의하고 싶다”고 하지 않은 게 아쉽다. 정상회담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되 회담 의제로 핵 폐기 문제를 명확하게 내놓는 메시지다. 김정은이 핵을 버려야 할 첫 번째 이유로 미국이 아닌 한국에 대한 위협을 명시하는 게 요체다. 핵은 사실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의 문제였다. 이 메시지엔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와 진실이 담겼다. 진실은 핵보다 무섭다. 문 대통령은 오찬에서 활달하고 상상력 넘치는 처신을 했어야 했다. 미국한테든 북한한테든 ‘여건’ 운운하며 ‘미·북 대화 좀 해 달라’고 어정쩡하게 말할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정상회담이 이뤄지려면 남북 간에 사전 의제 논의가 있을 텐데 김여정만큼 위력적인 메신저는 없다. 그만큼 핵 포기 얘기가 빠진 문재인-김여정 오찬은 뼈아프다고 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 옆자리에 앉았던 임종석 비서실장, 정의용 안보실장, 서훈 국정원장, 조명균 통일부 장관의 보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아마 그들은 핵 얘기를 꺼내면 김여정의 표정이 사납게 바뀌며 남북 정상회담 논의가 그 자리에서 중단될 수 있다고 우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여정 앞에서 꺼내지 못한 핵 얘기를 김정은한테 가서 꺼내긴 더 어렵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비상한 각오와 결심으로 김정은에게 핵을 포기하라고 말할 자신이 없으면 문 대통령은 평양에 안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김정은이 문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한 가장 큰 이유는 평창 잔치가 끝난 뒤 바로 시작할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다. 올림픽을 이유로 일시 중지됐던 한·미 훈련을 한 번 더 연기시켜 시나브로 영구 중단에 이르게 하겠다는 구상이다. 한·미 간 불신과 갈등이 깊어져 한국이 결사 반대하면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군사적 옵션을 꺼내들 수 없으리라는 계산이 깔렸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의 다음 수순은 뭘까. 정상회담을 수락한 뒤 남북대화 분위기를 명분으로 한·미 훈련과 선제 북폭을 하지 말라고 미국에 요청하는 것이다(예상이 틀리기 바란다). 만약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 북한이 한국을 미국 공격의 방패막이로 삼는 구조가 완성되고 한·미 동맹은 해체될 수도 있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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