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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배짱·근성 다 갖춘 정현, 2년 뒤 메이저 우승한다

어릴 때부터 스승이 본 ‘호주오픈 샛별’
지난 26일 맬버른에서 열린 호주오픈 테니스 남자 단식 준결승전에서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를 맞아 경기에 집중하고 있는 정현. [EPA=연합뉴스]

지난 26일 맬버른에서 열린 호주오픈 테니스 남자 단식 준결승전에서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를 맞아 경기에 집중하고 있는 정현. [EPA=연합뉴스]

호주오픈 테니스에서 한국 선수 최초로 4강 기적을 일궈낸 정현의 이야기를 하려니 벅찬 감정과 함께 옛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오늘의 정현을 말하려면 삼성의 테니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992년 10월 삼성에서 테니스단을 창단해 내가 감독을 맡았다. 이곳에서 한국 테니스의 레전드들이 탄생했다. 남자프로테니스(ATP) 개인 최고 랭킹(36위)에 올랐던 이형택(42)이 대표적이다. 여자프로테니스(WTA)에서 활약한 박성희(43)의 최고 랭킹은 복식 34위(1998년 6월), 단식 57위(1995년 9월)였다.

오렌지볼 주니어대회 12세 우승
키 작고 시력 나빠 가능성 크게 안 봐

미국 유학 때 플레이 망가져 귀국
삼성테니스단 합류 뒤 기량 활짝

고도근시 안경 쓰면서 시력 해결
랭킹 100위에 들고 한때 슬럼프
이번 대회서 기량 한 단계 도약

 
남녀 선수가 모두 성공하면서 나는 주니어 선수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2년 삼성에서 주니어 선수 육성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전웅선(32)·김선용(31) 등 탁월한 선수들이 배출됐다. 이들은 주니어 시절 노박 조코비치(31·세르비아)·앤디 머리(31·영국)보다 좋은 성적을 내기도 했다. 조코비치와 머리는 성인 무대에서도 활약해 세계 랭킹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테니스는 주니어 시절에는 성적이 좋았지만 정작 시니어 때는 성적이 좋지 않아 ‘주니어용’이란 비아냥을 들어야만 했다.
 
면담 10분 만에 김일순 감독에게 추천
정홍(25·현대해상)·정현 형제는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났다. 미국에서 심장내과 의사로 일하는 민인기 박사가 매년 1만 달러를 한국 테니스계에 기부했는데, 그 돈을 내가 받아서 정홍·정현 형제에게 후원하기도 했다.
 
정현이 세계적인 주니어 대회인 오렌지볼 12세부에서 우승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는데 그때 (정)현이는 키도 작고,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는 등 선수로서의 외형은 좀 아니었다. 플레이도 너무 어른스럽게 해서 발전 가능성은 크게 보지 않았다.
 
오렌지볼 우승 이후 세계적인 스포츠 매니지먼트사 IMG와 계약한 정현은 열세 살인 2009년에 미국 플로리다의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났다. 그후 정홍이 먼저 한국에 오고, 정현도 플레이가 많이 망가진 상태에서 귀국했다. 당시 허도영 장애인테니스협회 부회장이 정현을 데리고 찾아왔다. 정석진 삼일공고 감독이 자기 아들(정현)을 데리고 왔는데 삼성에서 훈련받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3년 만에 다시 정현을 보았는데 부모와 달리 키가 훌쩍 커 있었다. 중 3이던 정현은 나랑 대면하는데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여러 명의 선수를 키워 내며 ‘테니스계 미다스의 손’이란 평을 듣고 있었다. 내가 선수를 선택할 때는 재능과 정신력은 물론 관상과 자신감 여부를 꼭 본다. 어린 정현에게서 그 모든 것을 봤다. 면담 10분 만에 김일순 감독에게 정현을 강력히 추천했다.
 
정현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삼성에서 숙소 생활을 하면서 주니어 투어를 시작했다. 김일순 감독이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줬고, 윤용일 코치가 대회를 따라다니며 경기력을 끌어올렸다. 김일순 감독은 여자지만 호탕하고 선수들을 살뜰히 챙겼다. 정현은 김 감독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정도로 편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삼성에서 1년6개월을 보낸 정현은 고2 때 윔블던 주니어 결승에 올랐다. 하지만 윔블던 준우승 당시에도 서비스에 문제가 있었고, 포핸드도 경직된 스윙이었다. 여러 번 교정을 시도했지만 잘 안 됐다. ‘프로로 전향해서도 잘 할까’ 의문이 들었다.
 
눈이 약시인 줄 알았던 정현은 윔블던 준우승 이후 안민석(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소개로 분당서울대병원을 찾아 고도근시로 재판명을 받았다. 그에 맞는 안경을 맞추면서 시력 문제를 해결했다. 그래도 교정시력이 0.6이다.
 
기량이 향상되던 정현에게 2016년 프랑스오픈을 전후로 슬럼프가 왔다. 경기장에서 선수로서의 자세가 안 좋았다. 세계랭킹 100위 안에 들면서 방심한 모습이었다. 코트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나는 코치진에게 “휴식기를 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해서인지 투어를 강행하다가 복부 부상을 당했고, 결국 부모와 상의해 투어를 중단했다.
 
정현은 스윙도 문제였지만 신체의 부정교합도 고쳐야 했다. 또한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기에 나의 제자인 박성희(스포츠심리학 박사)에게 멘털 관리도 받게 했다. 또 멀리 전주까지 내려가 신체 교정을 받았다. 그 4개월 동안 스윙도 고치고 심리 트레이닝을 통해 압박감도 해소되자 정현은 달라졌다.
 
결정적으로 지난해 11월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스에서 투어 첫 우승을 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우승 당시 정현은 실수가 적고 수비를 잘 했다. 하지만 더 큰 선수가 되려면 서비스를 더 강하게 넣고, 베이스라인 플레이도 더 빨라져야 했다. 언제쯤 그런 플레이가 나올까 생각하며 정현에게 이 같은 주문을 했다. 그런데 이번 호주오픈에서, 특히 16강전 조코비치와의 경기에서 그런 플레이가 나왔다.
 
선수들의 기량은 한 계단씩 오르는 게 아니라 큰 대회에서 특별한 계기를 통해 갑자기 달라진다는 것을 이형택을 통해 경험했다.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특별한 계기가 찾아오는데, 그것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호주오픈 1~3회전 경기와 조코비치와의 경기는 확연히 달랐다. 잃을 것이 없던 정현은 조코비치에게 기죽지 않았다. 스트로크 랠리에서 밀리지 않았다. 지난달 영입한 네빌 고드윈(남아공) 코치가 도움을 줬을 것이다. 좋은 코치 밑에서 영어도 늘고 새로운 테니스에 눈이 뜨이기 바란다.
 
아시아 최고 랭킹, 4위 니시코리 넘어설 수도
어린 나이에 슬럼프를 극복하고, 당당히 세계적 선수들과 경기하고, 많은 관중 앞에서 그들을 감동시키는 정현을 보면서 무척 기뻤다. 모든 사람이 무모하다고 생각했던 세계 도전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 줄은 나 역시 몰랐다. 정현의 기적은 삼성으로부터 후원받기 시작한 90년대 초가 씨앗이 되었다. 그후 모든 선수가 잘 해주었기에 팀이 이어졌고, 정현까지 와서 열매를 맺었다.
 
다음달이면 정현과 삼성의 후원 계약이 끝난다. 삼성과 한국 테니스의 인연이 끊어지는 것이다. 다른 대기업에서라도 유망주를 발굴하고 프로를 후원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호주오픈 4강으로 정현은 이형택이 갖고 있는 랭킹(36위)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 니시코리 게이(29·일본)가 도달한 아시아 최고 랭킹(4위)도 넘어설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서비스의 속도와 각도가 더 향상되어야 한다. 정현은 아직 스윙을 할 때 체중을 다 싣지 못한다. 서비스를 잘 넣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근력도 더 키워야 한다. 호주오픈 준결승에서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를 만나 발바닥 통증으로 기권했다. 5세트 중 3세트를 따야 하는 메이저 대회 6경기를 치르다 보니 체력이 고갈된 것이다. 그러다 보면 부상도 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큰 걱정은 없다. 정현의 정신력은 강하다. 경기를 많이 뛰면서 배우고 발전할 것이다.
 
2년 후 정현이 메이저 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릴 거라고 확신한다. 아시아 선수들의 신체 상태가 제일 좋은 때는 24~26세라고 생각한다. 니시코리는 25세에 US오픈 준우승을 했다. 이미 메이저 대회 4강에 오른 정현은 그 나이 때에 우승을 할 것이다.
 
 
주원홍
미디어윌 고문·전 대한테니스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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