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이훈범의 시시각각] 입 다물게 하는 사회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가끔씩 찾던 국숫집 한가운데 기계가 하나 놓였다. 메뉴 화면을 눌러 음식을 주문하고 계산하는 자판기다. 요즘은 그리 낯선 풍경도 아닌데 번호표를 받아 자리에 앉아도 허전함이 남는다. “조금 더 맵게, 조금 덜 짜게”라는 보충 주문이 불가능해진 까닭일 터다. 주방을 향해 “21번은 덜 짜게 해 주세요”라고 외칠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궁색해 보여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비싼 음식은 아닐지라도 규격화된 맛의 패스트푸드 역시 아닐진대 억울한 느낌마저 든다. 이제 선택은 둘뿐이다. 다른 국숫집을 찾아가거나 짠맛에 길들여지거나.
 

사회가 만든 문제 개인이 책임 짊어져
권력과 갈라선 정치가 제 몫을 해야

더 큰 낭패는 병원에서 겪었다. 발목을 접질려 정형외과를 찾았을 때다. 접수대에서 간호사(또는 간호조무사)가 증상을 묻길래 간단히 대답했다. 차례가 돼 진료실에 들어가 설명하려 하자 의사가 손사래를 친다. “말하실 필요 없어요. 여기 다 적혀 있잖아요. 저기 가서 엑스레이 찍으시죠.” 환부를 볼 생각도 안 한다. 얼마나 부었는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는 몰라도 되는 모양이다. 엑스레이 필름을 본 의사가 말했다. “골절은 아닌데 움직이지 않는 게 좋으니 깁스하시죠.” “좀 더 심해지면 할게요.” 소염진통제만 처방받고 서둘러 나왔다.
 
두 사례가 한 가지 원인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건 무리일지 모르겠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고용인원을 줄인 여파일 수도, 단순히 효율성을 극대화한 결과일 수도, 아니면 그저 생산자 편의주의의 발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사례가 초래한 결과인 심리적 불편함은 같다. 뭔가 해야 할 말을 못한 듯한, 의지에 반해 입막음을 강요당한 거북함 말이다.
 
놀라운 일 아닌가. 오늘날 같은 ‘고해사회’에서 할 말을 못하다니. 유럽의 대표 지성으로 불리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비밀과 친교의 성소인 고해성사실의 마이크가 공공 광장의 확성기와 연결돼 있는” 게 오늘날 사회 아니던가. 각종 소셜미디어 속에서 오늘 내가 어딜 갔고 뭘 먹었으며 어떤 이념을 가졌는지 불특정 다수에게 고백하는 사회에서 정작 내게 필요한 현실적 문제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래서 더 고해성사실의 마이크를 바짝 쥐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적 소외를 만회하고자 내밀한 영역까지 까발리며 광장에 접속하려 애쓰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 정보들이 수집되고 저장돼 언제든 자신의 이익에 반해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 채 말이다. 그러고 보면 바우만의 혜안이 기막히다. 그 괴리가 “권력과 정치의 이혼”에서 비롯된다는 지적 말이다.
 
권력은 일을 해결하는 능력이고 정치는 그러기 위해 뭘 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원래는 한 몸이던 게 권력(금융과 무역, 테러에 이르기까지)이 글로벌한 공룡이 되면서 정치가 버림받았다. 국가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개인이 알아서 자구책을 찾아야 하게 됐다는 것이다. 국내의 비트코인 광풍과 설익은 대책이 엄청난 저항에 직면하자 바로 꼬리를 내리는 정부의 모습은 그런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다.
 
글로벌 권력은 인공지능이나 무인자동차·드론 같은 기술 발전에 힘입어 더욱 커질 게 분명하다. 정치 역시 더욱 쪼그라들 게 뻔하고 개인들은 더욱 구조화된 문제에 직면해 책임을 강요받을 것이다. 아울러 개인들의 탈(脫)현실도 가속될 것이며(탈진실도 결국 같은 뿌리다), 마이크를 쥔 손엔 더욱 힘이 들어갈 것이다. 지난 몇 년 사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선진국 청소년들의 음주·흡연율, 범죄율이 현격히 감소했다는 최근 보도가 편하지만은 않은 이유다. 이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해 본다면 위정자들이 권력놀음에 빠져 있지만은 않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 딱한 노릇이다. 
 
이훈범 논설위원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