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3.9m, 폭 5.8m의 대형 회화 ‘1935(사진)’ 앞에 선 조덕현 작가. 장지에 연필로 그린 이 화폭엔 과거와 현재,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 한 프레임 안에 압축 된 시공간이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1/25/7529492a-4ef9-4eec-829a-dd181a79a23c.jpg)
높이 3.9m, 폭 5.8m의 대형 회화 ‘1935(사진)’ 앞에 선 조덕현 작가. 장지에 연필로 그린 이 화폭엔 과거와 현재,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 한 프레임 안에 압축 된 시공간이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PKM갤러리 ‘조덕현:에픽 상하이’
‘동양의 할리우드’ 담은 그림·영상
작가 스스로 조선청년으로 설정
사실과 허구, 과거와 현재 포개져
2015년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연 ‘꿈’이라는 전시에서 회화와 영상 설치작업을 통해 ‘조덕현’의 말년을 다뤘던 그는 이번 전시에서 ‘조덕현’의 전사(前史·프리퀄), 즉 그의 전성기 시절인 20대를 조명한다. ‘1935’ ‘꿈꿈’ 등 대형 회화 2점을 포함한 회화 작품과 영상 등 18점은 관람객을 가상 인물 ‘조덕현’이 누비던 ‘올드 상하이’의 세계로 이끈다.
![‘상하이 삼면화’. [사진 PKM갤러리]](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1/25/0089918d-c74a-4b96-a315-d8a17665ab62.jpg)
‘상하이 삼면화’. [사진 PKM갤러리]
‘조덕현’의 서사를 축조하는 작업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작가 조덕현은 또 하나의 가상 인물인 여주인공 홍(紅)과 더불어 당시 상하이의 인기 배우였던 김염(金焰·1910~1983·본명 김덕린)과 루안링위(阮玲玉·1910~1935) 등 실존 인물까지 불러온다.
한국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염은 서울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인 아버지(김필순)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당대를 휘어잡은 원조 한류스타. 공산당원이 되기를 거부한 그는 문화혁명 때 하방(下放)돼 강제 노동을 하는 등 고초를 겪고 쓸쓸하게 삶을 마감했다. 작가가 설정한 이야기에서 김염은 상하이에서 인력거를 끌던 가상 인물 조덕현과 우연히 만나며 그가 영화판에 자리 잡도록 도와준다.
한편 루안링위는 중국 무성영화 최고의 스타이자 ‘신여성’ 문화의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유부남과의 연애로 미디어의 가십에 시달리다가 ‘인언가외’(人言可畏·사람들의 말이 무섭다는 뜻)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다. ‘조덕현’ 서사의 디테일은 상하이 출신의 소설가 미엔미엔(棉棉)과 e메일을 주고받으며 협업한 성과다. 미엔미엔은 홍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쓸 예정이다.
![‘미드나이트 상하이1’. [사진 PKM갤러리]](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1/25/197511da-cfb3-447a-bd21-bfbda4332d06.jpg)
‘미드나이트 상하이1’. [사진 PKM갤러리]
전시작 중 높이 3.9m, 폭 5.8m의 회화 ‘1935’는 이번 서사 프로젝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장지에 연필로 세밀하게 그린 화폭엔 과거와 현재, 가상 인물과 실존 인물, 상하이의 실제 건물과 영화 세트장 풍경이 뒤섞여 있다.
건물 테라스에 선 김염은 전성기 시절의 모습이지만, 그 옆에 선 그의 아내이자 유명 배우였던 친이(95)는 세월의 변화를 고스란히 겪은 노인으로 그려져 있다. 옥상 꼭대기엔 조덕현이 서서 도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고, 건물 앞엔 배우 루안링위가 말 위에 앉아 조명 세례를 받고 있다. 한 프레임에 겹쳐져 있는 시공간은 이야기를 증폭시키며 관람객에게 삶과 시간의 의미를 묻는다.
또 다른 대형 회화 ‘꿈꿈’에도 시공간이 뒤섞여 있다. 1·2차 세계대전의 난민들부터 시리아 난민까지 근현대의 전쟁과 재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함께 묘사돼 있다. 이 가운데에도 조덕현이 있다. 이 밖에 네온을 소재로 한 채색 페인팅과 30년대 여러 영화 장면을 5면 거울에 비춘 영상설치 작업 ‘에픽 상하이’도 눈길을 끈다.
조 작가는 “이전에는 옛 흑백 사진을 소재로 그 사진의 아우라(aura)를 기반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지금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사실과 사실 아닌 것을 혼합해 사실 이상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작업에 매력을 느낀다”고 말했다. 전시는 다음달 20일까지 계속된다.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