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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지는 것도 습관 된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 경제의 아버지로 불린다. 건국 초기 미국의 대통령들은 ‘공화주의적 농업 국가’를 꿈꿨지만, 해밀턴은 달랐다. 그가 그린 미국은 ‘상업적 공업국가’였다. 해밀턴은 1791년 제조업 국가로 전환을 위한 경제개발 이론을 내놓는다. 버클리 대학의 경제학자 스티븐 코언은 이를 ‘해밀턴 시스템’이라고 불렀다. 해밀턴 시스템의 핵심은 ‘높은 관세’다. 관세는 건국 초기 미국 기업이 제조업 기술 개발에 투자할 인센티브와 성장 동력을 제공했으며 신기술 개발을 위한 보조금으로도 쓰였다. 코언은 해밀턴 시스템이 자칫 영국의 경제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었던 미국 경제를 제조업 강국으로 바꿔놓은 ‘신의 한 수’였다고 평가한다. (『현실의 경제학』)
 

미·중 막무가내 통상 압박
물러서기만 할 일 아니다

한 나라의 정치·경제·외교는 성공 모델로 회귀하는 본능이 있다. 더 좋은 모델이 나와도 자꾸 과거를 답습하려 든다. 더 편리한 자판이 나와도 불편하지만 익숙한 쿼티(QWERTY) 자판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이른바 경로 의존(path dependence) 법칙이다. 강대국일수록 더하다. 옛 영화와 성공의 기억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밀턴 시스템과 경로 의존이야말로 요즘 미국·중국의 막무가내 통상 압박을 설명하는 키워드다. 도널드 트럼프의 보호무역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해밀턴의 ‘높은 관세’는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100년 넘게 이어졌다. 트럼프뿐 아니라 미국 조야의 큰 흐름으로 봐야 한다. 4일 내놓은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보고서에 그런 속내가 담겨 있다. ITC는 ‘삼성·LG전자의 세탁기에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발동하는 게 미국 경제에 좋은 일’이라고 썼다. 미국 1위 세탁기 업체 월풀의 세탁기 공장에서 1300개의 일자리가 생기고 투자도 늘어날 것이며 미국의 경쟁력도 강화될 것이라고 적시했다. 국익 앞에선 자유무역 질서가 훼손되거나 삼성·LG의 수출이 반 토막 나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삼성·LG의 세탁기는 시작일 뿐이다. 미국은 철강·태양광·화학에 이어 반도체까지 겨냥하고 있다. 세이프가드뿐 아니다. 가능한 수단은 총동원하고 있다. 반덤핑 관세, 무역 확장법 적용은 물론이요 세계무역기구(WTO)의 경고나 중재는 아예 무시한다. 이런 미국을 상대하면서 정부는 ‘기업들이 알아서 하겠지’ ‘트럼프의 마음만 돌려놓으면 된다’는 식이다. 어림없는 얘기다.
 
시진핑의 중국은 한 술 더 뜬다. 미국은 룰과 규칙을 지키는 시늉이라도 하지만 중국은 그것도 없다. 우리 기업 피해가 20조원이 넘어갔지만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 체계) 보복은 없다’고 잡아뗀다. 한국 기업인 롯데가 한국 정부에 협조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콕 찍어 손본다. 급기야 관영 언론까지 나서 ‘사드 3불을 약속하라’며 한국의 대통령을 몰아붙이는 판이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강대국의 경로 의존 법칙이 작동한다.
 
중국은 가깝게는 17년 전 마늘 파동 때 성공의 기억이 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세이프가드를 발동했다가 중국의 생떼에 백기투항했다. 멀리는 16~18세기 조공 무역의 기억도 있을 것이다. 당시 중국은 세계 최부국이었다. 중국 황제는 원하는 물건을 원하는 장소·시간에 거래했다. 시진핑의 중국이 꿈꾸는 한·중 관계도 그것일 것이다. 여기에 굴복하면 결과는 불문가지다. 제2, 제3의 롯데가 속출할 것이다. 20조원의 피해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부당한 압박과 보복을 콕 찍어 이겨내는 결기를 보여줘야 한다. 국민이 똘똘 뭉치고 국제 사회의 협력을 끌어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한국의 경로’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두고두고 미국·중국의 경로에 따르게 될 것이다. 길들여지는 것이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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