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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갈구하는 한반도 종소리, 세계에 울려퍼지다

성기완 교수가 본 개막식
9일 열린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의 한 장면. 고구려 벽화에서 따온 백호와 인면조가 관람객을 모험의 세계로 이끌었다. ‘고구려 패션’으로 장식한 무용수들이 화려한 군무를 펼쳤다. 평창=오종택 기자

9일 열린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의 한 장면. 고구려 벽화에서 따온 백호와 인면조가 관람객을 모험의 세계로 이끌었다. ‘고구려 패션’으로 장식한 무용수들이 화려한 군무를 펼쳤다. 평창=오종택 기자

평창의 문이 열렸다. 하늘은 둥글고(원), 땅은 네모지고(방), 사람은 기우뚱, 세모다(각). 원방각(圓方角). 천지인의 구성 원리이자 한글의 뿌리얼개이기도 하다. 세모들은 뾰족하고 불안하다. 하지만 부딪히는 사이에 얼싸안는다. 각을 이뤄 서로서로 쌓아 올린다. 만남, 맞닿음은 나를 넘어서는 모험이다. 세모는 모험의 주인공이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발원하여 21세기까지 왔다. 여기는 평창이다.
 
2018년 2월 9일 밤 대관령의 벌판이 일순 뜨거워졌다. 잠시나마 평화의 염원 아래 환호하고 얼싸안았다. 평창 올림픽 개막식에서 주인공은 우리 자신이었다. 평화에 주려하는 우리, 끝없는 이별 속에 그리움이 타들어가 벙어리 냉가슴, 한 맺힌 평화를 갈구하는 하얀 옷의 겨레가 우리 아니더냐.
 
행사의 총감독은 송승환이다. 오래전, 파릇파릇하던 때, 연극 ‘에쿠우스’에서 두려움과 분노로 가득 찬 앨런 역을 열연하던 송승환이 떠오른다. 그에게는 무대를 향한 끝없는 열정이 있다. 총연출 양정웅도 그렇다. 내러티브의 인과관계들을 뛰어넘는 비약적인 몸짓과 절규를 통해 관객의 내면을 뒤흔드는 열정적인 연출 스타일이 이번에도 반영되었다.
 
모든 건 소리에서 시작한다.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대산의 상원사 동종을 본 따 만들었다는 평화의 종. 이 종에는 ‘만파식적’을 본뜬 통이 달려 있다. 불 때마다 물결이 잠잠해지고 평화가 찾아왔다고 하는 바로 그 피리. 평화의 종이 울리는 순간 한반도 여러 곳의 종들이 동시에 울린다. 동시다발.
 
강원도 산골 출신 다섯 어린이가 축제를 이끌었다. 어쩜 그렇게 구김살 없이 제집처럼 잘들 노는지. 오행을 상징하는 해나래(불), 아라(물), 푸리(나무), 비채(쇠), 누리(흙)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구려 벽화에서 튀어나온 백호가 아이들을 모험의 세계로 인도한다. 백호의 줄무늬가 백두대간의 산맥으로 변한다. 평화의 대모험이 펼쳐질 지도다. 청룡 현무 주작 등 백호의 친구들이 난무한다. 인면조에 웅녀까지 등장한다. 초반에 동물들이 너무 많이 등장한 건 아닌가. 다소 어수선하다. 서낭당을 가득 채운 만신들이 저마다 자기주장을 한다. 벽화에서 살아 나온 듯 무용수들이 군무를 펼치는데 재현된 고구려 옷이 참 이쁘다. 진태옥, 이영희, 금기숙, 송자인, 한국 패션계의 신구세대가 힘을 합쳐 옷을 지었다.
 
공중부양한 LED들이 반짝거린다. 드론 무리가 빛을 수행한다. 아름다운 한글이 디지털 영상으로 자태를 뽐낸다. 글자체는 안상수체다. 목진요가 담당한 프로젝션 맵핑은 과거와 미래, 전설과 소망이 접속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몫을 해내며 디지털 강국 한국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슬로건인 ‘하나 된 열정(passion, connected)’의 배경에 그 기술이 있다. 그러나 ‘디지털 미래’에 관한 철학은 조금 부족했다. 공존인지 디지털의 지배인지 모를 미래상을 연출해놓고 더 나아가지 못했다. 천지인을 디지털과 이어줄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디지털 맹신. 그것이 우리의 종교일 수도 있다. 4차 산업혁명도 기술만 준비해서는 안 된다. 기술 맹신을 넘는 철학이 필요하다.
 
태고의 빛이 어둠의 경계선에서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태극. 출렁이는 우주. 장고를 든 여인들이 등장한다. 사뿐사뿐 버선 신은 발로 장단을 타는 자태가 어여쁘기도 하구나. 자주치마와 흰 저고리, 자주치마 밑에 남치마. 빨간색 밑에 남색이 환영처럼 섞이며 태극무늬로 어른거린다. 태극기가 입장하고 다문화가정 아이들로 이루어진 레인보우 합창단이 애국가를 부른다. 북한 대표단도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기립하여 경의를 표한다. 한반도기 때문에 평창 스타디움에서 인공기의 물결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인공기를 불태우고 법석을 떨었던 사람들이 그것을 더 부각시켰다. 아이러니가 아릴 수 없다.
 
태극의 곡선은 강이 되고 아리랑으로 이어진다. 고난의 강. 곡조 자체가 첩첩산중을 닮은 ‘정선 아리랑’이 처연하게 울려 퍼진다. 영상으로 맺힌 메밀꽃 환상. 메밀꽃은 민초를 상징한다. 꽃이 촛불로 이어진다. 촛불은 우리의 자랑이다. 이 조용하고 속 깊은 혁명을 이루어낸 우리. 전인권이 이끄는 평화의 가수들이 존 레논의 ‘이매진’을 열창한다. 함께 “나라도 없고 종교도 없는” 무정부 상태를 꿈꿔 본다. 인도의 시타르, 서아프리카의 발라퐁 등 전 세계의 악기가 반주해 준다. 디지털 혁명은 역설적으로 평화의 환상을 가능하게 해줄지도 모른다. 경계도, 제약도 없는 디지털 사회에서 국경의 개념 역시 흐릿해질 것이고, 차라리 그 급진적 모호함이 무정부적 평화의 상태로 연결될 수 있다.
 
주빈국의 대통령 문재인은 평창의 축제와 참 잘 어울렸다. 평화를 향한 그의 염원만큼은 만방에 전해졌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모습에 이준 열사의 환영이 겹쳐 보인다. 맹수 같은 제국주의자들이 각축하던 만국평화회의장이 떠오른다. 이준 열사는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이 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했다. 기약 없는 평화와 힘없는 민족자존은 역사와 접속되지 못했다. 또다시 그럴 것인가. 아베는 평화 만들기를 방해하려고 평창을 찾은 듯했고 미국의 부통령은 남북한이 한반도 기를 들고 입장하는 순간에도 앉은뱅이였다. 잔치에서는 덕담을 하는 게 동양의 미덕이다. 미국은 강대국의 아량을 보여주기는커녕 “내가 여기 온 건 미국을 응원하기 위해서”라는 이기적인 말을 하는 대표를 파견했다. 세계 리더 국가의 속이 이렇게 좁다니.
 
문 대통령의 웃음이 약간은 허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우리 대통령은 북에서 온 대표들과 열린 마음으로 악수했다. 세계가 주목한 것은 미국의 외면이 아니라 이 절박한 악수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평화를 열망하는 악수, 그것뿐인가. 눈물겨웠다. 잡을 수 없는 디지털 비둘기가 날아오른다. 촛불 혁명의 기적처럼 우리는 마침내 하나가 되어 평화를 이루고 말리라. 어느 시인이 썼듯 ‘장사의 몸뚱이처럼 하나’인 우리다. 민족의 기상이 선량한 평화의 염원 속에서 날개를 펴는 그 날을 주저 없이 꿈꾸어 보리라. 행동하는 평화. 우리가 그 일을 해내는 주인공이다.
 
 
성기완
시인, 뮤지션, 밴드 앗싸 멤버
계원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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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