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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운전대 잡기’ … 힘 못 갖춰 이이제이 못했다

[세상을 바꾼 전략]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 옮긴 고종
정동빌딩에서 바라본 ‘고종의 길’(고종이 ‘아관파천’할 당시 이용했던 길)이 눈에 덮혀 있다. 왼쪽 흰 건물은 옛 러시아 공사관의 전망탑. 김경빈 기자

정동빌딩에서 바라본 ‘고종의 길’(고종이 ‘아관파천’할 당시 이용했던 길)이 눈에 덮혀 있다. 왼쪽 흰 건물은 옛 러시아 공사관의 전망탑. 김경빈 기자

지금으로부터 122년 전인 1896년 2월 11일 이른 새벽, 여성용 가마 두 대가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을 나섰다. 가마 일행은 궁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침 7시경 아라사(俄羅斯,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다. 가마에서 내린 인물은 놀랍게도 조선 국왕 고종과 왕태자였다. 이들은 이후 약 1년 동안 아관(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다. 전대미문의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아관파천’은 일본이 조선 왕실을 겁박하던 중에 터진 사건이다. 사실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강조했고, 1894년 오도리 가이스케 일본공사는 고종의 황제 즉위를 제안하기도 했다. 갑오년(1894년) 청일전쟁 와중에 세워진 조선의 친일 내각은 청과 명의 연호를 폐기하고 대신에 조선 개국을 기점으로 계산하여 1894년을 개국 503년으로 표기했다. 또 ‘주상전하’ ‘왕비전하’ ‘왕세자저하’ 등의 호칭을 각각 ‘대군주폐하’ ‘왕후폐하’ ‘왕태자전하’ 등으로 바꿨다.
 
일본이 청일전쟁 승리 후 랴오둥 반도를 할양 받았다가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 간섭으로 청에 반납하자 조선 내에서도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막으려는 거일인아(拒日引俄)책이 부상했다. 이에 을미년(1895년) 8월(음력) 일본인 무리가 경복궁에 난입하여 그 핵심 인물로 여겨진 민왕후를 처참하게 살해했다. 그리하여 1894년에 시작됐다가 잠시 중단된 갑오개혁은 을미사변 이후 다시 추진되었으며 이는 3차 갑오개혁 또는 을미개혁으로 불린다. 양력 및 연호의 사용은 을미개혁 조치 가운데 하나였다. 밝은 미래와 양력 사용을 시작한다는 뜻의 ‘건양’을 연호로 하여 1896년부터 양력을 사용했다.
 
하지만 왕후 시해와 단발령 등으로 일본 및 김홍집 내각에 대한 조선의 민심은 매우 나빠졌다. 이범진과 이완용 등은 일본을 견제할 열강이 필요하다고 봤고, 카를 베베르 러시아 공사가 이에 동조했다. 베베르와 그의 후임 알렉시스 슈페이에르는 함께 서울에 머물면서 ‘아관파천’에 관여했다. 을미사변을 겪은 고종은 신변 안전이 보장되는 거소를 선호했다. 엄상궁(추후 황귀비로 책봉)은 고종에게 폐위 음모가 있으니 궁 밖으로 피신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여 고종이 파천을 결행하게 됐다는 해석도 있다.
 
‘아관파천’ 이전부터 여성용 가마는 궁을 자주 출입하여 친위대원들이 가마 출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아관파천’ 당일에는 일본의 관리하에 있던 친위대 병력 다수가 의병을 진압하러 궁을 비워 고종 일행의 탈출에 어려움이 없었다. 동학농민 사이에서 불렸다는 참요 가사 “갑오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리”에 영향을 받았는지, 갑오년을 보내고 병신년을 며칠 앞둔 을미년 12월 28일(음력)에 ‘아관파천’은 단행됐다. ‘아관파천’ 몇 시간 후 고종은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고, 친일파 대신들은 처형당했거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조선의 국정은 일본을 대신한 러시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러시아는 삼림채벌권, 광산채굴권 등 여러 경제적 이권을 얻었다.
 
조선은 러시아와 동맹 관계를 추진했으나 러시아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시기상조로 판단했고 조선의 분할 지배를 제안했다. 러시아 역시 일본과의 전쟁이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러시아와 일본은 5월 베베르-고무라(일본 공사) 각서, 6월 로바노프(러시아 외무장관)-야마가타(일본 육군대신) 협정에서 조선을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합의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1897년 2월 고종은 환궁하라는 국내외 요구에 따라 경운궁(1907년 고종 퇴위 이후 덕수궁으로 불림)으로 돌아왔다. 8월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바꾸었으며, 10월에는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국호로 선포했다. 또한 2년 전의 을미사변 때 살해당한 민왕후를 명성황후로 추존하고 장례식을 거행했다. 독자적 연호와 황제 즉위 즉 건원칭제는 당시 독립국의 상징이었다. 고종의 황제 즉위는 일찍이 1880년대 김옥균에 의해 주창되기도 했다. 1897년 광무 황제 호칭만으로 대한제국이 진정 독립국이 되었냐는 회의적인 반응도 많았지만, 열강들은 대한제국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물론 속내는 복잡했다. 예컨대 19세기 후반 일본이 조선의 독립과 건원칭제를 주장한 것은 다른 열강의 관여가 없을 때 자국 이익을 관철하기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선을 혼자서 지배할 수 있을 때에는 굳이 조선 독립을 강조하지 않았다. 일본뿐 아니라 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여러 열강도 자국 이익에 따라 조선 독립을 주장하기도 또 반대하기도 했다.
 
‘아관파천’은 외세 예속을 심화했다는 점에서 비판 받는다. 하지만 힘이 없는 상황에서는 외세의 힘이라도 이용하는 것이 외교다. 아관파천은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시도였다. 그런데 먹잇감이 포식자를 이용하여 다른 포식자를 제압하기란 매우 어렵다. 먹잇감을 두고 전개되는 포식자 간의 경쟁 양상은 먹잇감의 뜻대로 잘 전개되지 않는다. 포식자의 공격에서 벗어난 먹잇감은 곧 다른 포식자에게 잡히기도 한다. 포식자 간의 경쟁은 먹잇감을 누가 얼마나 갖느냐는 것이지, 먹잇감을 살려주는 옵션은 대개 없다. ‘아관파천’ 전후 러시아의 관심은 조선의 존속이 아닌, 조선에서의 이익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는 것이었다.
 
이이제이에 성공하려면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당장은 ‘이’를 제압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한들 힘이 너무 부족하면 머지않아 다른 이한테 당하기 쉽다. 중원이 변방의 이민족을 다룰 수 있었던 것도 적절한 수준의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경쟁자의 우열관계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힘, 즉 경쟁자 간의 힘 차이보다 더 큰 힘이 있어야 먹잇감이 아닌 균형자로 부를 수 있다. 군사동맹 결성에는 힘보다 이념 또는 이해관계가 더 중요하다. 비록 힘이 미흡하더라도 이해관계가 서로 보완적이면 강대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약소국에게 이해관계의 파악과 조율은 매우 중요하다.
 
내부 결속은 힘 증대와 이해관계 조율 모두에 필요하다. 약소국이 진정한 독립을 얻으려면 내부가 결속되어야 하는데, 대한제국은 독립을 선포했지만 내부의 힘을 결집하지 못했다. 기존 체제를 그대로 둔 채 힘을 모을 수는 없었다. 내부가 결속되어야 외부와의 연대 및 경쟁에서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일본과 독일이 각각 유신과 통일로 부국강병의 길을 나아가던 동안 조선은 쇄국과 정쟁으로 점철된 망국의 길로 갔다. 국내 세력들은 정파적으로 대립하여 소모전을 펼쳤고, 외세를 동원하여 국내 정적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연이어 나왔을 뿐이다. 뒤늦게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선포로 나름 외교에 의존했지만 근대화든 개방이든 근본적인 부국강병 조치가 없었다. 반면에 일본은 청일전쟁, 영일동맹, 러일전쟁, 미일(태프트-가쓰라)협의 등으로 경쟁자를 하나씩 물리치면서 대한제국을 수중에 넣었다.
 
지금 평창에서는 동계올림픽이 열리고 있다. 또 이를 계기로 올림픽 외교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이 당장은 올림픽 개최로 한반도 외교의 운전석에 앉아 있지만, 올림픽이 끝난 후에는 한국을 배제한 채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이른바 ‘코리아 패싱’이 나올까 하는 우려가 불식되지 못하고 있다. ‘코리아 패싱’은 1988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빼고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일본 언론에서 이를 ‘재팬 패싱’이라고 부른 것에서 따온 말로 추정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영어 원어민들이 ‘코리아 패싱’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코리아 패싱’이라는 말은 100여년 전에도 있었다. 1906년에 출간된 호머 헐버트의 책 제목이 『코리아 패싱(The Passing of Korea)』이다. 여기서 패싱은 오늘날 한국에서 해석되고 있는 건너뛰기가 아닌, 멸망을 의미한다. 건너뛰기가 잦으면 멸망에 이를 수 있다.
 
달리는 차 속에서 가는 방향을 두고 손님들이 위협적으로 승강이를 벌일 때 주인은 차를 직접 운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운전 실력이 좋지 않은 주인은 남에게 의존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약 150년 전 한반도에는 차를 뺏으려는 강도가 주변에 있어도 왼손과 오른손은 서로 협력하지 못하고 오히려 엉켜 싸우기만 하여 강도들이 물건을 뺏어갈 수 있었다. ‘아관파천’은 남이 내 차를 자기 마음대로 운전하고 있어 차 열쇠를 뽑아 다른 남에게 잠시 준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대한제국 선포는 운전대를 직접 잡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주변 열강들은 대한제국 문제를 대한제국과 아무런 상의 없이 정했다. 이른바 ‘코리아 패싱’이었다. 결국 대한제국은 차를 남에게 뺏기고 새 주인의 지시대로 운전하는 기사로 전락했다. 강도와 싸울 실력을 갖추지 못했고, 또 외부 친구나 경찰의 도움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립이든 이이제이든 이는 선언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적절한 자강이 있어야 한다. 만일 균형자적 힘을 보유할 수 없다면,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강대국과 긴밀하게 협력하는 게 나은 전략이다. 자강의 효과적인 방법은 내부 결속이다. 만일 내부의 가치관이 너무 이질적이면, 그 국가는 하나로 존속할 기반을 잃게 된다. 나라를 통째로 뺏겨본 대한제국의 황제와 백성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본다면 어떤 전략을 권할까?
 
 
김재한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 내셔널 펠로.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 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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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