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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망명 추진 중 독살 … 3·1운동·임정 탄생 밑거름 돼

[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16·끝> 에필로그
1890년대부터 일제는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식민지 프레임은 ‘고종 말살’에 초점을 맞췄다. 식민지 프레임은 지금도 여전히 작동 중이다. 우리 역사책에서 고종은 실종됐다. 항일 독립전쟁을 위한 ‘비상 전시(戰時) 체제’로 대한제국을 창건하며 근대화 개혁을 지휘했던 그의 삶은 다시 조명되어야 한다. [중앙포토]

1890년대부터 일제는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식민지 프레임은 ‘고종 말살’에 초점을 맞췄다. 식민지 프레임은 지금도 여전히 작동 중이다. 우리 역사책에서 고종은 실종됐다. 항일 독립전쟁을 위한 ‘비상 전시(戰時) 체제’로 대한제국을 창건하며 근대화 개혁을 지휘했던 그의 삶은 다시 조명되어야 한다. [중앙포토]

대한제국 창건 120주년이 되는 2017년을 맞아 “‘식민지 프레임’ 이제는 벗자”는 제안으로 지난 8월 13일 시작한 이 연재를 이제 마무리 지어야 한다. 우리 역사의 근대적 서술이 이미 1890년대부터 일본인들과 친일파의 손에 의해 쓰이며 왜곡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식민지 프레임은 1945년 광복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작동 중이다. 우리 안에 깊숙이 뿌리 내린 식민지 프레임을 걷어내는 출발점이 바로 대한제국이다.

고종, 다섯 차례 ‘국외 망명’ 기도
러시아 비밀자료 해제로 알려져
윤치호도 일기에 고종 독살 묘사

고종황제 부처의 죽음이 남긴 것
황후 시해는 대한제국 창건 씨앗
황제 독시는 대한민국임정 일으켜

 
대한제국과 우리 근대사의 무엇을 되살려 내야 하는가. 한국 근대사에서 사라진 두 전쟁을 복원해야 한다. 1894년(갑오년)의 ‘갑오왜란’과 1904년(갑진년)의 ‘갑진왜란’이다. 일제가 한반도를 송두리째 삼켜버리기 위해 기획하고 은폐한 이 두 전쟁을 되살려 내야 조선과 대한제국이 왜 멸망했고 어떻게 다시 부활했는지가 드러난다. 조선은 갑오왜란으로 멸망했고, 대한제국은 갑진왜란으로 멸망했다. 일제는 ‘평화적 합병’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 이 두 전쟁을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두 전쟁을 은폐하자 그에 맞선 우리 민족의 항전도 사라지거나 대폭 축소 왜곡됐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도 이제 갑오왜란과 갑진왜란의 연장선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조선과 대한제국은 무기력하게 망하지 않았다. 두 왜란에 맞서 처절하게 싸웠다. 갑오왜란 때 전사한 조선인이 무려 20만 명이 넘는다. 청일전쟁 기간 청·일 양측의 전사자를 합친 것보다 4배나 더 많이 희생된 전쟁이 갑오왜란이다. 갑진왜란 이후에는 대한제국 때 육성된 국군 3만 명이 가세하며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대한제국 국군과 민군(의병)이 연합한 ‘국민군’은 대한독립의군-광복군으로 명맥을 이어가며 1945년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독립전쟁을 계속했고 마침내 승리했다. 갑진왜란부터 광복까지 41년간의 항일 독립전쟁이었으며, 갑오왜란부터 치면 51년간의 역사상 최장기 항전이었다.
 

‘갑오왜란’을 ‘갑오경장’으로 포장·미화
그동안 우리 학계의 대한제국 관련 연구는 양과 질에서 전반적으로 빈약한 가운데 주로 ‘근대화 개혁’ 부분에만 집중됐다. 대한제국은 근대화 개혁에서도 빛나는 성과를 거뒀다. 전차·철도·전신·전화 등 교통통신체계의 완비, 근대적 학교와 대중교육기관의 집중 설립, 근대적 회사 설립 등 ‘광무개혁’의 성과는 당시 아시아는 물론 세계적 수준에서도 그렇게 뒤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에 앞서 대한제국 제1의 존재의 이유는 항일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전시(戰時) 비상국가 체제’였음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갑오왜란을 ‘갑오경장(개혁)’으로 포장하고 미화하는 일은 이제 그쳐야 한다.

 
갑오왜란으로 경복궁에 유폐돼 있던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의 ‘망명’(아관망명·1896)을 통해 왕권을 회복하고, 경운궁(현재 덕수궁)을 새 정궁으로 삼아 일본군의 재침략을 막기 위한 일종의 ‘국내 망명정부’로 세운 체제가 대한제국이다. 경운궁내에 신설된 원수부를 중심으로 국방력 증강에 나서며 3만 명 규모의 신식군대를 육성하고, 대한제국무관학교를 세운 것은 그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고종을 비하하기 위해 일제와 친일 개화파들만 사용했던 용어인 ‘아관파천’은 이제 ‘아관망명’으로 정당하게 고쳐 불러야 한다. 아관망명이 성공했기에 대한제국 창건이 가능했다. 그 이후 이뤄진 항일 독립전쟁과 근대적 개혁의 출발점이 모두 아관망명이었던 것이다.
 
일제가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한제국을 ‘미개한 야만의 나라’ ‘무능의 대명사’로 왜곡시켜 놓은 식민지 프레임의 본질을 이제는 꿰뚫어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갑신정변·갑오경장·독립협회와 독립신문·만민공동회 등으로 이어지는 친일 개화파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고종이 기획하고 정부자금과 내탕금을 보내 창립했으나 ‘친일파의 소굴’로 전락한 독립신문·독립협회의 변절은 특히 주의해서 봐야 한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서재필이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같은 기초적 사실 관계조차 완전히 거꾸로 기록돼 있는 것이 우리 역사책의 실상임을 깊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항일 독립전쟁과 근대화 개혁을 지휘한 고종을 기억해야 할 차례다. 기존의 역사책에서 고종은 실종됐다. 고종과 근왕세력은 근대화를 거부한 위정척사파가 아니었고, 또 근대화에 매몰된 ‘개화 지상주의’ 친일파와도 달랐다. 고종은 위정척사파와 친일개화파의 양극단을 배제하고 구본신참론(舊本新參論)의 중도개혁 철학을 기반으로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광무개혁을 이끌었다. 그런데도 기존의 역사책들 속에서 고종과 근왕세력은 위정척사파와 도매금으로 취급되며 보수반동의 수구파로 폄하되곤 한다. 그런 오류를 더는 반복해선 안 된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일제는 고종을 강제 폐위시켰지만 백성들 마음속에서 고종의 권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궁궐에 유폐된 상황에서도 계속 거의밀지를 내리며 독립전쟁을 지휘하던 고종은 1918년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으로 조성된 새로운 국제정세를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미국이 일제의 한국병탄을 도움으로써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제1조 ‘거중조정 의무’를 위배한 것에 대해 윌슨에게서 사과를 받고 국권회복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려고 했다. 이와 동시에 고종 자신의 북경 망명을 추진했다. 이를 막으려는 일제의 야만적 대처가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독시(毒弑)였다(이태진, ‘고종황제의 독살과 일본정부 수뇌부’. 『歷史學報』 제204집, 2009 ; 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485~529쪽) 고종은 북경에 행궁을 마련하게 하고 경운궁을 빠져나가는 방도를 찾던 중 끝내 독살당하고 말았다. 향년 67세였다.
 
고종의 망명 기도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990년대 탈냉전 이후 러시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이런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04년 러일전쟁의 위험이 커지자 고종은 러시아 측에 망명 가능성을 은밀히 타진했다. 이때는 국내의 러시아 공사관뿐만 아니라 국외망명까지 고려한 것이었다.(박종효 편역,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101쪽) 고종은 강제 폐위 직후인 1908년 초에도 일본의 감시를 피해 국외 망명을 시도했다.(박종효 편역,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73쪽) 또 1908년 11월에도 고종은 망명을 기도했으나 당시 러시아 측 대일협상파에 의해 저지당했다.(『한국관련 문서요약집』 74쪽) 고종은 1910년 6월경 다시 연해주 망명정부 수립을 기도했다.(외교통상부, 『이범진의 생애와 항일독립운동』, 2003년, 223~224쪽)
 
그러니까 고종의 1918년 북경망명 기도는 5번째 시도였던 셈이다. 고종의 국외 망명이 가져올 파급 효과를 고려할 때 고종의 망명은 일제가 모든 것을 걸고 막아야 하는 식민지 통치의 제1의 대원칙이었다.(김명섭, 『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역사공간, 2008, 96쪽)
 
일제는 뇌졸중 병사로 고종의 죽음을 위장했다. 하지만 고종의 죽음이 독살이었음은 친일 성향의 윤치호 일기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윤치호는 또 다른 친일파 한진창이 전하는 말이라면서 고종의 시신 상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완벽한 건강을 누리던 황제가 식혜를 섭취한 뒤 반시간 만에 격렬하게 몸을 뒤틀면서 죽었다. 황제의 팔다리가 하루 이틀 사이에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서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 할 정도였다. 혀가 닳아 없어지고 치아는 모두 빠져나왔다. 1피트(30.38㎝)쯤 되는 검은 줄무늬가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윤치호 일기』 1920.10.13.)
 
3·1운동은 고종의 ‘대한제국’ 광복 운동
1919년 3월 3일 새벽 경운궁(현재 덕수궁) 대한문을 나오는 고종 장례 재궁(梓宮·임금의 관) 행렬.

1919년 3월 3일 새벽 경운궁(현재 덕수궁) 대한문을 나오는 고종 장례 재궁(梓宮·임금의 관) 행렬.

고종의 비참한 죽음은 3·1운동에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사진은 당시 종로에서의 만세 시위. [중앙포토]

고종의 비참한 죽음은 3·1운동에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사진은 당시 종로에서의 만세 시위. [중앙포토]

‘고종 독시’는 대한제국이 부활하는 씨앗이 되었다. 3·1운동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자 기폭제가 고종 독시였다. 3·1운동은 ‘조선’을 복고하려는 ‘조선독립만세’ 운동이 아니라, 일제에 유린된 고종의 ‘대한제국’을 광복하려는 ‘대한독립만세’운동이었고, 4개월이나 지속한 이 거국적 만세 운동의 열기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종황제 부처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명성황후가 처절하게 죽음으로써 그에 대한 백성들의 공분이 대한제국을 일으켰듯이, 고종황제의 비참한 독시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일으킨 것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상해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국호 ‘대한’을 계승했고, 그 헌법에 ‘구황실우대’ 조항을 설치했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독립정신에 부응하고 광복전쟁 과정에서 그 정신을 이어가려고 했던 것이다. 3·1운동으로 창건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당시 제국주의 시대에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임시정부였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532쪽)
 
고종의 특사 임무를 두 번 맡아 수행한 호머 헐버트는 1942년 2월 27~28일과 3월 1일 워싱턴 DC 라파예트호텔에서 열린 ‘한국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 초청연설에서 광무제 고종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국왕은 왜인들에게 한 번도 굴한 적이 없다. 그는 자의적(自意的) 동의로 자기 왕권의 신성함을 더럽힌 적도 없다. 그는 비록 휘어진 적은 있었을지라도 결코 부러진 적은 없었다. … 도처의 한인들에게 나는 그들의 마지막 국왕의 영원한 충정을 미래의 모든 시대를 관통해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바다.”  

 

자문 전문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참고자료  『갑진왜란과 국민전쟁』(황태연·청계·2017), 『끝나지 않은 역사』(이태진·태학사·2017),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한영우·경세원· 2016), 『러일전쟁과 대한제국』(와다 하루키·제이앤씨·2011),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서영희·서울대출판부·2003),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나카츠카 아키라·푸른역사·2002),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관련 문서요약집』(박종효 편역·한국국제교류재단·2002)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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