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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감 共感
‘예수의 날’이다. 예전에는 자정을 넘겨서 때로는 새벽까지 동네를 무작정 걷는 습관이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보낸 ‘우정의 취기’를 기억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애인과 함께 즐긴 ‘사랑의 달콤함’에 좀 더 붙잡히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광야에서 신성을 회복하는 순간
영원한 삶의 형식 가능함 보여줘

타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 명해
삶이 괴로운 이에게 기적 선사
오늘 다시 묻자 “그라면 어떻게…”

하지만 동네를 장식한 성탄나무 장식을 하나하나 세면서, 홀로 떨어져, 무작정 기다린 것은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 그 사람이었다. 정녕 묻고 싶었다. 정의가 스러지고 평등이 무너지고 윤리가 파탄 나고 우아함이 사라진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왜 인간을 단번에 구원하지 않느냐고.  
 
“저 하늘의 무거운 침묵이 나를 괴롭게 할 뿐” ‘숨은 신’은 대답이 없었다. 번민으로 타는 마음이 지칠 때까지 서성대도,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신이 침묵하자 문학이 입을 열었다.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한다. “지나갔다고! 어리석은 말이로다. 어째서 지나갔다는 것이냐. 지나간 것과 전혀 없는 것은 완전히 같은 것이다! 영원한 창조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창조된 것은 모두 무(無) 속으로 끌려가기 마련이다! 나는 오히려 저 영원한 무가 더 좋단 말이다.”
 
악마는 무얼 해도 의미 없다고 유혹한다. 아니, 무의미만 창조하도록 유혹한다 해도 좋겠다. 인간의 한 살이란 시간의 영원한 눈금 위를 한 칸 지나가는 일에 불과하고, 일단 지나가면 우리가 분투했던 것들은 전혀 없는 것과 똑같다고 선언한다. 죽는 것과 잠자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살아가면서 의미를 생성하려고 분투하지 않는 인간은 모두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난다.
 
어쩌면 스물아홉 살, 청년 예수도 비슷한 괴로움을 겪었을지 모른다. 물질에 대한 지지 않는 열망이, 출세에 대한 사그라지지 않는 불길이, 기적에 대한 무너지지 않는 갈구가 가져오는 헛됨 탓에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목수 일자리를 내던지고 광야로 들어가 40일 동안 음식을 끊었을 때 악마가 던진 질문이야말로 ‘화려한 무의미’의 총화가 아니었을까. 물욕도 인간을 구할 수 없고, 명예욕도 인간을 구할 수 없다. 또한 인간의 삶에서 한 번에 이룰 수 있는 구원도 없다. 구원은 오로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말’을 발견할 때 찾아온다.
 
붓다나 공자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인류사적 기여는 ‘영성의 발견’에 있다. 광야에서 예수가 신성을 회복하는 순간, 즉 ‘신이면서 인간이고, 인간이면서 신임’을 깨닫는 순간, 악으로 떨어지는 악마적 삶의 형식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남을 하느님의 삶의 형식이 가능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인간에게 또 다른 삶의 형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인간이 세속의 유혹을 넘어 더 의미 있고 숭고한 삶을 생성하기 위해 지금의 이 삶을 수평적으로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와 함께 가능해졌다. 이 삶의 새로운 형식을 ‘거듭남’으로 불렀다. 누구나 거듭나기만 하면 하느님과 동행할 수 있음을 선포함으로써 예수는 인간의 삶에 ‘거룩함의 형식’을 부여했다.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엘리아데에 따르면, ‘역의 합일’이다. 삶과 죽음, 성과 속 같은 모순을 같이 체험하는 일이다. 살아서 죽음을 겪는 것이 ‘거듭남’이요, 죽음에서 삶을 발견하는 것이 ‘부활’이다.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기도’요,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구원’이다. 마음에 하느님을 둔 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 세 해 동안의 공생애는 불꽃과 같았다.
 
다섯 덩이 떡과 두 마리 물고기를 통해 나눔의 기적을 일으키고, 이윤 추구의 전장으로 전락한 성전을 단숨에 뒤엎고, 진리를 빛으로 삼음으로써 형식적 율법에서 인간을 해방했다. 또한 땅 끝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하라고 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명했다. 기쁜 소리의 주어는 전도자일 수 없다. 약자의, 이웃의, 나그네의, 이방인의, 이교도의 얼굴 뒤에서도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서 기뻐하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사랑 덕분에 그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하느님의 언어라는 것이다. 이웃이 어떻게 하면 기뻐할지만 생각하라는 것이다. ‘사랑의 하느님’이기에 ‘예수라는 삶의 형식’은 이 땅에서의 삶이 지옥 같았던 이들에게 항상 기적으로 다가왔다. 예전에 자주 던졌던 질문을 오늘, 모두와 함께, 묻고 싶다.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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