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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철의 車브랜드 스토리②도요타] 베틀 만들다 3大 자동차 기업으로

도요타 [중앙DB]

도요타 [중앙DB]

 
지난해 세계 3위 자동차그룹이면서 2012년부터 4년 연속 세계 자동차 판매대수 1위를 기록했던 도요타자동차. 거대 자동차 기업도 시작은 한 소년의 꿈에서 출발했다.

도요타 창업 스토리
“돈을 자동차 연구에 쓰라” 유언
“해고 안 하는게 경영자 도리”
파업 계기로 노사협력 문화 구축

 
1867년 일본 시즈오카현 야마구치의 가난한 목수 집안에서 도요다 사키치가 태어났다. 장남이었던 도요타는 생업을 위해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아야 했다. 목수가 될 아이에게 정규교육이나 훈련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사키치는 마음은 다른 길을 꿈꾸고 있었다. 그의 꿈은 발명가였다. 소년 사키치는 어머니가 밤늦게까지 베틀을 돌리며 고생하던 모습을 보고 자랐다.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그는 보다 쓰기 편하고 고품질 직물을 생산할 수 있는 직기를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1990년대 초반 일본 자동차 중 2번째로 한국에 수입됐던 도요타 캠리. [중앙DB]

1990년대 초반 일본 자동차 중 2번째로 한국에 수입됐던 도요타 캠리. [중앙DB]

 
당시 직물은 직접 사람의 손을 짠 거친 베였다. 가업을 잇기 원했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키치는 밤낮으로 직접 설계한 끝에 1894년 도요타식 목제인력직기를 제작했다. 기존 베틀에 비해 50%정도 빠르게 직물을 만들 수 있었다.
 
원하던 물건을 발명한 사키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기존 직기를 계속 개선해간다. 1894년부터 1914년까지 그가 개발한 직기는 총 6개였다. 당시 경험은 도요타의 경영정신(도요타웨이) 중 하나인 ‘끊임없는 개선(Continuou  Kaizen)’의 모태로 작용한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소비자가전쇼(CES)에서 선보인 렉서스 LS600hL 자율주행 자동차   [중앙DB]

미국 라스베이거스 소비자가전쇼(CES)에서 선보인 렉서스 LS600hL 자율주행 자동차 [중앙DB]

 
1924년 그는 ‘G형 자동직기’의 개발에 성공했다. G형 자동직기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자동직기로 평가 받았다. 동경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도요타 사키치의 장남 도요다 키이치로도 대졸 후 엔지니어로서 아버지의 자동직기 개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자동직기 개발·생산과정에서 노하우를 토대로 훗날 도요타자동차를 설립하게 된다.  
 
도요타 사키치는 1926년 도요타자동직기제작소를 설립하지만, 4년 후 타계한다. 사망하기 직전 그는 미국·유럽을 방문하며 자동차가 미래 산업의 축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제네럴모터스(GM)·포드 등 미국 자동차 제조사가 세력을 확장하던 당시 도요타 사키지도 자국 기술로 승용차를 만들고자 시도했다. 실제로 G형 자동직기 특허권을 영국 회사인 플랫 브라더스(Platt Brothers)에 매각하면서 당시로서는 거금인 100만엔(약 1000만원)을 손에 넣는다.  
 
 
도요타의 연료전지 콘셉트카 '파인 컴퍼트 라이드' [사진 도요타코리아]

도요타의 연료전지 콘셉트카 '파인 컴퍼트 라이드' [사진 도요타코리아]

 
그의 꿈은 도요타 카이치로가 대신하게 된다. 사키치는 장남 도요다 키이치로를 불러 “이 돈은 모두 네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이 돈을 반드시 자동차의 연구에 사용하라”고 말한다. 그는 또 도요타 키이치로에게 “반드시 우리의 손으로 국산승용차를 만들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키이치로는 입장에서는 막막한 유훈이었다. GM·포드와 맞설 수 있는 자동차 제조사를 만든다는 게 바보 같은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일단 미국으로 출장을 떠나 조립라인과 부품라인을 둘러봤다. 귀국한 그는 10여명의 인력을 투입해 도요다자동직기제작소에 자동차사업부를 만든다.  
 
여기서 처음 한 일이 끊임없이 엔진을 분해하는 일이었다. 기초기술을 확보하고 엔진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도요타의 도요타 아키오 사장. [중앙포토]

도요타의 도요타 아키오 사장. [중앙포토]

 
하지만 여전히 충분하지 않았다. 키이치로는 다시 한 번 미국 출장길에 오른다. 여기서 깨달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매우 정확한 규격의 부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는 고품질의 엔진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재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는 조립라인과 같은 대량생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직기를 생산하던 컨베이어 시스템을 응용하기로 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키이치로는 마침내 1934년 최초로 도요다 프로토타입 엔진 개발에 성공한다. 1935년 5월 그의 첫 프로토타입 승용차인 모델A1이 탄생하고 1936년 마침내 자국 기술로 국산 승용차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도요타 키이치로는 보다 쓰기 쉽게 브랜드의 이름을 도요타로 개칭한다. A1의 개량형인 AA부터 도요타 브랜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37년 키이치로는 승용차 대량생산을 위해 일본 아이치현 코모로에 대규모 생산라인을 건설하고 도요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한다. 키이치로는 생산시스템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 필요한 건 원가를 낮추는 일이었다. 그는 부품을 어떻게 이동시키는 것인지, 한 작업에 얼마나 많은 인원의 사람이 필요한 것인지를 지속적으로 연구했다. 도요타 생산방식의 근간을 이루는 ‘저스트인타임(just in time)’도 여기서 태동했다.
 
하지만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겪으면서 도요타자동차도 위기를 맞는다. 패전 뒤 심각한 디플레이션으로 회사가 어려워지자 노조와 “인원 감축은 절대 않겠다”는 각서도 썼다.  
 
도요타 키이치로는 “사람을 해고하지 않는 것이 경영자의 도리”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도요타자동차는 경영자만의 소유가 아닌 임직원 모두의 소유라는 경영 철학은 지금도 이어진다.
 
 
도요타 그래픽

도요타 그래픽

 
1947년 도요타는 첫 소형차 모델인 SA을 선보였다. 하지만 회사 경영 상태는 더욱 악화한다. 1949년에는 도산 지경에 몰렸다. 간신히 얻은 은행의 협조 융자 조건에는 대대적인 인원감축이 포함돼 있었다.  
 
1950년 도요타 노동조합은 결국 파업을 택한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도요타 노사는 노사협력의 기업문화를 구축할 수 있었다.
 
도요타의 생산 시스템은 1950년대에 들어서 개선되기 시작했다. 도요타의 생산 표준화인 ‘도요타 프로덕션 시스템(Toyota Production System)'도 정착하기 시작한다.
 
 
도요타현대차

도요타현대차

 
도요타 키이치로는 1959년 첫 해외 생산기지인 브라질 공장을 시작으로 글로벌 생산기지의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확충했다. 이때부터 도요타는 현지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현지의 공급업체들과의 장기적으로 상호 유익한 관계를 구축하고, 현지 고용 직원의 만족도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도요타 프로덕션 시스템은 TPS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시스템의 목표는 자원의 낭비를 없애는 것이다. 이를 위한 대표적인 수단인 JIT(Just-in-time)시스템은 협력업체와의 부품재고량을 거의 ‘제로(0)’에 가깝게 유지하는 것이다. 필요할 때 필요한 부품을 가지고 제때 필요한 차를 만들기 위해서다. 덕분에 도요타자동차는 대표적인 일본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했다.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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