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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합에 굶주린 러시아를 울렸다

러시아 화가 바실리 페로프가 1872년 그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

러시아 화가 바실리 페로프가 1872년 그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

Фёдор М. Достоев́ ский
러시아의 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러시아와 유럽의 여러 도시를 전전했다. 그가 머물렀던 곳을 고려대 노문과 석영중 교수가 수 년간 직접 찾아다니며 대 소설가의 머릿속 ‘뇌 지도’를 다시 그렸다. <편집자>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1>
모스크바: ‘예언자’의 탄생

 
1880년 객석을 열광시킨 도스토옙스키의 푸슈킨 강연이 열렸던 모스크바 귀족회관. 현재는 ‘돔 소유조프’(하우스 오브 유니온)라고 불린다.

1880년 객석을 열광시킨 도스토옙스키의 푸슈킨 강연이 열렸던 모스크바 귀족회관. 현재는 ‘돔 소유조프’(하우스 오브 유니온)라고 불린다.

1880년 6월 8일, 모스크바 시내 귀족회관의 음악당 연단에서 어깨가 구부정한 초라한 행색의 남자가 3000여 청중을 향해 강연을 시작했다. 객석을 가득 메운 사람 중 그 누구도 1시간 뒤에 일어날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연사는 구겨진 싸구려 양복에 흰색 나비 넥타이를 삐뚜름하게 매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고 원고를 쥐고 있는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남자는 강연을 시작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청중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한 구절이 끝날 때마다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지는 바람에 40분이면 족할 강연이 1시간 넘게 걸렸다.  
 
마침내 남자가 연설을 마치고 객석을 향해 허리 굽혀 절을 했다. 순간 객석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가 숨을 들이마신 상태에서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홀의 뒤편부터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 우레와 같다는 것은 턱없이 진부하고 초라한 비유다. 이어지는 광란의 도가니는 그 어떤 말로도 제대로 묘사하기 어렵다.  
 
반쯤 넋이 나간 사람들은 모두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고함을 질러댔고, 엉엉 울었고, 생면부지의 옆 사람과 얼싸안았다. 연사의 옷자락이라도 만져보려고 강단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은 문자 그대로 ‘쓰나미’였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의 회고에 의하면 기둥과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부인들은 히스테릭한 괴성을 질러댔고 신사들은 연사의 발 아래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성자이시다, 예언자이시다”라고 소리쳤다. 어떤 청년은 울고불고 날뛰다가 급기야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실려 나갔다. 몇몇 평론가들의 지적처럼 이것은 “종교적 부흥회”, 혹은 우상 숭배 예식을 방불케 했다.  
 
이 놀라운 사태의 주인공은, 눈치채셨겠지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이 해 6월 5일 시작된 푸슈킨(1799~1837) 동상 제막식 기념 축제에 초청받아 푸슈킨에 관한 평론을 낭독했고, 청중은 그의 연설에 광란의 찬사로 호응한 것이다. 유명한 소설가가 오래전에 죽은 시인에 관한 글을 발표했는데 청중들이 감동에 겨워 기절을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이 믿기지 않는 에피소드는 당연히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한 것인가?  
  
민중의 승리 상징하는 푸슈킨 동상 제막식
모스크바 푸슈킨 광장(옛 스트라스트나야 광장)에 설치된 푸슈킨 동상

모스크바 푸슈킨 광장(옛 스트라스트나야 광장)에 설치된 푸슈킨 동상

사건을 이해하려면 우선 푸슈킨 축제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날의 황홀경을 갑자기 발생한 기이한 사건처럼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열광의 폭발 밑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두텁게 깔려 있었다. 러시아 역사의 첨예한 이념 대립, 문화와 정치의 역학관계, 그리고 국가와 민중의 해묵은 반목이 그것이다.  
 
푸슈킨 동상 제막은 처음부터 민간 주도로 진행된 사업이었다. 원래 푸슈킨의 지인 몇 명이 노후에 사비를 털어 자그마한 동상을 제작해 귀족학교 정원에 세우려 했던 것이 그만 일이 커지면서 거국적인 모금운동으로 발전했다. 민중이 자발적으로 모은 돈은 총 10만 6575루블로 수억 원에 해당되는 거금이었다. 유명인의 동상을 사비로 세운다는 것은 러시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푸슈킨은 그냥 유명인이 아니라 시인이었다. 시인은 러시아 문화와 역사에서 민중의 스승이자 교사로 숭앙받는 사람, 황제의 위상과 맞먹는다고 해서 ‘무관의 제왕’이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게다가 푸슈킨은 니콜라이 1세의 미움을 받아 유배당했던 시인, 러시아 혁명의 원조라 할 수 있는 12월 당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시인, 최소한 겉보기에 ‘반체제’시인이었다. 이런 시인의 동상을 민간 주도로 세운다는 것은 국가(State)와 민중(People) 간의 오랜 대립에서 민중이 승리했음을 과시하는 일종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여기에는 개방과 개혁이 불가피함을 감지한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도 한몫했다. 사회 분위기는 이전에 비해 확실히 덜 억압적이었다. 지식인들의 숙원이었던 농노 해방을 비롯한 일련의 획기적 정책의 도입으로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이 확산되고 있었다. 결국 황제도 동상 제막을 지지했고, 모스크바 두마(의회)는 초대 손님 전원의 숙박비를 지불하겠다는 통 큰 제안을 했다. 이렇게 문화적 회상에서 촉발된 행사는 정치사회적 사건으로 확대되고 변형됐다. 물론 러시아에서 정치적 의의가 배제된 순수한 문화 행사란 거의 없다. 그러나 푸슈킨 축제처럼 문화와 정치가 그토록 긴밀하게 합치된 경우도 많지는 않다.  
 
서구적인 투르게네프 vs 민족적인 도스토옙스키
동상 제막식은 러시아 전역에서 온 106개 대표단, 주지사 돌고루코프, 대주교 마카리, 작곡가 루빈슈타인과 차이콥스키,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등 정계와 문화계와 종교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개최됐다. 해외에서는 빅토르 위고와 알프레드 테니슨이 축전을 보내왔다. 일찌감치 여름 별장으로 떠났던 중산층 시민들은 제막식을 보기 위해 속속 도시로 되돌아왔다. 동상이 세워진 스트라스트나야 광장은 수 만 명의 군중으로 가득 찼다. 주변 모든 건물의 창문과 지붕은 25루블을 지불한 구경꾼들로 빼곡하게 메워졌다. 동상 맞은편 수도원에서는 죽은 시인을 위한 장엄한 추도식이 거행됐다. 루빈슈타인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는 메이어베어의 대관식 행진곡을 연주했다. 모스크바 전체가, 아니 러시아 전체가 들떠 있었다.  
 
그러나 푸슈킨 축제의 진짜 핵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당대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 ‘삼인방’은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그리고 톨스토이였다. 원래 예술이란 것 자체에 대해 심드렁하던 톨스토이는 “연애시 나부랭이나 쓰다가 결투에서 총 맞아 죽은 시인의 동상이 웬말이냐”며 일언지하에 참석을 거부했다.  
 
자연스럽게 문단의 주역은 투르게네프와 도스토옙스키로 압축됐다. 두 사람은 극과 극이었다. 투르게네프는 진보적이고 사회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이고 서구적인 모든 것을 대변했으며, 도스토옙스키는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이고 슬라브적이고 정교 그리스도교적인 모든 것을 대변했다. 두 사람의 대립은 사실상 서구파와 슬라브파,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로 찢겨있던 당대 러시아 사회의 분열과 대립을 고스란히 반영했다. 축제의 밑바닥에는 점점 심해지는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고 희망의 분위기 이면에는 러시아의 앞날에 대한 불안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 진영을 대표하는 작가가 무슨 말을 할지에 대해 시민들의 촉각이 곤두서 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결승전을 기대하는 심정으로, 그러나 그보다는 백 배 심각하게 두 작가의 ‘공연’을 기대하고 있었다.  
 
분열속 러시아 향한 상생의 외침에 열광
두 사람은 과연 무슨 말을 했을까? 투르게네프는 푸슈킨에 관한 문학비평을 발표했고 도스토옙스키는 상황이 요구하는 최적의 말을 했다. 투르게네프는 서구파적인 시각에서 유려하면서도 침착하게, 다소 학문적으로 푸슈킨을 평가했다. 반면 도스토옙스키는 푸슈킨에 관한 말이 아닌, 분열과 불안 속에 있던 러시아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했다. 화합과 화해와 상생과 공존을 강조했고 오로지 러시아인만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내공’을 지니고 있다고 역설했다. 서구파도 옳고 슬라브파도 옳다, 양 진영이 반목하는 것은 오해 때문이다, 러시아는 양자 모두를 필요로 한다, 라고 그는 외쳤다. 러시아인의 사명은 전세계적이고 전인류적인 것이며 완전히 러시아인이 된다는 것은 곧 모든 사람의 동포가 된다는 것이다, 푸슈킨은 바로 이것을 문학으로 증명해보였으며 그래서 퓨슈킨은 예언자다, 라고 그는 외쳤다.  
 
도스토옙스키 자신도 인정했듯 연설의 내용은 황당하고 환상적이고 비논리적이었다. 그러나 즉흥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청중에게 위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잡지에 연재하던 소설까지 중단해가며 몇 달 전부터 원고에 공을 들였다. 조국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스승’의 마음 깊은 곳에 담긴 진정성과 천재 작가의 냉정하게 계산된 말이 절묘하게 합쳐져서 청중의 감성 코드를 자극했고 그 결과는 투르게네프가 받은 의례적인 박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황홀경이었던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주장이 옳으냐 그르냐, 말이 되냐 안 되냐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의 말에 그토록 감동할 만큼 러시아는 화합에 굶주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 민중의 불안도 리얼한 것이었고, 화합에 대한 그들의 강렬한 희구도 리얼한 것이었고, 러시아인, 더 나아가 인간 모두의 내면에 있는 휴머니티를 강조한 도스토옙스키의 연설도 리얼한 것이었다. 비록 좌우로, 서구파와 슬라브파로 나뉘어있었지만,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 앞날에 대한 우려만큼은 모두가 공유하는 ‘진짜’현실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바로 이 현실에 위대한 예술가와 종교 지도자와 정치 사상가의 이미지가 합쳐진 ‘예언자’의 위상으로 응답했다.  
 
마침내 축제의 날이 저물었다. 밤이 깊은 시각에 그는 낮에 받은 거대한 화환을 짊어지고 숙소인 로스쿠트나야 호텔 33호실을 나섰다. 어두운 트베르스카야 거리를 뚜벅뚜벅 걸어 광장에 도착한 그는 푸슈킨 동상 앞에 화환을 바치고 엎드려 절했다. 눈물이 그의 주름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늘날 푸슈킨을 예언자라 부르는 독자는 별로 없다. 그러나 수많은 독자와 연구자가 도스토옙스키를 예언자라 부른다. 모스크바는 도스토옙스키가 탄생한 곳이고 그가 예언자로 ‘만들어진’곳이다. 우리가 도스토옙스키 지도를 그릴 때 모스크바에서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
 
 
석영중 :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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