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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년대 ‘공연 한류’ 이끈 무대미술 1세대 이병복

2015년 이병복 선생(왼쪽)의 출판 기념회에서 축하 인사를 하는 김정옥씨. [사진 청강문화산업대]

2015년 이병복 선생(왼쪽)의 출판 기념회에서 축하 인사를 하는 김정옥씨. [사진 청강문화산업대]

이병복 선생님, 지난 29일 90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해외에서 접하니 그 빈 공간과 시간이 한꺼번에 몰려듭니다. 우리 연극계의 대모로 불리던 선생이 무대 인생 60년, 극단 ‘자유’ 대표 40년을 맞아 2006년 개최한 전시회 명칭이 ‘이병복은 없다’였지요. 굳이 ‘이병복 없다’고 외치더니 이제 정말 떠나셨군요.
 

‘연극 산증인’ 영전에 드리는 편지

1966년 극단 자유의 창단 공연 ‘따라지의 향연’을 시작으로 ‘무엇이 될고 하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피의 결혼’ 등 100편 넘는 공연을 반세기 넘게 국내외 무대에 올리며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습니다. 우리 둘 다 개성이 강해 이견이 없지 않았지만 이렇게 오래 큰 말썽없이 함께 일해 온 것이 기적 같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합니다.
 
60년대 초반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당신은 패션디자이너 1세대로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화여대 영문학과 재학 때 연극반 활동, 이후 여인소극장 동인 시절 연극적 창조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중 나와 만나 새로운 극단을 만들자는 데 뜻을 모았지요. 수년 전 먼저 세상을 뜬 부군 권옥연 화백과의 인연도 힘이 됐습니다.
 
우리는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며 막을 올릴 때마다 의기투합했습니다. 국내 예술적·흥행적 성공을 토대로 70~80년대 유럽·북미는 물론 아프리카·남미 등 제3세계까지 몰려 다니며 대한민국 연극의 기세를 한껏 올리지 않았습니까. 냉전 시대라 해외 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었지요. 당시 우리 극단의 국제적 활약은 대한민국 연극사의 큰 자산이라고 자부합니다. 고인은 70년대 초부터 세계무대미술가협회 한국 대표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 무대미술, 나아가 무대공연이 해외에서 인정받는 데 앞장섰지요. 요즘 식으로 하면 ‘공연 한류’의 선봉장이었습니다.
 
의상전문가이자 무대미술가인 고인이 극단 대표를 40년간 맡은 것은 극단 자유의 ‘집단 창작’ 정신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작품의 선정부터 제작 과정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와 극단 구성원이 협업하는 시스템이었지요. 고인의 자유로운 영혼과 창조적 예술성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무대의상과 미술장식으로, 사실주의에 경도된 한국 연극계에 실험주의와 추상연극의 자양분을 뿌렸습니다. ‘무대는 당신이 알아서 잘 꾸려 달라’고만 저는 주문했고, 연출가와 연기자가 최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를 정말 잘 만들어 주셨지요.
 
‘우리는 죽지 않았다. 죽어도 죽지 않았다.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고 함께 외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대표작 ‘무엇이 될고 하니’의 대사에서 따온 극단 자유의 구호 말입니다. 저승에서도 기죽지 않고 ‘이병복은 있다’고 휘젓고 다니실 거라 믿습니다.
 
◆이병복 선생
1927년 경북 영천 만석꾼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이화여대 영문과 재학 중 연극반 활동을 통해 연극과 인연을 맺었다. 한국 근·현대 연극사에서 최초로 무대미술과 무대의상의 개념을 정립한 연극계 ‘대모’로서 한지·삼베 등 전통 재료를 이용한 한국적 이미지를 무대에 형상화하는 등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개척했다. 유족으로는 권유진(첼리스트)·이나(재불 화가)씨가 있다.
 
김정옥 극단 자유 예술감독·예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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