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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벽화 276폭 본뜬 장다첸 “무기징역 사는 기분으로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67>
돈황 벽화를 임모하는 장다첸. 1942년 가을, 돈황 막고굴.

돈황 벽화를 임모하는 장다첸. 1942년 가을, 돈황 막고굴.

국민당 정부 교육부는 여론에 밀려 돈황문물연구소 설립을 결정했다. 일본과 전쟁 중이라 배정할 예산이 없었다. 교육부 부장이 소장을 겸했지만 실질적인 업무는 부소장 창수훙(常西鴻·상서홍)의 몫이었다. 인원 선발 등 준비작업에 착수한 창수훙은 돈 때문에 안절부절했다. 중국 현대미술의 대부 쉬베이훙(徐悲鴻·서비홍)을 찾아갔다.
 
쉬베이훙은 격려만 해 줬다. “예술 공작자들은 고행승(苦行僧) 같아야 한다. 온갖 환난 견디며 불경 들고 온,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奬)의 정신을 배워라.” 현실적인 도움은 안 됐지만 창수훙은 이를 악물었다. 회고록에 당시 결심을 남겼다. “쉬베이훙 선생의 말이 맞았다. 나는 민족 예술의 보고(寶庫) 돈황을 보호하고, 정리와 연구에 평생을 바치기로 작정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을 방법이 없다.”
 
창수훙은 자금 마련에 골몰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하루는 오랜 친구의 방문을 받았다. “내가 아는 돈 많은 사람이 네 그림 사고 싶어한다. 네게 잘 말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네 그림 소장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창수훙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시회를 하면 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 수도 충칭(重慶)에서 부인 천즈슈(陳芝秀·진지수)와 부부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목돈이 들어왔다. 천즈슈는 싱글벙글했다. 창수훙이 돈황 갈 준비를 하자 눈물까지 흘리며 만류했다. 창수훙이 “나 먼저 갈 테니 나중에 오라”고 하자 동의했다.
 
돈황 도착 첫날, 제자와 함께 석굴을 답사하는 창수훙. 1943년 3월 24일, 돈황 막고굴.

돈황 도착 첫날, 제자와 함께 석굴을 답사하는 창수훙. 1943년 3월 24일, 돈황 막고굴.

돈황에 가려면 란저우(蘭州)를 거쳐야 했다. 연구소 첫 번째 주비(籌備)위원회가 란저우에서 열렸다. 회의에 참석한 창수훙은 현실을 직감했다. 돈황에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실망한 청수훙에게 베이핑(北平. 지금의 베이징) 예술전문학교 출신 두 명이 돈황행을 자청했다. 노기를 삭힌 청수훙이 한마디 했다. “주먹만한 참새도 오장육부는 다 갖추고 있다. 우리가 그 꼴이다.”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돈황까지는 낙타로 이동했다. 1개월 하고도 4일이 걸렸다. 그간 겪은 고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목적지에 도착한 일행은 화가 장다첸(張大千·장대천)이 와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장다첸은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대화가였다. 본인은 달랐다. 푸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만족감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장다첸도 돈황에 온 이유가 분명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항일 선전에 뛰어들었다. 부족할 것 없는 안락한 생활도 걷어치웠다. 일본군이 베이핑을 점령하기 직전, 친한 기녀(妓女)도움으로 겨우 호랑이 굴에서 탈출했다. 홀몸으로 텐진(天津)과 상하이를 거쳐 홍콩에 도착한 후에야 세 명의 부인과 합류했다.
 
광시(廣西)성 꾸이린(桂林)에 진보적 예술가들이 집결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장다첸은 “쉬베이훙이 와 있을지 모른다”며 꾸이린으로 갔다.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지우(摯友)와 술 한 잔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몇 일만에 헤어졌다. 쉬베이훙은 항일 선전 서화전 열겠다며 싱가포르로 떠났다. 장다첸은 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갔다.
 
장다첸은 충칭에서 둘째 형 장센즈(張善孖·장선자)와 상봉했다. 형제는 시국과 개인의 심사를 한탄하며 날 새는 줄 몰랐다. “나라 꼴이 어쩌다 이 모양이 됐느냐”며 통곡했다. 형이 그림 한 폭을 보여 줬다. 호랑이 28마리가 포효하는 거대한 그림이었다.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제목이 ‘노한 중국의 부르짖음’이었다. 장다첸은 호랑이 28마리가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당시 중국은 28개 성(省)이 있을 때였다.
 
장다첸은 형과 함께 중국 고대의 영웅들을 소재로 한 그림 100점을 완성, 합동전시회를 열었다. 후지산 정상을 노(怒)한 사자 4마리가 짓밟는 초대형 그림을 비롯해, 한결같이 항일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었다. 형제는 한 점도 팔지 않았다. 입장료도 받지 않았다. 누구나 와서 보게 했다. 애국적인 행동에 각계의 찬사가 쏟아졌다.
 
장센즈는 작품을 들고 미국으로 갔다. 전시장에 화교들이 몰려들었다. 저마다 항일성금을 놓고 갔다. 중국에 혼자 남은 장다첸은 고독을 가누기 힘들었다. 젊은 시절, 돈황에서 유출된 그림 모방해서 팔아 먹던 생각이 났다. 갑자기 돈황의 대문을 열고 싶었다. 부인들과 의논했다. “고대 벽화 임모(臨摸)하러 돈황에 가겠다. 다들 같이 가자. 2개월이면 족하다.”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은 안 가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셋째 부인은 호기심이 많은 여인이었다. 장다첸이 눈길을 주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장다첸은 2개월은커녕, 2년 7개월간 돈황에 머물렀다. 황금 5000여 냥 소비하며 막고굴(莫高窟) 벽화 276폭을 임모했다. 창수훙은 장다첸이 기지개를 필 무렵 돈황에 도착했다. 장다첸은 돈황을 떠나는 날, 창수훙에게 충고했다. “무기징역 사는 기분으로 있으면 모를까, 여기는 사람 있을 곳이 못 된다.” 창수훙은 “그러기 위해 왔다”며 웃기만 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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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