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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왜란 당시 8개월 새 승패 엇갈린 진주성, 왜?"



【서울=뉴시스】김정환 기자 = "아! 진주성."

임진왜란 당시 두 차례 큰 전투가 벌어졌던 진주성.당시 경상도 일대를 관장하는 가장 큰 고을이었던 이 성은 전라도로 진군하기 위해 반드시 손아귀에 넣어야 하는 요충지였다.

1592년 10월 벌어진 1차전은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등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는 '진주대첩'으로 역사에 기록됐지만, 이듬해인 1593년 6월 2차전은 패전으로 끝나고 말았다.

일 년도 안 되는 사이 그 작은 성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KBS가 오는 28~29일 1TV에서 방송하는 2부작 역사 다큐멘터리 '특별기획 – 진주대첩'에서 승패의 갈림길을 짚어본다.

이를 위해 제작진은 1년간의 치밀한 취재와 풍부한 자료 고증을 통해 승전의 조건과 패전의 이유를 철저하게 분석했으며, 진주대첩을 다룬 뮤지컬과의 컬래버레이션 등 새로운 영상 문법으로 시청자에게 선보인다.

28일 오후 9시40분부터 제1부 '승전의 조건 – 통합'이 전파를 탄다.

1592년 진주대첩 당시 진주성 수성장은 진주목사 김시민이었다. 그는 군사 남다른 리더십으로 병사 3800명과 2만 성민의 전폭적인 신뢰와 치밀한 전술로 2만 왜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내 마침내 대첩을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이 전투에서 안타깝게도 순국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왜군은 분열했다.

진주성 공략에 나선 왜장들은 그들의 독특한 전쟁 문화로 장수들끼리 공을 다투는 '쟁공(爭功)'에 몰입했다. 이때문에 그들은 날마다 주장(主將)을 바꿔 진주성을 공격하게 돼 전력을 집중하지 못 했으며, 전술마저도 단순해 결국 패퇴했다.

무기 체계는 의외로 조선군이 왜군을 압도했다.

당시 왜군은 신무기 '조총'으로 무장했는데 이에 맞선 진주성의 조선군은 대형화기 '총통'을 보유했다. 화력 면에서 총통이 조총보다 강했다. 조선군 개인 화기인 활도 발사 속도나 성능 면에서 결코 조총에 뒤지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개발한 비격진천뢰 등도 수성에 나선 조선군에게 힘을 보탰다.

조선군에는 비밀 병기가 있었다. 바로 '의병'이다.

왜란 당시 가장 먼저 창의한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한 수많은 의병이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괴롭혔다.

29일 같은 시간에는 제2부 '패전의 원인 – 갈등'이 뒤를 잇는다.

진주대첩 8개월여가 지나자 진주성에 또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지난 패전의 굴욕을 갚고, 조선 구원에 나선 명과의 강화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차지하기 위해 진주성을 함락시키라는 특명을 내린다.

이에 10만 왜군이 진주성을 에워싼다.

왜군의 공격이 임박하자 권율을 비롯한 관군과 곽재우 등 의병장이 의령에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

진주성을 지키자는 의견과 포기하자는 의견이 팽팽했다. 결국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기로 해 관군은 성을 버렸고, 의병도 구원을 포기했다.

결국 김천일 등 소수 의병과 관군이 6만 성민과 함께 수성에 나서야 햇다.

문제는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갖추지 못 했다는 사실이다.

진주성에는 의병장 김천일 외에도 경상우병사 최경회, 진주목사 서예원 등 많은 지휘관이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진주대첩 당시에는 김시민이 있었지만, 그는 더는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투를 앞두고 경상감사 김성일마저 병사해 최고 지휘관 부재 상황이 빚어지고 말았다.

철저하게 고립된 상황에서 사분오열된 진주성을 공격하는 왜군은 지난 전투와 확연히 달랐다.

맹장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등 수하의 최정예군이었다. 바로 한양은 물론 평양을 점령하고, 몽진한 선조를 뒤쫓아 함경도까지 북상했던 그들이었다.

신무기도 준비했다. 대표적인 공성 무기가 바로 '귀갑차'였다. 여기에 왜군은 심리전, 다양한 경로의 공격 등 전술에도 변화를 줬다.

결국 조선군은 무릎을 꿇었고, 진주성을 점령한 왜군은 조선군은 물론 양민 심지어 가축까지 학살하며 지난 패배를 앙갚음했다.

KBS는 "청사에 빛나는 1차전, 진주대첩은 진주성민과 조선군의 협력, 의병의 협조 등 통합이 있어 가능했다"면서 "그러나 2차전에서는 달랐다. 왜군은 지난 패전에서 교훈을 찾았으나 수성군은 분열로 인한 고립을 극복하지 못 했다.진주성 패전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내부 갈등과 불신이었다"고 짚었다.

ace@newsis.com

<저작권자ⓒ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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