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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100년 만에 되살아난 퇴계 후손 독립지사 글씨

기자
송의호 사진 송의호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14) 
고유에 사용된 축문. [사진 송의호]

고유에 사용된 축문. [사진 송의호]

 
“유세차정유십일월….”축관(祝官)이 고유문을 읽었다. 새해 첫날인 1월 1일 대구 달서구 송현동 한 아파트에선 편액(扁額)을 놓고 전통 고유(告由) 의식이 열렸다. 갓을 쓴 이동후(80) 주손(冑孫)이 위패가 모셔진 아파트 사당에서 향을 피우고 조상들에게 서각(書刻)을 거는 연유를 알린다. 가족과 친지가 참석했다. 고유에 이어 아파트 거실 동쪽 벽에 편액이 걸렸다.

퇴계 11대손 이만규 지사가 남긴 유묵
‘靜中觀物化’ 예서·해서 융합된 서체
1919년 파리장서사건으로 옥고치러

 
‘靜中觀物化(정중관물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다. 조용히 사물의 변화를 관찰한다는 뜻이다. 전서·예서에 해서가 융합된 흔치 않은 서체다. 글씨 끝에 ‘유천(柳川)’이란 호와 낙관이 찍혀 있다. 유천은 독립지사로 퇴계 이황의 11대손인 이만규(李晩煃‧1845∼1920, 1995년 건국포장) 선생의 호다. 이 글씨는 그동안 후손들도 몰랐던 유묵이다.
 
 
고유(告由). 주손이 사당에서 편액을 걸게 된 연유를 조상들에게 알리고 있다. [사진 송의호]

고유(告由). 주손이 사당에서 편액을 걸게 된 연유를 조상들에게 알리고 있다. [사진 송의호]

 
모습을 드러낸 경위가 예사롭지 않다. 지난해 8월 독립지사를 연구해 온 이해영 전 안동대 교수(동양철학)가 경매사이트에서 해당 글씨를 사들여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기증했다. 글씨는 이후 김희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실에 걸려 있었다. 그걸 주손이 보게 된 것이다.


 
원본대로 서각 복원 추진
하지만 이미 기증된 뒤였다. 그날 함께 본 이동화씨는 원본 그대로 서각 복원을 추진했다. 이정환(71) 각자장이 나섰다. 일본이 알아주는 각자장으로 와세대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전문가다. 이 각자장은 본래 글씨 크기 그대로 산벚나무에 새겼다. 나무 값만 100만원이다.
 
 
고유를 마친 뒤 거실 동쪽 벽에 걸린 ‘靜中觀物化(정중관물화)’ 편액. [사진 송의호]

고유를 마친 뒤 거실 동쪽 벽에 걸린 ‘靜中觀物化(정중관물화)’ 편액. [사진 송의호]

 
편액을 건 뒤 주손은 자식들에게 “내가 자랄 때까지 우리 집이 경황없이 지내다 보니 조상 흔적을 모두 잃어버렸다”며 “하나씩 찾는 중에 이번 일을 만났다”고 회고했다. 독립지사 후손의 스산한 삶이다.
 
독립지사 이만규는 1883년 명경과 갑과로 과거에 급제한 뒤 직장‧전적‧지평 등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를 지냈다. 1895년 유천은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을 협박하자 마침내 관건(冠巾)을 벗고 문을 닫아건 채 외부와 접촉을 끊었다.
 
형은 문과에 장원 급제한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의병장이다. 향산은 합병의 변이 나자 단식에 들어갔다. 유천은 형을 만나 오열하며 말했다. “형님께서 끝내 이렇게 하신다면 저도 마땅히 뒤를 따르겠습니다.”


 
형은 장원급제한 의병장
경북 안동시 도산면 하계리에 복원된 이만규 지사를 기리는 유천헌(柳川軒). [사진 송의호]

경북 안동시 도산면 하계리에 복원된 이만규 지사를 기리는 유천헌(柳川軒). [사진 송의호]

 
향산은 극력 만류했다. “조상 제사를 부탁할 사람이 없네. 임금과 부모를 섬기는 도리가 비록 한 가지라지만 상황에 맞게 잘 헤아려 대처해야 하네.” 유천은 그 말을 듣고 눈물을 머금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단식 끝에 자결한 향산은 아우에게 유천이란 호를 지어 주는 등 우애가 남달랐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만국평화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다. 대한제국은 김창숙을 유림 대표로 보내 사정을 폭로하게 한다. 유천은 곽종석과 함께 장서의 대표로 이름을 올렸다. 파리장서사건이다. 
 
 
‘靜中觀物化(정중관물화)’ 글씨. [사진 송의호]

‘靜中觀物化(정중관물화)’ 글씨. [사진 송의호]

 
유천은 당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사태를 바로잡아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도리어 남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니 참으로 부끄럽다.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죽음인들 마다하겠는가.”
 
유천은 장서가 파리에 도착한 뒤 서명한 선비들과 함께 일본에 체포되었다. 유천은 성산감옥에서 심문이 이루어지는 동안 당당했다고 한다. ‘정중관물화’는 지사의 바로 그 기운이 느껴지는 편액이다. 서거 100주기를 앞두고 모습을 드러낸 편액에 후손이 고유를 한 까닭이다.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yeeho12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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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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