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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 안정성과 투명 경영

사설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그룹 순환출자와 관련해 2년 전 내렸던 유권해석을 뒤집었다. 공정위는 2015년 12월 순환출자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그해 9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으로 삼성그룹의 순환출자 고리에 변화가 생기자 이를 순환출자 강화로 해석하고 삼성SDI가 보유한 삼성물산 주식 총 904만 주 가운데 500만 주를 매각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주 공정위는 유권해석을 바꿔 두 회사의 합병을 새로운 순환출자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삼성SDI는 보유 중인 삼성물산 주식 404만 주를 추가로 매각해야 한다.
 
이번 공정위 결정은 우리 사회의 해묵은 문제인 ‘제도적 불안정성(institutional instability)’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권의 성격이나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법규의 해석과 집행이 순식간에 바뀌는 행태다. 그때마다 정권 담당자 등은 이런저런 근거와 정당화 논리는 내놓는다. 이번에 공정위는 “기존 가이드라인은 순환출자 고리의 경제적 실질이 동일하다는 점을 근거로 순환출자 강화에 해당한다고 발표했지만 이번 전원회의에서는 순환출자가 형성된 것으로 판단했고, 외부 전문가의 의견도 일치한다”고 발표했다.
 
공정위가 내놓은 논리의 타당성이나 근거를 하나하나 따져봐야 실익이 없다. 정부 스스로가 잘못 판단해 내린 결정이라면 가급적 빨리 바로잡는 것이 필요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역사적인 경험을 되돌아보면 정의를 앞세워 제도적 안정성을 흔드는 것에 대한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산업혁명은 근대 초기 산업 규모나 과학기술 측면에서 가장 뛰어났던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에서 시작됐다. 다양한 원인과 요인이 있겠지만 요즘 서유럽 전문가들은 영국의 제도적 안정성에 주목하고 있다. 영국은 17세기 말 일어난 명예혁명 이후 한 세기 넘게 상거래와 금융에 관한 법 체계에 큰 변화가 없었다. 왕당파와 의회파가 교차하면서 집권했지만 법규의 해석과 집행은 차이가 크지 않았다.
 
반면 절대왕정인 프랑스는 공권력의 상징인 왕의 변덕에 따라 법규가 춤을 췄다. 그럴수록 뇌물 등 투명하지 않은 수단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시장에서의 치열한 경쟁 대신 특혜와 특권이 판을 쳤다. 결국 프랑스는 유럽뿐 아니라 세계의 경제적, 정치적 패권을 영국에 넘겨줬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는 제도적 안정과 이윤에 대한 욕망을 시장경제가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필수 요건으로 제시한다.
 
이제 우리도 제도적 안정을 고민할 때다. 몇 차례 정권 교체도 경험했다. 올해엔 대통령 탄핵을 통해 정권이 바뀌었다. 사회 여러 부문에서 변화의 요구가 분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런 때일수록 게임의 룰을 바꾸거나 재해석할 때는 긴 호흡이 필요하다. 올 8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관련 재판에서 합병과 관련해 공정위와 청와대에 대한 삼성의 로비가 있었다고 판결한 것이 공정위의 이번 결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과거 결정까지 뒤집을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경제 발전의 장기적 틀을 안정화하기 위해서라도 정파적 판단을 잠시 접어둘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기업인들도 변화하는 경영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투명하지 않은 방법으로 얻어낸 이익은 수명이 길 수 없다는 점이 갈수록 명확해지고 있다. 재판부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이 독대한 것을 묵시적 청탁으로 판단했다. 또 다른 재판부는 계열사를 동원해 총수 일가에게 부당 급여를 지급한 것이 배임에 해당된다며 22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게 징역 1년 8개월, 신격호 총괄회장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신 회장은 집행유예를 받았고, 신 총괄회장은 고령을 이유로 법정 구속은 모면했지만 기업 사유화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은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있다.
 
우리 사회의 여론 역시 마찬가지다. 내 회사를 내 마음대로 한다는데 왜 참견이냐는 식의 태도로는 더 이상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 과거의 관행이었다거나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춘 투명한 경영이 기업인들에게도, 우리 사회에도 꼭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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