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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분석]'졸속' 재판 우려…미궁 빠진 역사교과서

현재 고교생이 사용하고 있는 한국사 검정 교과서. 정부는 지난해 국정 역사교과서를 폐기하면서 2015 개정교육과정 적용 시기를 2020년으로 연기하고 1월까지 기본계획을 수립하겠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집필기준 시안도 마련하지 않았다.[중앙포토]

현재 고교생이 사용하고 있는 한국사 검정 교과서. 정부는 지난해 국정 역사교과서를 폐기하면서 2015 개정교육과정 적용 시기를 2020년으로 연기하고 1월까지 기본계획을 수립하겠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집필기준 시안도 마련하지 않았다.[중앙포토]

2020년부터 중학교·고등학교에서 쓸 역사 교과서가 지난 정부의 국정교과서처럼 시간에 쫓겨 ‘졸속 교과서’의 재판이 될 우려가 나오고 있다. 교육부가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에 의뢰해 마련 중인 검정 역사교과서의 교육과정과 집필기준 시안 마련이 당초 정부의 계획보다 길게는 6개월까지 늦춰질 가능성이 높다. 
 
교육부는 지난해 국정 역사교과서를 폐지하면서 올해 1월까지 검정 역사교과서 개발을 위한 기본 계획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 집필기준 확정은커녕 평가원의 정책연구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교육부는 지난 6일 낸 보도참고자료에서 ‘평가원은 정책연구진이 개발한 시안을 제출하는 대로 내부심의회를 통해 수정·보완해 평가원 시안을 만들어 3월 중 교육부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교육부는 평가원 시안을 토대로 교육부 시안을 만들어 교육과정심의회 심의·자문을 거쳐 교육부 교육과정과 교과서 집필기준을 확정하게 된다. 
 
하지만 정책연구진의 집필기준 시안에서 기존의 ‘자유민주주의’가 ‘민주주의’로 바뀐 점,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의 노력을 집필기준에서 강조하는 과정에서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적 서술’ 등의 내용이 담기지 않은 점이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 쟁점화할 경우 집필기준 확정은 최악의 경우 6월 지방선거 이후로까지 늦춰질 수도 있다.  
 
평가원이 지난해 12월 공개한 교과서 개발 일정에 따르면 당초 계획에선 올해 1월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을 확정·고시하게 돼 있다. 이를 토대로 민간출판사들이 1월부터 12월까지 1년에 걸쳐 검정도서를 개발하면, 12월부터 내년 9월까지 검정심사를 진행하는 일정이다.

'졸속추진' '깜깡이 집필'로 논란이 됐던 국정 역사교과서도 집필에는 13개월이 이뤄졌다. [중앙포토]

'졸속추진' '깜깡이 집필'로 논란이 됐던 국정 역사교과서도 집필에는 13개월이 이뤄졌다. [중앙포토]

그런데 집필기준 확정이 3월로 늦춰지면 민간 출판사들의 교과서 제작 기간은 9개월, 집필기준 확정이 6월로 늦춰지면 제작 기간이 6개월로 줄어들 수도 있다. 이는 과거의 역사 교과서보다 상당히 줄어든 기간이다. 지난 2009 개정교육과정 당시엔 한국사 교과서 개발에 16개월, 2015 교육과정에 맞춘 동아시아사나 세계사 교과서 개발에 12개월이 주어졌다. ‘졸속추진’ ‘깜깜이 집필’ 등으로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았던 국정 역사교과서도 13개월 동안 집필이 이뤄졌다.
 
집필 기준 확정이 늦춰진 기간 만큼 민간출판사의 교과서 제작 기간을 연장해줄 경우, 그 기간만큼 교과서 검정 기간을 단축해야 해 역시 ‘졸속 검정’이란 비판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자료: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자료: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상반기 집필기준 확정”…집필 기간 반 토막
교육부에 따르면 교육과정과 교과서 집필기준 마련 절차는 통상 10단계로 이뤄진다. 연구진 시안이 마련되면 평가원 내부 심의를 거치고, 교육부에 제출한 이후에도 교육과정심의회에서 심의·의결하는 절차 등을 진행한다. 교육부 박종은 동북아교육대책팀장은 “평가원이 3월까지 시안을 마련해 교육부에 제출하면 집필기준과 관련한 다양한 학계의 의견을 반영하고, 교육과정심의회 심의·자문을 거쳐 상반기 중 집필기준 확정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새로 마련될 집필기준에 따라 제작될 역사교과서는 중학교 ‘역사 1’, ‘역사 2’ 과목과 고등학교 ‘한국사’ 과목, 총 3권이다. 중학교 교사용지도서까지 검정으로 바뀌면서 출판사들이 새로 만들어야 하는 책은 5권이 됐다. 정책연구진의 집필기준 시안이 논란이 되기 전부터 전문가들 사이에선 교과서 개발 기간이 촉박하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자료: 교육부

자료: 교육부

지난해 12월 27일 열린 ‘집필기준 시안 2차 공청회’에 토론자로 참여한 방지원 신라대 교수는 “교과서 검정 기간을 축소·조정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며 “특히 중학교는 4권의 교과서를 서둘러 집필하는 과정에서 자칫 불량교과서가 양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또 올해부터는 집필기준을 간소화해 검정심사의 중요성이 커졌다. 집필기준을 상세하게 제시하는 것이 교과서 집필에 상당한 제약을 준다는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대주제별로 최소한의 기준만 제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2015 집필기준은 성취기준별(중학교 역사 44개, 고교 한국사 27개)로 집필방향과 집필유의점을 각각 5개, 3개 항목을 제시했지만, 정책연구진의 시안은 대단원(중학교 역사 12개, 고교 한국사 4개)별로 집필 방향만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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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기준을 확정한 이후의 과정도 문제다. 정책연구진의 시안에서부터 진보와 보수의 이념논쟁이 불거지고 있어 하나로 의견을 모으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대체한 것, 집필 기준상에서 6.25 전쟁의 침략 주체를 밝히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낙연 부총리가 지난 5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자유민주주의’와 ‘6.25 남침’ 등이 삭제된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변하고, 교육부에서 “문제가 되는 내용에 대해 수정·보완하겠다”고 밝히면서 일단락된 것처럼 보이지만 불씨는 살아있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은 제각각이다. 도면회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민주주의는 통치의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인지 여부를 나타내는 말이고, 자유주의는 사회 체제를 어떻게 운영할 것이냐의 문제다. 민주주의에 굳이 자유를 붙여 쓰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명희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고친 것도 그렇고, 근현대사를 민주화 운동권의 역사로 공식화하려는 움직임이 보여 걱정스럽다. 집필기준에서부터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야 좌편향된 교과서가 나오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역사학자들은 교과서 집필기준 논란이 진영 간 대립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장옥자 서울대 명예교수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가 도대체 뭔지 묻고 싶다. 단어 하나 갖고 진영 만들어 싸움을 벌이는 게 누구를 위한 행동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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