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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군·학생군에 포위된 상단부대 속속 투항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60>
광저우 상단반란 진압 후, 황푸군관학교 1기생과 교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924년 11월. 광저우. [사진 김명호 제공]

광저우 상단반란 진압 후, 황푸군관학교 1기생과 교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924년 11월. 광저우. [사진 김명호 제공]

무슨 일이건 명분(名分)이 중요하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허술한 구석이 많다. 명분과 핑계를 혼동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류 역사도 마찬가지다. 핑계를 명분으로 둔갑시킬 줄 아는 사람에게 후한 점수를 줬다. 난세의 지도자들은 명분 만들어 내는 기술이 탁월했다. 중국도 그랬다. 쑨원, 장제스, 마오쩌둥 할 것 없이 모두가 명분 제조기였다.
 
광저우(廣州)에서 벌어진 상인반란 사건은 혁명정부에 좋은 핑곗거리였다. 1924년 10월 10일, 상단 무장병력이 쌍십절 기념행렬에 참가한 황푸군관학교 학생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2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상단 하급 지휘관들은 무지막지했다. 군중들 보는 앞에서 시신을 발로 차고, 잔혹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일이 이쯤 되자, 광저우를 포기하고 북벌 준비에 한창이던 쑨원(孫文·손문)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지원군 3000명을 광저우로 급파하며 군관학교 교장 장제스(蔣介石·장개석)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요직을 차지한 장제스는 머리 회전이 빨랐다. 행동도 민첩했다. 군관학교 업무를 대신할 사람을 물색했다. 술과 여자라면 시도 때도 가리지 않는 소련인 고문이 떠올랐다. 돈 한 뭉치 쥐여 주며 부탁했다. “나는 학생 400명 데리고 광저우로 간다. 아무 일 하지 말고 내방에 앉아만 있어라.” 장제스는 경무장한 학생 400명을 광저우에 파견했다. 학생들은 교장이 시키는 대로 했다. 확성기 들고 거리와 골목을 누볐다. “오늘 밤 야간 훈련을 실시한다. 시민들은 놀라거나 동요하지 말기 바란다.”
 
해 질 무렵, 완전무장한 생도들이 바다를 건넜다. 황푸 1기 출신인 전 중공 원수 한 사람이 회고를 남겼다. “군관학교는 광저우가 코앞인 작은 섬에 있었다. 우리가 학교 연락사무소가 있는 부두에 상륙할 무렵 큰비가 내렸다. 앞이 안 보일 정도였지만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발걸음이 힘차고 일사불란했다. 찻집과 음식점, 상가 인근에 몰려 있던 시민들은 멋있다며 탄성을 질렀다. 여기저기서 굴러 들어온 잡군(雜軍)에 눈살 찌푸린 지 오래다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생도들은 성(省) 정부청사에 대기하며 명령을 기다렸다. 훈련은 심야에 시작됐다. 지휘관의 입에서 첫 번째 명령이 떨어졌다. “상단 반란군을 포위해라. 상단 측이 공격해도 명령 있을 때까지 응사하지 마라. 교장의 명령이다.” 상단 측도 부대를 출동시켰다. 소규모 충돌이 벌어졌다. 부상자는 있어도, 사망자는 없었다. 핑곗거리를 찾던 장제스는 실망했다. 새벽 4시 무렵, 학수고대하던 사망자가 발생했다. 장제스가 직접 명령을 내렸다. “군사훈련 중인 학생들에게 상단부대가 공격을 가했다. 훈련을 중단한다. 반란군을 섬멸해라.”
 
쑨원이 파견한 정부군과 학생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크고 작은 거리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분할 포위된 상단부대는 용병이나 다름없었다. 속속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저항이 심했던 상단 주력부대도 반나절 만에 백기를 들었다. 광저우 상단 단장 천렌보(陳廉伯·진렴백)는 대세를 파악했다. 단골 양복점에 쑨원의 대원수 복장과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해서 입고 다니던, 이상한 복장을 집어 던지고 조계(租界)로 도망쳤다. 영국은 천렌보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몰래 홍콩으로 빼돌렸다. 이틀 후, 상단 부단장이 황푸군관학교로 장제스를 찾아왔다. 정식으로 화해를 간청했다. 혁명정부도 상단의 요청을 수락했다. 천렌보 등 9명에 수배령을 내리고 상단의 무장을 해제하는 선에서 끝내 버렸다.
 
상단부대와의 전투를 일선에서 지휘한 황푸군관학교 교관들. 1925년 1월 황푸군관학교 교도단(敎導團) 문전.

상단부대와의 전투를 일선에서 지휘한 황푸군관학교 교관들. 1925년 1월 황푸군관학교 교도단(敎導團) 문전.

에피소드도 있었다. 전투 과정에서 천껑(陳赓·진갱)은 학생군 14명으로 구성된 기관총부대에 배속됐다. 도망치던 상단부대 중견지휘관을 붙잡았다. 예쁜 군도(軍刀)를 차고 있는 잘생긴 청년이었다. 천껑은 노고를 치하하러 온 장제스에게 군도를 바쳤다. 정교한 군도를 본 장제스는 흡족했다. 받는 순간 괴성 소리와 함께 군도의 주인이 학생군을 밀치고 달려 나왔다. 어찌나 몸이 날래던지 동작이 번갯불 같았다. 순식간에 장제스가 탄 말 앞까지 내달았다. 천껑이 들고 있던 군도의 손잡이를 나꿔챘다. 시퍼런 칼날이 장제스의 목을 향하는 순간 천껑이 몸을 날렸다. 칼을 쥔 반란군 지휘관의 손목을 움켜쥐고 비틀어 버렸다. 말도 놀랐다. 앞발을 들고 몸이 치솟았다. 그 바람에 장제스는 말에서 떨어졌다. 몸을 일으킨 장제스는 식은땀이 흘렀다.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며 천껑에게 손짓했다. 부동자세를 취한 생명의 은인 바라보며 씩 웃었다. 엉덩이 두드리며 한마디 했다. “장군감이다.”
 
31년이 흘렀다. 그간 별일이 다 있었다. 1955년 9월 27일 오후, 베이징에서 중국인민공화국 인민해방군 계급장 수여식이 열렸다. 천껑은 종신직인 대장 계급장을 받았다. 대만의 장제스도 소식을 들었다. 천껑이 대장이 됐다며 흡족해했다.
 
최근 “천렌보는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광저우 상단 반란은 쑨원의 북벌을 저지하기 위해 영국이 천렌보를 부추겨 일어난 일”이라는 설이 제기됐다. 그럴듯한 얘기지만, 워낙 복잡했던 시대 일이라 확인할 방법은 없다.
 
 
김명호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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