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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공들여 만든 가설계 도면, 꿀꺽한 얌체 의사

기자
손웅익 사진 손웅익
손웅익의 작은집이야기(7)
산부인과. [사진 tokyomadam]

산부인과. [사진 tokyomadam]

 
언젠가 제법 규모가 큰 산부인과 병원 디자인을 의뢰받은 적이 있다.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가까운 지인이 그 일을 소개했다. 먼저 관할 관청에서 관련 서류를 발급받아 그 땅이 가지는 여러 가지 건축법적 조건을 검토했다. 지역 지구에 따른 법적인 허용과 제약 조건, 건폐율과 용적률 한계, 주차장 설치기준, 건축심의 등 인허가 절차도 확인했다. 
 
현장에 가서 주변 현황도 자세히 살폈다. 해당 필지와 접한 도로조건, 향 조건, 대지의 고저 차, 수목 여부, 장애물 여부, 각종 인프라, 해당 필지와 인접한 주변 건물 현황 등 현장 상황을 상세하게 파악했다. 
 
이러한 기본 조건을 정리한 후 비로소 그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러 갔다. 그에게 여러 가지 요구 사항을 들은 다음 취합한 기본적인 조건을 가지고 디자인을 시작했다. 여러 가지 대안을 검토하고 스케치하면서 도면화하는 데 여러 날이 걸렸다.
 
그렇게 완성된 도면을 산부인과 의사에게 제공하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가타부타 답변이 없었다. 지인의 소개로 시작한 일이라 계약을 다그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당 구청 건축과에 들렀다가 건축심의가 완료된 어느 도면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눈에 익숙한 디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건축 도면. [사진 Pixabay]

건축 도면. [사진 Pixabay]

 
그것은 필자가 디자인한 그 산부인과 병원이었다. 필자의 디자인을 어떤 건축사사무소에서 그대로 베껴 건축심의를 받았던 것이다.
 
‘가설계’라는 용어가 있다. 비공식적 건축설계 용어의 하나지만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축사들이 가장 싫어한다. 건축설계는 단계별로 기획설계, 계획설계, 기본설계, 실시설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기획설계는 대지가 가지는 몇 가지 자연조건이나 법적 요건을 바탕으로 대략의 규모와 용도 등을 검토하는 단계다. 
 
이 단계는 특별히 디자인 아이디어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계획설계는 다르다. 계획설계는 기획설계와 건축주의 요구사항을 바탕으로 건축물의 규모와 디자인의 방향을 어느 정도 결정할 수 있는 결과물이 나오는 단계다. 
 
건축사는 이 단계에서 수많은 대안을 검토하고 스케치하면서 디자인의 큰 방향을 잡기 위해 고심한다. 그런 면에서 가장 중요한 디자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계획설계를 누군가 ‘가설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건축주의 얌체 짓
분노. [사진 Pexels]

분노. [사진 Pexels]

 
문제는 가설계를 무료라고 인식하고 있는 건축주가 많다는 것이다. 아니 대부분의 건축주는 무료로 가설계를 요구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심지어 몇 군데 건축사사무소에서 가설계 도면을 받아보는 건축주도 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안을 가지고 가장 설계비가 저렴한 사무소와 설계 계약을 체결하는 얌체 짓을 한다. 
 
그 산부인과 의사도 필자에게서 가설계 도면을 받아서 설계비가 좀 저렴한 사무소에 디자인을 넘겨주고 설계계약을 했던 것이다. 서울대학교 의대 졸업장을 병원로비에 전시해 두고 있는 그 의사는 대한민국 지식인 중 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필자는 전화로 아주 차분하고 예의 바르게 항의했지만 전혀 도덕적인 책임도 느끼지 못하는 그의 태도로 인해 극한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인내의 임계점 직전에 그가 최소한의 도덕적 책임을 느꼈는지 모기 목소리로 사과 발언을 했다.
 
디자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다 비슷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단 건축설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이런 상황을 초래한 책임에서 디자이너도 자유로울 수 없다. 계획설계를 무료로 건축주에게 제공하는 건축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을’의 처지를 교묘하게 악용하는 ‘갑’들의 횡포 앞에는 어쩔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디자인의 가치를 인정한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손웅익 프리랜서 건축가·수필가 badaspac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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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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