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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청와대 교감설… 의혹 둘러싼 진실은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 발표 이후 2015년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을 둘러싼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8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에 참석한 모습. 임현동 기자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 발표 이후 2015년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을 둘러싼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8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에 참석한 모습. 임현동 기자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는 원세훈(66ㆍ수감중) 전 국가정보원장의 사법처리를 두고 청와대와 교감했을까. 지난 22일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조사결과 발표 이후 이를 둘러싼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일부 언론을 중심으로 양 전 대법원장이 숙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설치를 놓고 청와대와 ‘협상한 게 아니냔 의혹까지 내놓으면서 사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대법관 13명도 23일 “외부기관이 대법원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대법원이 영향을 받았다는 취지의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며 “사법부 독립과 재판 공정성에 관한 불필요한 의심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해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명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대법원과 청와대 사이에 정말 ‘내밀한 거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법원 안팎에선 이 같은 정황만으로 당시 대법원 판결을 의심하긴 어렵다고 말한다. 당시 청와대의 ‘관심’이나 ‘압력’과 상관없이 법리적인 근거가 있다면 문제 삼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청와대의 ‘최대 관심’ 원세훈 재판
발단은 추가조사위가 찾아낸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문건에서 시작됐다. 전ㆍ현직 기조실 심의관들의 PC에서 발견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 문건에는 법원행정처가 원 전 원장의 항소심 재판을 전후해 재판부 동향에 대해 청와대와 의견 교환을 한 정황이 나온다.
 
문건은 “이 사건은 ‘BH(청와대)의 최대 관심 현안”이라며 “선고 전 ‘항소기각’을 기대하면서 법무비서관(곽병훈)실을 통해 법원행정처에 전망을 문의했다”고 적었다. 이어 “법원행정처는 민감한 사안이나 우회적ㆍ간접적 방법으로 재판부 의중을 파악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재판 결과에 대해 1심과 달리 예측하기 어려우며 행정처도 불안해하고 있는 입장”이라고 했다.
 
문건대로라면 청와대는 항소심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를 무죄로 본 1심과 같은 결론을 내리길 원했고, 법원행정처는 재판부의 동향을 파악하면서 (청와대와 다른 결론이 나올까 봐) ‘불안해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2015년 양승태 대법원장(서 있는 사람)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덕담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5년 양승태 대법원장(서 있는 사람)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덕담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건에 따르면 청와대는 원 전 원장 항소심에서 ‘기대와 달리’ 선거법 위반 혐의가 인정되면서 당황해했다고 한다. 특히 우병우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은 ‘사법부에 큰 불만을 표시’하면서 “전원합의체(전합)에 회부해줄 것을 희망했다”고 돼 있다.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되는 소부(小部) 대신 대법관 13명(법원행정처장 제외) 전원이 참여하는 전합에서 다룰 것을 원했단 의미다. 전합은 기존 판례를 변경하거나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중요 사건에 한해 선별적으로 열린다.
 
당초 대법원3부에 배당됐던 사건은 실제로 전합에 회부됐다. 2015년 7월 대법원 전합은 유무죄 판단을 보류한 채 2심으로 돌려보냈다. 전합은 항소심이 핵심증거로 인정했던 이른바 ‘425 지논 파일’과 ‘시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과 청와대 교감설의 의심은 여기에서 싹튼다. 우 전 수석이 원했던 전합에 실제로 회부됐고, 청와대가 못마땅해했던 항소심의 결론이 대법원에서 인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따져보기 위해선 각 재판의 판단 근거가 무엇이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증거능력 가른 건 형사소송법 해석
우리 형사소송법은 이른바 전문법칙(傳聞法則)을 따른다. 특정 사실에 대해 경험한 사람이 직접 법원에서 진술하지 않고 ①경험 사실을 들은 타인이 법원에서 진술하거나(전문진술) ②경험자 자신이 경험 사실을 글로 쓰거나(진술서) ③경험사실을 들은 타인이 글로 쓴 경우(진술녹취서)는 특별히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법원에서 말로 사실 여부를 다퉈볼 수 없는 ‘들은 얘기’나 ‘글로 쓴 것’은 증거로 보지 않는단 의미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컴퓨터로 주고받은 e메일이나 USB 메모리 같은 저장장치에 들어있는 증거를 어떻게 인정할 것이냔 부분이다. 1961년 개정된 형사소송법은 이 같은 기술발달을 예측하지 못했다. 대법원이 바뀐 기술적 상황에 대해 판례로 입장을 정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대법원은 “압수된 디지털 저장 매체에서 출력한 문서를 진술증거로 사용하는 경우, 그 기재 내용의 진실성에 관해서는 전문법칙이 적용되므로 형사소송법 제313조 제1항에 따라 그 작성자 또는 진술자의 공판준비나 기일에서의 진술에 의해 그 성립의 진정함이 증명된 때에 한해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풀어 말하면, 디지털 저장매체 속 내용은 기본적으로 증거 인정이 안 되지만 작성자(진술자)가 재판에 나와 “내가 작성했다”고 밝히면 증거로 쓸 수 있단 의미다.
 
이른바 '지논-시큐리티' 파일의 출력물 [중앙포토]

이른바 '지논-시큐리티' 파일의 출력물 [중앙포토]

논란이 된 ‘425 지논 파일’과 ‘시큐리티 파일’은 국정원 심리전단 5팀 직원 김모씨의 e메일에서 나왔다. 이 파일들에는 ‘댓글 활동’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이들에 대해 어떤 주제를 전파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과 여기에 사용된 소셜미디어 계정 및 비밀번호가 들어있었다.
 
검찰은 이 파일의 내용을 김씨가 작성한 게 분명해 범죄의 증거로 채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파일의 증거능력을 인정했지만 대법원은 그렇지 않았다. 형사소송법 조항의 해석이 달랐기 때문이다.
 
항소심, “업무상 작성한 문서”  
1심 재판부는 해당 파일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압수된 두 파일에 대해 작성자가 “내가 작성했다”고 법정에 나와 진술한 적이 없어 ‘전문법칙’에 따라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단 이유에서였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무죄, 국정원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유죄로 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디지털 증거에 대해 새로운 법리를 적용했다. 이후 대법원의 판단과 갈리는 지점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일단 ‘425 지논 파일’ ‘시큐리티 파일’에 대해 “법정에 나와 ‘내가 작성했다’고 진술한 것은 아니라고 봤다. 형소법 제313조 제1항을 적용할 수 없다는 1심 판단에 동의한 것이다. 다만 다른 형소법 조항을 들어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항소심 재판부가 ‘새로운 법리’를 적용한 것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항소심 재판부는 대신 형소법 제315조 제2ㆍ3항을 근거로 들었다. 이 조항은 ‘상업장부, 항해일지, 기타 업무상 필요로 작성한 통상 문서’와 ‘기타 특히 신용할 만한 정황에 의해 작성된 문서’라면 전문증거라 해도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조항이다. 재판부는 이 문서에서 작성자가 보안유지를 강조하고 있고 업무와 관련된 내용이 기계적으로 반복된 것이어서 일종의 ‘업무일지’ 거나 ‘매뉴얼’ 역할을 했다고 판단했다. 이 파일들의 증거능력을 인정한 항소심 재판부는 국정원법과 선거법 위반 혐의를 모두 유죄로 판단해 원 전 원장에게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하면서 법정구속했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으로 기소된 원세훈(가운데) 전 국정원장이 2015년 2월 항소심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항소심 재판부 지논-시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을 인정해 원 전 원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중앙포토]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으로 기소된 원세훈(가운데) 전 국정원장이 2015년 2월 항소심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항소심 재판부 지논-시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을 인정해 원 전 원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중앙포토]

 
대법원, “진정 성립 안 돼”
23일 대법관 13명은 청와대와의 교감이 2015년 당시 전원합의체 판결에 영향을 줬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에 대해 “증거법칙을 비롯한 법령 위반의 문제가 지적되었고, 이 사건이 갖는 사회․정치적 중요성까지 아울러 고려한 다음, 대법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판결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증거능력 인정에 관한 법리를 판단했고, 중요 사건이었기 때문에 전합에 올렸다는 의미다.
 
당시 대법원 전합은 항소심 재판부의 ‘새로운 법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합은 ▷내용 상당 부분이 출처를 알기 어려운 조악한 언론 기사 일부와 트윗 글로 이뤄져 있고 ▷정보의 근원이나 기재 경위, 정황이 불분명하며 ▷업무수행에 어떻게 활용된 것인지 알기 어려워 업무 활동 문서로 보기 어렵고 ▷업무와 무관한 정보도 포함돼 있는 등의 문제를 지적했다.
 
통상 하급심은 재판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대법원의 일관된 판례를 따른다. 하지만 ‘새로운 법리’가 대법원 판례를 바꿀 만큼 합리적이라면 전합 판결을 통해 대법원이 새 판례를 수립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사건에선 지논ㆍ시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을 인정한 항소심의 법리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전합에 참여한 대법관 13명은 이처럼 법리적 근거에 따라 전원일치 의견을 내놨다.
 
대법관들이 “외부 영향을 받은 게 아니다”고 반박한 데엔 당시 판결이 형소법 규정에 대해 하급심과 판단이 달랐을 뿐이며 사실관계를 다투는 1ㆍ2심과 달리 대법원은 법리를 판단하는 법률심이란 의미가 담겼다. 더욱이 유ㆍ무죄를 판단한 것도 아니란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8월 파기환송심은 대법원 판단대로 지논ㆍ시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고도 원 전 원장의 국정원법ㆍ선거법 위반 혐의를 모두 유죄로 판단해 징역 4년을 선고했다. ‘댓글 활동’에 사용된 것으로 인정된 트위터 계정은 오히려 늘었다.  
  
정말 교감은 없었을까
대법원 판결에 대한 의혹 제기에 사법부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갈등의 최종 해결기관’인 법원의 신뢰도에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 남용을 비판하는 판사들 사이에서도 “판결문만 읽어봐도 당시 대법원이 법리에 따라 판단한 걸 알 수 있는데 마치 ‘청부 판결’을 한 것처럼 몰고 가는 건 과도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청와대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 제기 자체가 법원으로선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사진은 대법원 청사 내의 정의의 여신상. 김성룡 기자

청와대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 제기 자체가 법원으로선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사진은 대법원 청사 내의 정의의 여신상. 김성룡 기자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추가조사위가 찾아낸 법원행정처 문건에는 “법원행정처가 법무비서관을 통해 사법부의 진의가 곡해되지 않도록 상세히 입장을 설명함”이란 내용이 나온다.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을 의심받을 수 있는 재판을 앞두고 사법행정기구인 법원행정처가 과도하게 청와대와 소통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당시 법원행정처에 근무했던 한 고위법관은 “청와대가 민정수석실을 통해 집요하게 해당 재판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압박을 막기 위해 이런 ‘제스처’를 취했을 수 있다. 실제로 재판 결과가 달라진 건 아니지 않느냐”고 해명했다. 또 다른 법원행정처 출신 판사도 “당시 A대법관의 경우, 특정 사건 전합의 결론에 반발해 다른 대법관들과 식사조차 하지 않았다”며 “대법원장이 청와대 요구에 따라 대법관 전원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전원합의체 13대0’이란 결과는 판결문에 나온 논리로만 봐선 큰 트집을 잡긴 어렵다. 법리에 따른 판결이란 주장도 일리가 있다. 실제 ‘교감’이 있었는지는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과 대법관들만 알 일이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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