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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초콜릿처럼 깊고 넓은 목소리

이탈리아 출신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의 ‘고풍스런 아리아’ 음반.

이탈리아 출신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의 ‘고풍스런 아리아’ 음반.

이탈리아의 겨울은 따뜻했다. 짧은 일정이지만 로마·피렌체·베니스 등지를 돌아보았다. 퇴적된 시간의 도시들은 하나같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여행자의 눈에 로마는 압도적이었고, 피렌체는 아름다웠으며, 베니스는 눈부셨다. 신을 사랑하는 이들은 로마를, 인간에 관심 있는 이들은 피렌체를 사랑한다고 한다. 내게 인상적인 도시는 베니스였다. 물 위에 뜬 도시. 언젠가는 물 아래로 가라앉게 될 도시. 사라져 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이다.
 
아이들도 베니스를 좋아했다. 좁은 운하 사이를 헤치고 다니는 곤돌라를 놀이동산 기구쯤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현지 베니스 가이드는 “여행의 완성은 자랑하기와 사진 보며 복기(復棋)하기다”라고 했다.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 음악이 빠지니 영 서운하다. 체칠리아 바르톨리가 부르는 이탈리아 노래집에 손이 갔다.
 
그는 내가 클래식의 세계로 들어오기 시작하던 1990년대 초반에 주목받기 시작한 가수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스타인 셈이다. 한국의 젊은 클래식 팬들에게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그러할 것이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의 전설적인 선배 메조 소프라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줄리에타 시미오나토, 피오렌차 코소토 등과 함께 오래 기억될 것이 틀림없다.
 
체칠리아 바르톨리는 어떤 가수보다 개성이 강하다. 이런 독창성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다. 천부적인 연기력과 배역에 대한 친화력, 넓은 음역대와 독특한 바이브레이션, 반쯤 열린 서랍 같은 발성. 아놀드 쇤베르크는 “중도(中道)로 가는 길은 로마로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예술가의 독창성을 강조한 말이다. 이 말을 그에게 적용하면 바르톨리는 이미 오래 전에 로마의 개선문을 통과했다. 실제 로마는 그의 고향이기도 하다.
 
1992년에 나온 앨범 ‘고풍스런 아리아’는 19세기 말 파리소티라는 음악가가 17~8세기 이탈리아 선배 작곡가들의 성악 작품을 모아 놓은 음반이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뒷방 신세였다. 파리소티는 화려했던 이탈리아 바로크의 마지막 기억을 후세에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피아노 편곡 덕분에 우리는 17세기와 19세기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아름다운 보석을 만나게 된다.
 
앨범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곡은 지오다니의 ‘내 사랑(caro mio ben)’이다. 성악하는 이들에게는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같은 곡이다. 바르톨리의 음색은 다크 초콜릿처럼 깊고 품이 넓다. 그는 이 흔한 곡에서도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든다. 감정의 진폭을 크게 끌어가면서 내면의 섬세함을 연출한다.
 
가장 마음을 흔드는 곡은 뒤쪽에 있다. 비발디의 오페라 ‘바자제’에 쓰인 ‘나는 멸시받는 아내라오(Sposa son disprezzata)’다. 원래 지아코멜리가 쓴 것인데 비발디가 무단으로 가져와서 오페라에 넣었다. 요즘 같으면 저작권 위반으로 소송에 걸릴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이런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도입부에서 여섯 개의 팔분음표가 눈이 내리듯 하강한다. 얼어버린 겨울 강가에 서 있는 듯한 상념에 잠긴다. 그의 노래가 풍경에 스며든다. “하늘이시여 내가 무슨 일을 했나이까?”라고 숨죽였다 폭발한다. 이어서 “그러나 나의 심장은”이라고 노래할 때는 깊은 한숨에 하얀 성애가 낀다. 곡 전체를 휘감는 압도적인 몰입감과 섬세한 표현은 가히 최고의 해석이다.
 
CD 한 장을 다 듣고 나니 로마의 트레비 분수 앞에서 찍었던 사진이 보인다. 언젠가 이탈리아에 다시 갈 수 있을 것 같다. 분수에 동전을 몇 개쯤 던졌으니 말이다.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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