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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다고? En 선생의 손버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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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고 지겨운 일은 따로 있었다.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폭력 폭로 직후 한 남성 선배는 유명 원로시인 이름을 콕 집어서 “왜 문단에선 그의 성추행 폭로가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곤 며칠 후. 바로 그 원로시인을 떠올리게 하는 En선생의 상습 성추행 경험을 묘사한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이 화제가 됐다. 온갖 매체들이 온갖 말들을 쏟아냈다. 그 중 류근 시인의 페이스북 게시글 ‘몰랐다고?’의 한 대목이 콱 박혔다. “60~70년대부터 공공연했던 그의 손버릇을 이제야 마치 처음 듣는 양 소스라치는 척하는 문인들과 언론의 반응이 놀랍고…지겹고도 지겹다.”
 
놀랍고도 지겨운 광경은 쉴 새 없이 펼쳐졌다. 많은 매체들이 지난해 “특급호텔에서 1년간 방을 제공하면 홍보대사가 되겠다”고 했던 최 시인의 언급을 끌어다 묘하게 시인과 호텔을 엮었다. 그 당시 나는 이 시대 가장 일상적이고도 미묘한 공간으로 존재하는 호텔이 최 시인의 언어로 형상화된다면 우리 문학의 시대적 자산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세간의 속된 생각들은 문학적 성취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시인을 특급호텔 밝히는 ‘된장녀’처럼 비난했고, 갑질 의식으로 몰아붙였다. 최 시인과는 어쩌다 몇 번 어울린 정도지만 그녀는 곤궁해도 티가 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정도는 안다. 물질에 정신도 육체도 압도당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다. 왜 돈 없는 사람은, 가난한 시인은 특급호텔 꿈도 꾸면 안 되는가. 남의 가난한 꿈을 비난하고, 내용과 상관없는 불순한 뉘앙스를 위해 시인과 호텔을 엮는 수법도 지겹다.
 
또 하나의 지겨운 광경. 서지현 검사의 폭로 직후 검찰 고위관계자들이 포함된 저녁 모임에서 서 검사와 함께 일했다는 한 검찰관계자는 말했다. “서 검사는 똑똑하고, 일 열심히 하고, 업무에 충실했다. 이런 행동을 할 사람이라고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이튿날, 이 말이 떨어져 고물도 묻기 전에 서 검사의 평소 능력과 태도에 대한 뒷담화가 검찰 내부 발로 쏟아졌다.
 
다 아는 일. 어느 조직에서나 일어나는 일. 성적 탐욕에 희번덕거리는 못된 손버릇을 권력의 상징인 양 휘두르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희생자를 희생양으로, 문제 제기자를 문제적 인간으로 만들어 사안을 덮는 걸 조직을 위한 충정으로 포장하는 게 우리의 관성이다. 미투운동 와중에도 여전히 관성에 충직하고자 애쓰는 대한민국 문화에 ‘숙연’해질 지경이다.
 
폭로. 최근 검찰 내부에서 또 다른 폭로가 나왔다. 춘천지검 안미현 검사가 지난해 강원랜드 채용비리 수사를 인계받아 수사하면서 국회의원, 검찰 간부 등의 외압을 받았다는 폭로다. 검찰은 재수사팀을 꾸렸고, 거론된 국회의원들은 ‘야당을 겨냥한 정치공격’ 등의 프레임으로 맞선다. 수사로 진실이 얼마나 밝혀질지는 모른다. 하나 이를 통해 검찰 수사 과정에 있었는지도 모르는 불합리한 관행에 대한 도전이 시작됐고, 이런 과정을 통해 앞으로 그나마 조심하게 되지는 않을까 희망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아마 당분간 ‘폭로’하는 현실에 익숙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폭로가 여성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요즘 세상을 뒤흔드는 폭로는 대개 여성이 이끈다. 이 때문에 회식 자리에서도 “여자가 무서워” “여자 앞에선 말조심” 등 농담인 듯 진담 같은 농담이 난무한다. 뒷편에선 여성의 조직 충성도에 대한 의심의 쑥덕거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건 여성이 주류사회를 공유하는 시대로 가는 길에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인지도 모른다. 이제 시작됐을 뿐이다. 원래 여성들에겐 남성들이 흔히 말하는 ‘까라면 까는’ 문화가 없는 데다 요즘 잘 키운 딸들은 소신이 강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페미니즘을 들이대지는 않는다. 요즘 여성계의 골칫거리 중 하나가 ‘여성계의 주장에 반기를 드는 여성들’이다. “이러다 여성들끼리 싸운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신경써 달라.” 최근 취재를 했던 한 여성계 관계자는 이렇게 부탁했다. 여성이 확실한 소수자였던 우리 세대는 한 편으론 여성문제에 대해 한 목소리를 냈고, 다른 한 편으론 남성 조직의 질서에 적응하느라 애썼다. 하나 시대가 달라졌다.
 
2년 전쯤 미국의 방송인 킴 카시디언이 SNS로 자신의 모래시계같은 몸매가 드러난 누드 사진을 전송한 적이 있었다. 몇몇 페미니스트들이 그녀의 성상품화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에 맞서 “그녀의 성은 그녀의 것이다. 제발 간섭하지 말라”며 정면으로 맞붙은 것도 여성들이었다. 이를 두고 여성들 간의 내분이라며 희희낙락하는 시각도 많았지만, 이게 오늘의 여성이다. 요즘 여성은 남성들을 고발하는 게 아니다. 인간을 억압하는 불합리한 사고와 관행에 도전하는 것. 그들은 비록 여성 선배들이 이룩해놓은 길이라 하더라도 비껴가지 않는다. 지금 세대의 여성은 이미 다수가 되어가고 있다. 다수는 그들이 살아갈 세상의 질서를 규정할 의무가 있다. 이 통과의례를 거치면 우리 사회도 조금은 더 투명하고 살만한 세상이 되리라 기대한다.
 
 
양선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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