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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려라 공부] 26살 차 이황·기대승, 13년간 편지 논쟁 … 사제는 학문의 동반자

큰별쌤 최태성 한국사 NIE
청소년 희망 직업 1위 ‘교사’
중·고교생들이 희망하는 직업은 10여 년째 ‘교사’가 1위입니다. 대체로 ‘교사라는 직업의 안정성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조선시대 사제지간 보니
관학 부실로 서원 등 사학 발달
학생들, 대학자 찾아 “가르침” 호소
스승 인격을 삶·배움의 지표 삼아
사제라도 학문 논할 땐 서로 예갖춰

학생에 의한 교사 폭행 등 ‘교권 추락’ 사례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청소년 희망직업 1위는 교사’라는 현실은 아이러니입니다. 교사들은 “옛날에는 제자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는데, 요즘은 교사가 학생 그림자도 밟아선 안 된다”며 씁쓸해합니다.
 
과거에는 어떠했을까요. 이번 주 ‘한국사 NIE’에선 조선시대의 사제지간을 다룹니다. 새해에는 교육 현장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훈훈한 미담이 많이 들려오길 기대합니다.
도산서원은 제자들이 퇴계 이황 사후에 그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퇴계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도산서당과 계상서당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했는데, 이곳의 터를 넓혀 제자들이 서원을 세웠다.

도산서원은 제자들이 퇴계 이황 사후에 그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퇴계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도산서당과 계상서당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했는데, 이곳의 터를 넓혀 제자들이 서원을 세웠다.

지난달 25일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발표(‘2017 초·중등 진로교육 현황 조사’)에 따르면 교사 직업이 11년째 중·고교생들의 희망 직업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올해의 경우 고교생 중 11.1%가, 중학생 중 12.6%가 희망 직업으로 교사를 꼽았다.
 
그런데도 사회적으론 ‘교권 추락이 심각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학생이 교사에게 폭행을 가하거나 욕설을 퍼붓는 사례도 심심찮게 보도된다. 교육부에 따르면 학생에 의한 교사 폭행은 2016년에만 89건으로 집계됐다. 교사가 학생으로부터 폭언·욕설을 듣는 일은 매년 1000건이 넘는다.
 
이 가운데 상당수 학생은 학습과 진로지도를 사교육에 의지한다. 교사들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속담을 언급하며 현실을 개탄한다. 성리학이 사회 지배 이념이던 조선시대에는 스승은 임금·부모와 같은 반열로 섬김의 대상이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표현은 스승의 높은 위상을 대변했다.
 
그런데 당시 스승의 개념은 현재의 교사와는 달랐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공교육 현장, 즉 학교를 기반으로 한다. 조선시대에도 국가가 지정한 교육기관이 존재했다. 조선시대의 공립학교는 ‘관학(官學)’이라 불렸다. 오늘날의 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成均館), 중·고교에 해당하는 향교(鄕校)·사부학당(四部學堂) 등이 여기에 해당했다. 사부학당은 서울에, 항교는 지방에 있었다. 국가는 이들 기관을 감독하기 위해 학령 등 여러 법규를 적용하고 재정적으로도 지원했다.
 
조선시대 성균관은 지금의 국립대학에 해당한다. 사진 속은 부설 건물인 명륜당.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이다.

조선시대 성균관은 지금의 국립대학에 해당한다. 사진 속은 부설 건물인 명륜당.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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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학당·향교에서 가르치는 업무를 담당한 관료는 교관(敎官)이라 불렸다. 오늘날로 치면 공교육 교사다. 교관직은 녹봉이 지급되지 않았고 출세와도 거리가 멀어 모두 기피하는 자리였다. 이 때문에 관료가 지방의 향교 교관으로 임명되면 사퇴하는 풍조까지 있었다. 교관직은 군역을 면제받고 싶어 하는 관료들이나 떠맡는 ‘천한 직임’으로까지 여겨졌다. 『연산군일기』에는 당시 교관의 모습이 비판적으로 기록돼 있다.
 
“고을 안에서 천거된 인재를 채용해 훈도(향교의 교사)로 삼으소서. 주현(州縣·지방)의 훈도와 교생(校生·학생)을 살펴보니 교생에는 여러 경전에 능통한 자가 있는데, 훈도는 한 경전에도 통(通·꿰뚫다)하지 못하므로 스승이 학생을 가르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학생이 도리어 스승을 가르치게 되니 진실로 탄식할 일입니다. 뇌물 청탁으로 훈도 직을 얻어 군역을 면하기 때문입니다.”(연산 1년 5월 28일)
 
관학의 부실은 사학(私學)의 발달로 이어졌다. 학생들은 수준이 떨어지는 관학을 뒤로하고 뛰어난 학자를 찾아가 자신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청했다. 비단과 술, 그리고 안주로 쓸 포(脯·말린 고기나 과일) 등을 선물하고 정중하게 가르침을 요청했다. 학자가 “제자로 거두겠다”고 허락하면 이때부터 스승과 제자의 관계, 사제지간이 형성됐다.
 
학생들이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스승으로 삼은 이들은 학문적 깨달음을 인격적으로 실현한 유학자들이었다. 스승의 인격은 제자들에게 학문은 물론 삶의 표준이 됐다. 학생이 많은 모이는 학자들은 서당 또는 서원 등을 세웠다. 제자들은 스승의 학설을 따르고 학통을 이어나가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여겼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사제지간은 꼭 수직적 관계만은 아니었다. 스승은 제자를 가르침의 대상이 아닌 학문의 동반자로 존중했다. 대표적 사제지간이 퇴계 이황(1501~70)과 그의 제자 기대승(1527~72)이었다.
 
서울에 있는 유일한 향교. 향교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현재의 공립 중·고교에 해당한다.

서울에 있는 유일한 향교. 향교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현재의 공립 중·고교에 해당한다.

기대승은 서른한 살에 과거에 급제하고 이황을 스승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당시 이황의 나이는 57세로 둘 사이는 스물여섯 살 차이가 났다. 직급의 격차도 까마득했다. 기대승은 종9품으로 오늘날의 9급 공무원에 해당했다. 반면 이황은 성균관 대사성을 마치고 공조참판 자리에 있었다. 성균관 대사성은 국립대 총장에 해당하고, 공조참판은 현재의 장관급이었다.
 
하지만 이황과 기대승은 13년간 1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진지하게 학문적 교류를 이어갔다. 특히 이 둘이 펼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이 유명하다. 이황은 인간의 도덕심은 이(理)에서, 인간의 감성은 기(氣)에서 별도로 발현된다는 이기이원론을 주장했다. 기대승은 스승의 논리를 반박하며 이와 기는 하나로 연결됐다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했다.
 
공방은 8년간 치열하게 이어졌다. 이황의 논리에 기대승이 의문을 제기하면 이황이 답해주고 다시 기대승이 반론하는 식이었다. 날 선 토론이 오가는 중에도 이황은 기대승의 학식을 존중하고 그의 논리를 상당 부분 받아들여 자기 생각을 수정했다. 둘 사이에 오간 편지에는 스승인 이황이 젊은 하급 관리에 불과한 기대승에게 하대한 흔적이 한 차례도 없다. 시종일관 동료 학자를 대하듯 깍듯하게 예를 갖췄다.
 
조선시대 향교 교관들의 실력이 학생보다 형편 없었다는 사실이 기록 된 『연산군일기』.

조선시대 향교 교관들의 실력이 학생보다 형편 없었다는 사실이 기록 된 『연산군일기』.

이러한 스승의 태도에 제자들은 더 큰 신뢰와 공경으로 답했다. 스승의 생전에는 부모를 섬기듯 했고, 사후엔 스승을 기리며 학통을 잇는 것을 의무로 생각했다.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1762~1836)이 전남 강진으로 유배 갔을 때 제자로 삼은 황상 역시 그런 예다.
 
황상은 당시 15세로 고을 아전의 아들이었다. 그는 정약용이 동네 주막집 골방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공부가 하고 싶으나 자신감이 없던 황상은 자신과 같은 둔재도 학문을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정약용은 영리하고 많은 재주를 타고난 사람보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자가 학자의 재목이라고 답하고 제자로 삼았다.
 
정약용은 16년간 황상을 가르쳤다. 유배에서 풀려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시 마제로 돌아온 뒤에도 황상에게 학문에 정진하라는 충고를 담은 편지를 지속적으로 보냈다. 황상은 신분이 낮아 과거에 응시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의 목표로 삼아 정진했다. 정약용의 사후에도 스승의 제사를 지내며 기렸다.
 
이처럼 선조들이 그림자조차 밟지 않고 공경을 표했던 스승은 오늘날 공립학교 교사에 해당하는 관학의 교관이 아니라 서당·서원 등 사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학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교관이 스승으로 불리지 못한 까닭은 뭘까. 관직이 낮아서도, 학문적 소양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본업인 가르침에 태만하고 제자의 학문적 성취보다 자신이 군역을 면하는 혜택에만 관심을 보인 것이 제자들의 외면을 자초한 게 아닐까.
 
반면 이황·정약용은 대석학임에도 나이 어리고 신분도 낮은 제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생각을 수정해 나가는 열린 자세를 보였다. 유학 경전인 『예기』에 나오는 교학상장(敎學相長·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함)을 먼저 실천한 스승을 제자들은 섬기고 공경했다.
 
새해에는 교사가 진정한 스승으로 존경받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이를 위해 스승으로 불렸던 선조들의 모습을 마음에 새겨보면 어떨까.
 
 
최태성 한국사 강사, 정리=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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