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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에 모두 차려먹던 프랑스, 코스 요리 선생님은 러시아

[비주얼 경제사] 오트 퀴진의 완성
그림1 아브라함 보스, ‘성령기사단을 위한 왕의 만찬’, 1633년

그림1 아브라함 보스, ‘성령기사단을 위한 왕의 만찬’, 1633년

그림1은 1633년 루이 13세가 퐁텐블로 성에서 개최한 만찬의 모습을 묘사한다. 종교전쟁이 한창이던 16세기에 성령기사단이 설립됐는데, 이제 새로 50명의 기사를 확충한 것을 기념해 만찬이 열린 것이다. 인상적인 점은 요리를 담은 수많은 접시들이다. 테이블을 빼곡히 채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테이블 모서리를 넘어설 정도다. 오늘날의 전형적인 프랑스 만찬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오늘날이라면 개별 참석자 앞으로 시종들이 요리를 순차적으로 날라주는 방식, 즉 코스식 요리였을 것이다. 서양 만찬문화에 보편적으로 퍼져있는 코스식 접대방식이 17세기에는 프랑스의 국가적 만찬행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요리는 어떤 역사적 변화를 거쳤을까?
 
프랑스 역사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인물 중에 카트린 드 메디시스(그림2)가 있다. 카트린은 여인으로서는 드물게 다방면에서 시대적 변화를 이끈 인물이었다. 이탈리아의 거대 금융가문인 메디치 출신으로, 1533년 프랑스의 왕자 앙리 공과 정략결혼을 하게 됐다. 당시는 가톨릭과 위그노, 즉 구교도와 신교도 간의 갈등이 한창 고조되던 시기였다. 카트린은 프랑스의 종교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러 극적으로 폭발한 이른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사건에 등장한다. 1572년 딸 마르그리트가 나바르의 앙리(훗날의 앙리 4세)와 혼인하는 것을 계기로 가톨릭이 위그노 지도자와 교도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파리에서 시작된 피의 물결은 전국으로 퍼져 사상자가 무려 만 명에 이르는 대참사로 확대된다. 이 참혹한 학살의 배후에 카트린의 계략이 있었다고 일부 역사가들은 주장한다. 만일 카트린이 배후 조종자였다면 그녀는 프랑스 사회를 폐쇄적이고 불관용적으로 만든 장본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대혁명 진행되며 레스토랑 확산
그림2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초상화, 1547~1559년

그림2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초상화, 1547~1559년

그러나 카트린이 프랑스 역사에 끼친 또 다른 영향은 이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펼쳐졌다. 다른 나라와의 문화 교류와 개방화를 선도했던 것이다. 카트린은 프랑스로 시집올 때 이탈리아에서 많은 요리사와 시종들을 데려왔다. 이때까지 단조로운 식단과 식사 문화를 지녔던 프랑스 궁정에서 이들은 엄청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이때 발생한 변화들로 역사가들은 식사 때 포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 파스타의 유행을 낳았다는 점, 다양한 소스가 등장했다는 점, 상추·아티초크·브로콜리와 같은 채소를 도입했다는 점, 신세계에서 온 토마토와 칠면조를 소개했다는 점 등을 든다. 즉 식사 에티켓이 세련돼지고 소스가 다양해지고 요리 재료가 풍부해졌다. 한마디로 말해 프랑스 요리문화가 개방화되고 고급화됐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탈리아 요리가 프랑스에 소개된 시점이 이보다 앞선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또 포크가 이때 발명된 것이 아니라 긴 진화과정을 겪었다고도 말한다. 그렇지만 카트린이 이들을 유행시킴으로써 궁정과 상류층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후 프랑스 요리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651년에 라 바렌느는 다양한 조리법을 모아 『프랑스 요리사』라는 요리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이후 75년 동안 무려 30판이나 발행될 만큼 인기를 끌었고 영어·독일어·이탈리아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국경을 뛰어넘는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였다. 또 루이 14세 때 왕비가 전문적인 요리학교를 열고 솜씨가 뛰어난 우등생에게 파란 리본을 수여했다. 그림1에 소개된 성령기사단이 제복에 파란 리본을 달았는데 이들의 만찬이 최고 요리의 상징과 동일시된 것이 파란 리본을 수여하게 된 연원이라는 설이 있다. 어쨌든 이 요리학교의 관습이 뿌리를 내렸고 ‘코르동 블뢰(cordon bleu)’는 실력이 출중한 요리사에 주어지는 영예로운 칭호가 됐다. 한참 후인 19세기 말 이 이름을 딴 전문 요리학교가 설립돼 국제적 명성을 누리게 된다.
 
18세기가 되면 유럽 전역에서 프랑스 요리의 위상이 굳건해졌다. 요리와 향연에 관한 담론은 프랑스어로 소통됐고, 각국 왕실과 상류층이 앞 다투어 프랑스 요리사들을 불러들여 고용하는 게 유행했다. 음식을 전문으로 파는 장소인 ‘레스토랑’이 처음 탄생한 곳도 프랑스였다. 이전까지 사람들이 외식을 할 수 있는 곳은 여인숙과 술집뿐이었는데, 1765년 불랑제라는 인물이 파리에 최초의 근대적인 음식점을 연 것을 계기로 전문 음식점이 확산됐다. 레스토랑의 확산은 1789년에 발생한 프랑스대혁명과 관련이 깊다.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지방에서 파리로 올라온 사람들은 식사를 할 장소가 필요했다. 한편 구체제 하에서 귀족 집안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은 귀족 세력의 몰락에 따라 새 일자리를 찾아 나서게 됐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수요와 공급이 만나 레스토랑이라는 요리 시장을 형성했다. 이후 다양한 음식점이 등장하고 종류가 분화해 수많은 고객의 배고픔을 채우고 미각세포를 만족시켜갔다.
 
 
모자 주름 101개는 달걀 조리 방법의 수
그림3 러시아식으로 준비된 만찬 테이블, 1880년경.

그림3 러시아식으로 준비된 만찬 테이블, 1880년경.

요리와 만찬의 전문성은 19세기에 이르러 한 단계 더 도약한다. 프랑스 요리를 고급 문화로 승격시킨 데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이는 마리앙투안 카렘(일명 앙토냉 카렘)이라는 요리사였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과 러시아의 궁정에서도 최고급 요리사로 인정받은 인물이다. 카렘의 업적으로 우선 프랑스 요리를 집대성한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네 가지 기본소스를 정하고 여기에 와인·치즈·허브 등을 넣어 백여 가지 파생소스를 만들었다. 기본 소스에는 프랑스 전통소스 뿐만 아니라 스페인과 네덜란드에서 발달한 소스도 포함시켰다. 이로써 카렘은 프랑스요리가 범 유럽적 대표성을 지니도록 격상시켰다. 또한 그는 페이스트리나 케이크처럼 상대적으로 발달이 덜 됐던 분야에서도 혁신적 요리들을 창안했다.
 
한편 카렘은 요리사의 표준 복장을 확립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는 요리사 복장이 그로부터 연원한 셈이다. 특히 토크라고 부르는 흰색의 높고 둥근 모자는 요리사의 상징과 같은데 이것이 바로 카렘의 발명품이다. 토크의 우선적 기능은 당연히 조리 중인 음식에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토크에 101개의 주름이 들어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요리사가 달걀을 조리하는 방법을 101가지나 알고 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다. 조리법을 마스터한 최고의 요리사라는 직업적 긍지와 자신감을 한껏 담은 상징물인 것이다.
 
카렘의 기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식탁에 차리던 전통적인 서비스 방식을 과감하게 버렸다. 이 ‘프랑스식 서비스’에서는 기껏해야 수프-식사-디저트의 간단한 구분이 있었을 뿐이다. 손님들은 한꺼번에 올라와있는 수많은 요리들을 이것저것 조금씩 맛보는 데 익숙해 있었다. 카렘은 이를 대신해 메뉴에 적힌 순서대로 개별 음식을 각 손님들에게 순차적으로 올리는 코스 방식을 프랑스에 전파했다. ‘러시아식 서비스’라고 불린 이 코스 방식은 음식이 따뜻한 상태로 나온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 많은 식기와 시종이 필요했으므로 주최 측이 부를 한껏 과시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했다. 그림3에서 러시아식 서비스를 위해 차려진 전형적인 식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카렘은 러시아 궁정을 접했던 경험을 살려 러시아식 서비스를 프랑스에 도입했고, 이후 코스 요리는 유럽 만찬문화의 국제적 표준으로 자리를 잡았다. 카렘의 과감한 혁신 덕분에 프랑스 요리는 명실상부 서양 요리문화를 대표하는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오늘날 서구 요리하면 프랑스 요리를 꼽는 게 당연해보이지만, 애초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또한 프랑스 요리가 프랑스인의 손으로만 발전한 것도 아니다. 여러 국가에서 발달해 온 다양한 재료와 조리법과 접대 방법이 프랑스에서 창의적인 융복합의 과정을 거쳐 오트 퀴진(고급요리) 문화로 재탄생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bks21@skku.edu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세계화의 풍경들』『비주얼 경제사』『세계경제사 들어서기』등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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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