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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인생샷] 50 넘어 상담사 된 날 아들이 준 감사패

기자
더오래 사진 더오래
58년 개띠, 내 인생의 다섯컷 (36) 이방애

한국 사회에서 '58년 개띠'는 특별합니다. 신생아 100만명 시대 태어나 늘 경쟁에 내몰렸습니다. 고교 입시 때 평준화, 30살에 88올림픽, 40살에 외환위기, 50살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고도성장의 단맛도 봤지만, 저성장의 함정도 헤쳐왔습니다. 이제 환갑을 맞아 인생 2막을 여는 58년 개띠. 그들의 오래된 사진첩 속 빛바랜 인생 샷을 통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봅니다.

 
2남 4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나던 날, 아버지는 또 딸이라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쇼트커트 머리에 남자 옷만 입고 자랐다. 남동생을 보려고 남자같이 입혔고, 남동생이 태어난 후로는 먼저 입고 물려주려고 남장으로 자랐다.
 
이 사진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찍은, 내가 가진 가장 어릴 적 사진이다. 겨우 기른 단발머리에 처음으로 부모님이 사주신 꽃무늬 원피스를 입었다.
 
남아선호사상이 짙었던 집안 분위기 속에서 원하지 않았던 딸로 태어난 것을 알았고, 나를 낳은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해드리겠다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공부도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열심히 했다.
 
또 인정받기 위해 칭찬받을 일을 찾아 하는 눈치 빠른 아이로 자랐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담임 선생님이 교실 앞에 한 줄씩 나와서 인사하고 자기 이름을 칠판에 쓰라고 했는데, 못 쓰는 아이가 태반이었지만 나는 가슴에 단 이름표를 보고 칠판에 거꾸로 본 그대로 이름을 쓰는 재치를 보일 정도였다.
 
고등학교 시절,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언니한테 빌린 나팔바지를 사복으로 멋지게 차려입고,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친구들과 가위바위보를 하는 모습이다.
 
여행 경비가 없어 수학여행을 못 갈 뻔 했는데, 직장에 다니던 둘째 언니가 비상금을 털어 줘 갈 수 있었다. 제일 친하게 지내며 서로를 위로했던 5인방이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연락이 모두 끊겼다. 이 글을 보게 된다면 꼭 연락이 닿았으면 한다.
 
여행 마지막 날 밤에는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며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난다. 가난한 상황에서 아빠가 항상 바람피우고 엄마한테 되레 큰소리 치시던 모습을 보고 자라 그게 너무 슬펐다. 어려운 경제 사정에 육 남매 키우는 모습 등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은 웃음이 나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부모님은 내가 이런 아이인 줄 모르실 텐데 고등학생이 술을 마셨다는 자책감에 친구들한테 "난 나쁜 애야" 하면서 엉엉 울었다.
 
평범한 결혼 생활 속에 아이를 낳고 안주하며 지내던 중 친정엄마가 고혈압으로 64세에 갑자기 쓰려져 돌아가셨다. 이어 내 앞길을 가로막는다며 미워했던 남동생이 34살 신혼 중에 간 경화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항상 경쟁자였던 남동생. 아들인 동생보다 내가 더 부모님께 인정받으려고 몸부림쳤던 나 자신의 삶이 허망하게 느껴지며 깊은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를 즈음 IMF가 터졌고, 남편이 부도를 내고 빚 독촉에 시달리며 거리에 나앉게 됐다.
 
남편은 신용불량자가 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집은 경매에 넘어갔다.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상황이 되니 내가 돈을 벌 수 없는 무능력한 여자임에 더 좌절했다. 지갑에 단돈 천 원이 없어 아들 학교준비물도 못 사 보내고 대성통곡을 하며 평생 빚 갚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했다.
 
몸과 마음이 지쳐 기도하던 중 '돈 때문에 죽고 싶다면 돈 대신 가진 것 중 무엇과 바꿀 것인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남편? 아이들? 건강…? 나는 돈과 바꿀 수 없는 더없이 소중한 것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세상을 살아갈 자신감이 생겼다. 신문모집공고를 뒤적이던 어느 날 동아 출판사에서 초등학습지 판매지부장을 뽑는다고 광고를 보게 됐다.
 
며칠 후 면접을 보러오라는 전화가 왔고, 면접관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며 잘 해보라고 격려해줬다. 한 달 연수 기간에 모범생 표창까지 받고 광명지부장으로 사무실을 열었다. 좋은 실적으로 사무실을 넓혀주는 혜택도 받았지만, 남편이 함께 편의점을 해보자는 말에 직장을 그만두었다. 24시 편의점이 막 생기는 때라 경쟁점도 없었고, 학생과 젊은이에게 인기가 있어 예상외로 장사가 잘됐다.
 
빚 갚는 재미로 10년쯤 일하다 보니 슈퍼아줌마(?)로 계속 살아가는 내 모습에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라도 공부해서 전문가로 평생 직업으로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건강검진에서 남편이 갑상샘암과 위암이 발견되면서 병간호와 가게운영, 집안일을 병행하며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다시 삶을 포기하고 싶은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일찍 철들어 엄마, 아빠를 위로하는 아이들을 보고 ‘그래. 이제 나 이방애는 죽었다. 엄마로서만 살아가자’고 마음을 다져 먹고 다시 힘을 냈다.
 
다행히 남편이 완치판정을 받았다. 더 늦으면 안 되겠기에 야간 전문대를 거쳐 사이버대 편입해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면서 상담사 자격증까지 독하게 공부했다. 
 
주부로서 몸과 마음이 힘들었지만, 희망이 있었기에, 또 묵묵히 열심히 일하는 남편과 공부하는 엄마를 배려해주며 아이들이 잘 자라주었기에 가능했다. 50이 훌쩍 넘은 나이에 사회복지기관에서 전문상담사로 당당히 전문가로 취직이 되던 날 밤에 나는 조용히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항상 엄마와 아빠를 위로하며 자랑스러워하던 아들이 어느 날 우리 부부를 불러 앉히더니 나에게는 팔찌를, 남편에게는 운동복을 선물로 주며 감사패를 주었다. 아들이 엄마, 아빠를 제일 존경한다며 감사패를 읽을 때 우리 가족 모두는 기쁨과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2012년 고등학교로 옮겨 전문상담사로 일하면서 몸과 마음의 건강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 또다시 야간대학원에 진학해 심신치유교육학 석사졸업을 했다. 나 자신을 치유하며 다른 이의 아픔을 덜어주는 상담사의 일에 보람을 느끼며 살고 있다. 고등학생들을 상담하면서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자주 해주게 된다. 어느 이론이나 상담기술보다도 내 이야기에 학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상담실을 나선다.
 
남편과 아들, 며느리, 5살 된 손녀와 딸, 사위, 4개월 된 손녀. 요즘은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가정을 이루고 예쁘게 사는 애들을 보면, 힘들었던 고비를 잘 견뎌온 지난날에 대한 보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여자로 태어난 운명을 원망도 해보았지만, 이제는 열심히 잘 살아온 나 자신이 사랑스럽다. 이제 8월이면 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게 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많은 일이 있기에 또 다른 설렘으로 남은 삶을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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