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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가 은행 창구서 일하는 나라

Outlook
공인된 이론이나 관행화된 이해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잘 설명되지 않는 현상을 학자들은 ‘예외’나 ‘일탈’로 정의한다. 가장 발달된 자본주의 국가 미국의 미미한 사회복지와 사회주의적 대안을 외면하는 미국 노동계급의 몰계급적 투표 행태는 유럽의 세례를 받은 정치학자들에게 골치 아픈 연구대상이었다. 결국 그들은 재산권과 투표권의 교환, 기회 평등과 다원주의, 민주·공화의 양분된 정치구조 등을 핵심으로 하는 미국적 현상을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로 정의했다. 이와 같이 보편과 일탈의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도 미국 못지않게 이해가 어려운 대상이다. 예외의 요소들은 경제·사회·정치 그리고 문화의 뿌리 속에 켜켜이 쌓여있어 일반론적 시각에서 이를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다.

육체노동 천시하는 사회 분위기
젊은이들을 노량진으로 내몰아
중기 근로조건의 혁명적 개선과
노조·지역사회 연대 필요한 시점
재개된 노사정위 대화에 기대

 
무엇보다 육체·생산 노동과 정신·사무 노동 사이의 사회경제적 분절과 심리적 간극이 우리만큼 큰 나라도 드물다. 식민지와 한국전쟁, 분단과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머리는 공장의 삶과 노동의 이데올로기를 혐오하도록 세탁됐다. 급속한 경제성장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그 주역이었던 노동자들에게는 어떠한 사회적 존경도 제공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높은 대학진학률, 남아도는 중소기업 일자리와 구직자들의 대기업 집중 등의 이면에 이러한 반노동주의가 내재한다. 그 결과 유력 대학에서 최고의 스펙을 쌓아 온 고급 구직자들이 사무직의 대표 격인 공공기관과 금융기관 그리고 동사무소에 집중되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우리처럼 최고급 엘리트들이 은행에서 출납을 담당하는 사례는 없다.
 
생산공에 대한 뿌리 깊은 멸시와 외면으로 고액의 임금을 받는 자동차 공장 노동자도, 조선업의 숙련공도, 공단지역의 중소기업 사장도 자녀에게 자신의 일자리를 대물림 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사교육은 자녀 직업을 다른 곳으로 옮겨줄 무빙벨트이며, 고액 연봉은 육체 노동을 탈출하게 해 줄 사다리로 간주된다.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우리 조건에서 은퇴 후 최고의 안전핀은 ‘자식농사’가 되었고, 노동조합은 학원비를 운반하는 ‘수레’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미 ‘탈생산’에 성공한 사무직 노동자들의 지위 재생산에 대한 욕망은 더욱 치열하다. 초등학교 영재교육은 필수고,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 고액의 과외를 마다하지 않는다. 공교육 기관은 그 기능이 쇠퇴해 학적부 만드는 등기소로 전락해 버렸다. 심지어 자녀 스펙을 위해 자신의 학술논문에 아들을 공저자로 등재한 교수가 적발됐고, 교육부 조사결과 최근 10년간 유사 사례 82건이 확인됐다. 기가 막힌 노릇이다.
 
물론 이 같은 교육의지와 계층상승 욕구가 우리의 빠른 경제발전과 압축 성장을 견인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기근을 감내하던 의지와 계층 전환의 열정에 힘입어 사다리를 통과한 인재들이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위한 계획과 방법을 수립했다. 기업에 취업한 사원들은 전 세계 시장을 무대로 상품을 기획하고 공급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재 양성과 공급 그리고 수요의 선순환은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끝나버렸다. 사교육의 터널을 통과하고 대학에 진입해 수년간 스펙만 쌓아 온 구직자들에게 우리 시장은 더 이상 제대로 된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한다. 바야흐로 우리 노동시장은 과잉공급·과소소비의 ‘일자리 공황’에 진입하게 됐다.
 
현재의 상상력으로 일자리 공황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중소기업과 대기업간 일자리 격차를 완화하고, 공무원 시험을 위해 노량진으로 향하는 인재들의 관심을 돌릴 수 있도록 중소기업 일자리 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의 ‘모노즈쿠리’(ものづくり)에 못지않은 우리의 장인 의식과 상인 정신이 일자리를 통해 구현될 수 있도록 시장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중소기업과 최저임금이 등치되고 임금인상의 고용 효과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는 한 공황상태의 우리 노동시장은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빠져버릴 가능성이 크다. 중소기업의 연구개발을 획기적으로 지원하고, 임금과 근로조건을 혁명적으로 개선하며, 튼튼한 기술체력을 위해 숙련공을 적극적으로 양성해야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노력은 대기업과 정부의 몫이다.
 
노동조합 또한 경제적 조합주의(business unionism)을 넘어 사회연대와 이익공유의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 자기 자녀만을 위한 사교육 투자, 개인적 이익 극대화를 위한 탈연대의 경제 조합주의로는 설령 자식을 유력 대학에 보낸다 하더라도 좋은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한다. 각자도생의 개인적 이익 극대화 전략은 압도적 다수의 경제적 궁핍과 일자리의 궁극적 축소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노동조합이 중소기업 및 지역사회와 연대해야 지속가능한 양질의 일자리가 다수 만들어질 수 있다. 이러한 선택이 진정한 노동자식 노후 전략이다.
 
노사정위원회가 새로운 형식과 방법으로 사회적 대화를 시작한다니 기대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우선 의제로 ‘중소기업 일자리 질 개선’과 ‘노조·무노조 연대 방안’을 논의해 보는 것은 어떨까.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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