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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정체성 무시, 상상력 획일화 맞선 저항은 무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상상력, 동양 신화
정지영 화가

정지영 화가

유럽의 시골에 갔을 때 엄청나게 큰 호박을 보고 “아! 요정이 신데렐라를 위해 호박에 마술을 걸어 마차를 만들어준다는 스토리가 여기서 나왔구나”하고 고개를 끄떡인 적이 있었다. 우리도 호박이 있긴 하지만 주로 애호박을 즐겨 먹는 상황에서 (늙은 호박도 먹긴 하나 엄청나게 크진 않다) 마차를 상상하기란 어림없어 보였다. 또 도시마다 쿠키, 사탕 등 각종 과자가 발달한 것을 보고 “그러고 보니 ‘헨젤과 그레텔’에서의 과자로 만든 마녀의 집 스토리가 여기서 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글쎄, 어쩌다 한과를 먹는 우리 현실에서 그것으로 집을 짓는다는 상상 역시 어려울 것 같았다. 물론 피상적인 관찰로 성급하게 스토리의 발생을 논단하는 것은 경솔한 일일 수 있다. 유럽문화에 대한 심후한 통찰도 사실 결여되어 있다. 다만 오해를 무릅쓰고 이러한 사견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스토리 혹은 상상력의 풍토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중국의 잔 다르크 ‘목란’ 스토리
할리우드 영화 ‘뮬란’으로 각색
백인 남성 선호 게이샤 이미지로
할리우드, 미국식 획일화 자행

동서양 각자의 고유성 지닌 신화
다양한 관점으로 존중 받고
스토리 풍요롭게 하는 원천 돼야

 
 
최소한의 문화적 저항도 사라져 공허
언젠가 ‘마법의 성’이라는 노래가 모두의 마음을 동화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 적이 있었다. 선율도 아름다웠지만 마법에 걸려 성에 갇힌 공주를 구한다는 가사 또한 심금을 울렸다.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남자들은 용감한 왕자나 기사가 된 것 같았고 여자들은 마법에 걸린 예쁜 공주라도 된 기분에 사로잡혔으니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중세 봉건제가 성립된 적 없는 우리 역사의 풍토에서 영주가 다스리는 그림 같은 성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거기에 사는 왕자와 공주의 로맨스도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까 실체가 없는 그림자 같은 스토리임에도 우리는 한껏 도취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생각에 대해서는 무슨 생뚱맞은 시비냐는 힐난이 있을 수 있다. 문학, 예술의 시공을 넘어선 감동의 보편성을 들어 부적절한 견해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 글로벌 시대에 문화민족주의가 가당키나 한 것인가 하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모든 반박이 이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최소한의 문화적 저항마저도 사라졌다는 생각에 어딘가 공허한 느낌을 금치 못한다면 그것은 필자만의 편협한 감상에 불과한 것일까?
 
사태는 글로벌 시대에 들어와 강대국의 문화산업이 번영을 구가하면서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할리우드 문화산업 즉 디즈니는 이제 ‘백설공주’만을 고수하지 않는다. 글로벌 시대의 마케팅 전략에 걸맞게 ‘흑설공주’나 ‘황설공주’까지 제작해야 전 세계 인종의 소비자를 겨냥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중국의 잔 다르크라 할 ‘목란(木蘭)’을 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한 ‘뮬란(Mulan)’이다. 그런데 ‘뮬란’이 동양의 풍토성을 제대로 반영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목란’이 아니라 미국의 ‘뮬란’인 것이다. 병든 아버지를 위해 남장하고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는 효녀 목란의 모습은 애니메이션 ‘뮬란’에서 백인 남성들이 애호하는 일본 게이샤 이미지로 뒤바뀌고 동양의 신수(神獸) 용은 에디 머피의 호들갑 떠는 목소리로 더빙된 까불이 애완동물로 전락된다.
 
다시 말해 할리우드 문화산업은 타자의 정체성을 용인하지 않는다. 스토리 혹은 상상력의 제국주의는 제1세계의 문화산업을 통해 ‘미국식’ 내지 ‘서양식’ 획일화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리하여 효녀 목란은 할리우드를 우회하여 돌아와 도리어 우리에게 게이샤 이미지로 각인된다. ‘뮬란’의 뒤를 이어 제작된 애니메이션 ‘쿵푸 팬더’가 처음 상영되었을 때 중국의 지식인들이 대거 반발했던 것 역시 할리우드가 타자의 문화정체성을 왜곡한다는 사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스토리와 상상력이 특정한 지역, 특정한 종족의 그것으로 획일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 더군다나 수많은 지역, 다양한 종족의 문화가 교차하고 횡단하는 이 시점에서 정치, 경제적 권리만큼이나 스토리와 상상력의 세계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생각이 온당한 것이라면 세계화의 대세를 따라가는 한편 획일화에 대한 문화적 저항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을 국수주의나 편협한 문화민족주의로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스토리와 상상력의 원조인 신화를 통해 동서양의 공통적인 원형 심상은 물론 통약(通約)될 수 없는 차이점을 사유해 보고 상대방 문화에 대한 공존적, 호혜적 차원의 이해를 추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것이다.
 
'해리포터'와 '뮬란'(오른쪽)

'해리포터'와 '뮬란'(오른쪽)

가령 동서양의 창조신화는 양자의 세계관, 기본 관념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동서양의 일부 창조신화가 거인의 신체가 변화하여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이른바 거인신체화생(巨人身體化生) 모티프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도의 푸루샤로부터 게르만의 이미르에 이르기까지 인도-유러피언 계통의 거인신화에서는 다른 신들이 거인을 살해한 후 신체를 절단하거나 해체하여 산과 강, 숲 등 세상을 창조한다. 그런데 동양의 거인신화는 유일하게 다른 창조의 양상을 보인다. 혼돈 속에서 태어난 중국의 거인 반고는 몇 만 년을 혼자 살다가 자연사한다. 죽음 후에 그의 몸은 각 부분이 저절로 산과 강, 숲 등으로 변화한다. 두 신화의 차이는 흥미롭다.
 
첫째, 창조의 동력이 서양은 살해이고 동양은 자연사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양의 경우 외부적 충격에 의한 반응으로 발전이 일어난다는 이른바 충격(Impact)-반응(Response) 이론 혹은 변증법적 사유의 맹아를 엿볼 수 있다. 서양의 학자들이 근대의 충격에 동양의 국가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중점을 두고 역사를 설명하려 했던 태도나, 칼 마르크스가 인도를 밀폐된 관 속의 미이라에 비유하면서 관 뚜껑이 깨져 외부의 신선한 공기가 들어가야 변화가 일어나듯이 영국의 식민 지배를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했던 입장 같은 것들은 바로 이러한 창조신화의 관념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반면 창조의 동력을 자연사에서 찾고 있는 동양은 인위적, 외부적인 충격을 가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내재발전론 혹은 작위하지 않고 자연의 순리에 따른다는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의 단초를 보여준다.  
 
둘째, 창조의 방식이 서양은 절단을 통해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동양은 통째로인 몸 상태에서의 변모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양의 분석적 사고와 동양의 전일적, 통합적 사고의 차이를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인신체화생 신화, 동서양 출발부터 달라
동양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 ‘반고’

동양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 ‘반고’

중국의 거인신체화생 신화인 반고신화는 삼국시대 오(吳)나라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기록된 것으로 보아 본래 중국에 없던 이야기였는데 인도 쪽으로부터 흘러들어 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처음 전래되었을 때는 서양의 경우처럼 거인을 살해하여 세상을 창조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은 동양의 사고나 관념에 맞지 않아 귀에 거슬렸을 것이고 그래서 점차 동양의 정서에 맞게 고쳐져서 오늘날 전해지는 것과 같이 자연사의 이야기 형태로 조정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거인신체화생 신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동서양의 상이한 세계관을 추출해 보았는데 다소 거칠긴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동서양 신화가 풍토, 종족 등의 차이로 인해 출발부터 각자의 고유성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유성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읽는 다양한 관점으로 존중되어 스토리와 상상력을 풍요롭게 만드는 원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오늘날 제1세계의 문화산업은 이들 신화적 다양성을 왜곡하여 특정한 지역과 종족의 고유성으로 획일화시키는 데에 앞장서고 있다.  예컨대 그리스로마신화와 해리포터 시리즈 종류의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 줄곧 탐닉한 어린이는 언젠가 용을 나쁜 동물이라고 할지 모른다.(벌써 그런 아이들이 있다!) 서양신화에서 용은 사악한 괴물로서 영웅에 의해 처단되어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여전히 용꿈을 꾸면 복권 사러갈 생각을 하지만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용꿈을 꾸면 복권 사러 갈까? 아마 가지 않을 것이다. 대신 재수 없다고 할지 모른다. 이는 너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서울대 중문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하버드-옌칭 연구소와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에서 연구생활을 했다. 중국어문학회 회장, 비교문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산해경 역주』『이야기 동양신화』『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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