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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귀족 표도르가 빈민병원에서 본 것은

모스크바 마린스키 빈민병원이었던 건물 앞에 세워진 도스토옙스키 동상은 푸슈킨 미술관 관장을 역임한 조각가 세르게이 메르쿠로프(1881~1952)가 만들었다. 오브제의 내면에 대한 통찰력과 철학적 깊이가 담긴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모스크바 마린스키 빈민병원이었던 건물 앞에 세워진 도스토옙스키 동상은 푸슈킨 미술관 관장을 역임한 조각가 세르게이 메르쿠로프(1881~1952)가 만들었다. 오브제의 내면에 대한 통찰력과 철학적 깊이가 담긴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고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줄 궁극의 건물이 가능하다고 치자. 그런데 그런 건물을 세우려면 단 한 명의 미약한 생명, 이를테면 아까 말한 조그만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치던 불쌍한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라 치자. 무고한 아이의 보상받을 수 없는 눈물을 토대로 그 건물을 세워야 한다면, 너는 그런 조건하에서 건축가가 되는 것에 동의할 수 있겠니? 자 어디 솔직히 대답해 봐! 네가 건설한 건물 속에 사는 사람들이 어린 희생자의 보상 없는 피 위에 세워진 행복을 받아들이는데 동의하고 결국 받아들여서 영원히 행복해진다 하더라도, 너라면 과연 그따위 이념을 용납할 수 있겠니?”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2> 모스크바: 고통을 보다

도스토옙스키 최후의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주인공이 던지는 질문이다. 많은 작가와 사상가들을 도스토옙스키와 연결시켜 주는 유명한 대목이기도 하다. 다수의 행복과 한 아이의 고통이 대립하는 이 질문에서 연구자들은 일차적으로 벤담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대한 반론을 읽어냈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은 윌리엄 제임스의 『도덕 철학과 도덕적 삶』, 어슐라 르귄의 SF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나가면서 공리주의 도덕론과 행복론과 정의론을 논박한다는 게 정설로 되어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에게 고통은 어떤 특정 이념이나 이론의 옳고 그름을 재는 척도보다 훨씬 근본적인 문제다. 한 사람과 여러 사람의 대립이 언제나 중요한 것도 아니다. 빈곤·질병·죽음을 골자로 하는 고통은 인간 보편의 조건이며 인간에 관한 모든 사유의 출발점이다. 그것은 일생 동안 대문호를 휘감은 가장 끈질기고 가장 집요한 관념이자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두드러진 테마다.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고통은 우리 삶에서 두 가지 형태로 실현되기 마련이다. 하나는 나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배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고통을 분담해 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나의 고통까지 경감시키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고통의 테마 역시 이 두 가지 근본적인 가능성, 요컨대 ‘고통의 상대성’을 따라간다. 양심도 도덕적 성찰도 책임도 모두 이 문제를 비켜갈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 사유 목록의 이른바 ‘시그니처 메뉴’라 할 수 있는 선과 악, 신과 인간, 자유, 사랑, 구원의 문제는 모두 실존적 고통이라는 이름의 단일한 씨앗에서 싹 틔어 자라나온 것이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나를 밝히려면 우선 그의 출생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의 출생에는 운명이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내 풍족한 삶이 다른 사람의 고통 때문은 아닐까  
도스토옙스키 전철역 내부. 『백치』(사진) 등 그의 대표 소설의 이미지로 벽화를 만들어놓았다.

도스토옙스키 전철역 내부. 『백치』(사진) 등 그의 대표 소설의 이미지로 벽화를 만들어놓았다.

그는 1821년 10월 30일(이하 모든 날짜는 구력) 모스크바 마린스키 빈민병원에서 그 병원 소속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미하일 도스토옙스키는 군의관으로 복무하다가 1821년 초에 빈민병원 담당의로 발령을 받아 본관 남쪽 윙의 사택에 둥지를 틀었다. 근면하고 성실한 근무 덕분에 닥터 도스토옙스키는 1828년 성 안나 훈장을 받고 8등관으로 승진했다. 19세기 러시아 관등체계에 따르면, 8등관부터 법적으로 세습귀족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닥터는 득달같이 귀족 명부에 자신과 두 아들의 이름을 올렸다.
 
도스토옙스키는 1837년 5월 공병학교 입학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갈 때까지 약 16년 동안 모스크바에서 살았다. 그 많은 장소 중 하필이면 빈민병원에서 태어나 유년시절과 사춘기를  보냈다는 것은 결코 허투루 넘어갈 일이 아니다.
 
빈민병원은 서류상으로나마 귀족인 중산층 가장이 성장기 자식들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최악의 환경일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자라면서 가장 많이 본 것은 병원에 실려 온 극빈층 환자들이었다. 아이들이 환자 가까이 가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지만 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어린 표도르는 창가 커튼 뒤에 숨어서 혹은 보리수 우거진 병원 마당에서 뛰어 놀면서, 현관과 층계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에 찌든 사람들을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가끔은 들것에 실려 나가는 시신을 보기도 했다.
 
거리 풍경 또한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실제 날씨와 관계없이 그 지역에는 언제나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근처에 말을 갈아 매는 역참이 있어서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죄수를 가득 실은 썰매가 수시로 병원 앞을 오갔다. 인근 부티르카 감옥으로부터 중병에 걸린 죄수를 이송하는 무개마차 역시 병원 앞을 지나갔다. 길가에서 혹은 마차를 타고 가면서, 도스토옙스키는 이 슬픈 인간 군상을 질리도록 보았다. 유모가 소스라쳐 놀라 아이의 눈을 가리곤 했지만 소용없었다.
 
도스토옙스키 가족이 살았던 병원 사택은 현재 ‘도스토옙스키 생가 기념관’으로 보존돼 있다. 본관 앞 도로는 ‘도스토옙스키 거리’로 불리며, 도로 끄트머리에는 전철역 ‘도스토옙스카야’가 있다.
 
그러나 그가 살 당시 이 지역의 이름은 ‘신의 집’이라는 뜻의 ‘보제돔카(Bozhedomka)’였다. 그것은 반어적으로 버림받은 영혼을 위한 마지막 안식처, 즉 극빈자 묘지를 지칭했다. 18세기 말까지 그 일대에는 행려병자와 무연고자와 자살자를 위한 빈민 공동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빈민병원 건물을 번듯한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은 것은 이런 지역적 특성을 희석시키고자 하는 정부의 속내를 반영한다는 게 역사가들의 얘기지만, 실제로 가보면 오히려 생뚱맞게 위풍당당한 그 건물 때문에 주변 분위기가 더욱 스산하게 느껴진다.
 
따뜻하고 안전한 방 안에서 날마다 빈곤과 질병과 죽음을 내다보면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불쌍하다는 생각은 나중에 들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무섭고 싫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점차 타인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척, 타인의 고통을 못 본 척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어느 순간엔가는 자신의 상대적으로 풍족한 삶이 다른 누군가의 고통 덕분에 가능한 게 아닐까라는 의심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그의 마음속에 바윗덩어리처럼 무겁게 들어앉은 저 비참한 무리의 모습이 훗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고통 받는 어린아이의 형상으로 응축되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도스토옙스키가 첫 소설에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고통 없는 세상에 대한 열망에서 한 때 공상적 사회주의에 이끌렸던 것도, 인생의 중반에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것도, ‘학대받고 멸시당하는 사람들’을 반드시 소설에 등장시킨 것도, 모두 출생에서 시작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는 사실이다.  
 
작가에게 ‘연민’은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것
구 마린스키 빈민병원 전경

구 마린스키 빈민병원 전경

도스토옙스키 생가 기념관 내부

도스토옙스키 생가 기념관 내부

도스토옙스키에게 고통은 너무나 광범위한 문제라 앞으로 조금씩 풀어갈 예정이다. 다만 그가 고통에 대한 대안으로 찾은 것은 그 어떤 논리도 이념도 원칙도 아닌 연민이었다는 점만은 미리 말해두어도 좋을 것 같다. 연민은 그의 윤리적 어젠다 맨 앞줄을 차지한다. “연민은 가장 중요한, 어쩌면 유일한 인간 실존의 법칙이다” 혹은 “연민-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전부다”라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는 것은 값싼 동정이나 단순한 측은지심이 아니다. 러시아어로 연민(sostradanie)은 ‘함께’(so)와 ‘고통’(stradanie)을 합성한 단어다. 영어의 컴패션(compassion)도 같은 원리다. 요컨대 타인의 고통을 불쌍히 여길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함께 고통당하는 것이 곧 연민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물질의 분배가 아닌 고통의 분담에서 공존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고통을 나눈다’는 의미에서의 연민이 없다면, 그 어떤 윤리도 철학도 그리고 결국 문학도 허망한 미사여구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연민이 인류를 고통에서 구원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자각할 때 밀려오는 무력감이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무력감까지도 사실은 인간적인 것이다. 연민이 지상 낙원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만일 연민마저 없다면 지상 지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러시아에는 총 6개의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이 있다. 그 중 모스크바 기념관은 관리가 허술한 편이다. 담당자는 불친절하고, 얼마 전부터는 흔해빠진 팸플릿이나 우편엽서도 팔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러시아에 갈 때마다 거기 들른다. 새삼스럽게 무언가 새로운 정보를 챙기려는 의도는 없다. 그냥 어린 시절 도스토옙스키의 오감으로 그 슬픈 지역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어서다. ‘신의 집’은 지도에서 사라진지 오래건만 여전히 그곳에는 버림받은 사람들의 넋이 떠도는 것만 같다. 왠지 바람도 더 차고 대지는 더 음울하게 느껴진다.
 
또 하나의 이유는 기념관 정원에 세워진 동상 때문이다. 나는 러시아 안팎에 있는 수많은 도스토옙스키 동상 중에서 이 작품이 제일 좋다. 소비에트 시대를 풍미했던 조각가 세르게이 메르쿠로프가 혁명 전인 1914년에 완성한 것으로, 조각가의 철학적 공력이 아낌없이 묻어난다. 대문호가 입고 있는 가운은 왼쪽 어깨에 떨어질 듯 걸쳐있고 시선은 비스듬하게 저 아래 어딘가를 향해 있고 두 손은 마주잡은 모습이다. 구도자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면서도 기묘한 힘을 발산한다. 고통을 직시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일까, 시선은 정면에서 비껴있다. 그러나 마주 잡은 두 손에는 일종의 결연함이 들어가 있다. 인간에게 손이 두 개라는 게 다행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오른손과 왼손의 굳건한 결합 덕분에 옷자락이 그나마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리지 않는 것 같다. 인간사도 마찬가지 아닌가.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서로를 꼭 붙잡아 주는 것 밖에 없지 않을까. 붙잡을 데라고는 결국 인간 밖에 없을테니. ●
 
 
석영중 :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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